
“어르신 올해 연세가 얼만교? 일흔다섯?”
“넘(남)의 나이를 와 그리 높이 보노. 아저씨 눈이 좀 이상타.”
뜻밖의 호통에 혼쭐난 ‘택시 기사’는 경북 포항 북구를 지역구로 둔 한나라당 이병석(李秉錫·55) 의원이다.
“나이를 10년이나 더 봤으니 찍혀도 싸지…어르신, 제가 국회의원 이병석입니더.”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리자 할머니는 다시 “국회의원이 제 일은 안 하고 뭐 하러 이리 돌아다니노? 돈도 많이 벌고 비서 델꼬 다니는 사람이 택시 운전은 와 하노” 하고 몰아세웠다.
이 의원이 “우리 시에서 재개발, 재건축 지역으로 지정해달라고 도에 신청한 곳이 26군데인데 요번에 모두 확정된 거 아시지요? 어르신이 사시는 곳도 상습침수지역이라 요번에 통과됐어요. 그곳 조합장님이 저한테 와서 통과시켜달라꼬 하도 부탁을 해쌌고, 아이구…말도 마이소”라며 너스레를 떨자 그제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잠시 뒤 할머니가 내려야 할 곳을 조금 지나쳐 차를 세우자 “조만치에 서야 되는데 와 이리 마이(많이) 왔소!”라고 핀잔을 했다. 재빨리 택시에서 내린 이 의원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캐리어에 얹어주자 할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걱정스러운 듯 뒤를 따르던 이 의원은 할머니가 골목 어귀로 사라지자 택시로 돌아왔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낸 재선(再選)의 이병석 의원은 올해로 6년째 여름이면 지역구에 내려가 이틀 동안 택시 운전대를 잡는다. 영업용 택시 안은 실물경기를 체감하는 바로미터이자 서민의 삶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돈 벌러 갑니데이”
“한나라당의 주도로 이번 국회에서 기초노령연금지원 법안을 통과시켜 내년부터 65세 이상 노인에게 매달 연금을 주게 됐어요. 또 택시업계를 위해 영업용에 부과되는 LPG 특별소비세 폐지를 추진 중이고, 고급 운송수단으로 되어 있는 택시를 대중 운송수단으로 바꾸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죠. 피부에 와 닿는 정책들을 세우고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은 민심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택시를 몰면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손님을 만나 대화를 하면서 민생경제와 관련한 의견을 듣고 이를 의정활동에 반영할 수 있어요.”
그가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된 건 16대 총선을 앞두고 만난 택시 기사들과 한 약속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구에 나타났다 당선되면 코빼기도 안 보인다. 지역구에 내려와서 택시 운전을 하라면 할 수 있겠느냐”는 기사들의 빈정거림에 이 의원은 “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선 직후 1종 운전면허 시험을 치러 택시 기사 자격증을 딴 그는 2002년부터 해마다 포항을 찾고 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일정으로 다른 해보다 조금 늦어진 9월2일(일요일)과 3일(월요일) 이 의원이 포항으로 내려와 운전대를 잡았다.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12시간 낮 근무를 자원한 그를 동행 취재하기 위해 9월2일 심야버스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북구 우현동에 위치한 (주)영광교통에 미리 도착해 30분쯤 기다리자 새벽 3시45분 회사 입구에 중형 SUV 한 대가 와서 멈췄다. 이 의원이 수행비서 등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교대근무를 하러 나온 기사들에 둘러싸여 인사를 나누던 그가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영업이 영 신통치 않았다. 손님이 13명뿐이었다. 12시간 일하고 3만4000원 벌어서 사납금(5만9000원)도 못 채웠다”고 한숨을 내쉰다.
이 의원에게 내준 택시는 ‘경북11바2347’. 조수석 앞쪽에 자신의 택시 기사 자격증을 끼워넣은 그가 “내, 돈 벌러 갑니데이” 하며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기자가 택시에 동석하면 손님들이 잘 타지 않는다”는 비서관의 충고에 따라 일행과 함께 SUV에 올라 택시 뒤를 따랐다. 택시 안의 대화를 들을 수 있도록 무선 마이크를 장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