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 등장이 중대 분기점
‘이인영 모델’과 다른 ‘하승창·김기식 모델’
간사부터 시작해 비례대표 입성 ‘윤미향·남인순 모델’
“제3섹터인 시민단체가 어용이 됐다”
연봉 1억5187만 원 운동가? “집단적 자기변명”
시민단체 핵심 실무자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당·정·청 요직에 진입한 윤미향, 김기식, 남인순, 하승창 씨(왼쪽부터).
김상조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한성대), 김연명 사회수석비서관(중앙대),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대구가톨릭대)은 각각 참여연대에서 경제개혁센터 소장과 사회복지위원장, 국제인권센터 소장을 지냈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서울대)과 정현백(성균관대) 전 여가부 장관은 각각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같은 단체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서울대)은 사법감시센터 소장, 장하성 전 정책실장(고려대)은 경제민주화위원장, 김수현 전 정책실장(세종대)은 정책위 부위원장을 지냈다. 실행·자문위원 출신 인사들까지 합치면 권부를 주름잡는 대(大)는 서울대가 아닌 참여연대다. 세간에는 ‘만사참통’이라는 말이 돌았다.
모두가 ‘폴리페서’를 주목하는 사이 ‘진짜 활동가’들이 존재감을 키워갔다. 청년 시절부터 시민단체 일선에서 훈련된 간사 출신들이 당·정·청에 야금야금 진입했던 것이다. 시민단체 간사 출신인 한 박사과정 대학원생은 “간사들은 ‘박봉에도 일할 수 있겠느냐’는 수차례 질문에 ‘오케이’를 하고 상근직을 택한 사람들”이라면서 “자기 직장을 두고 비상근으로 일하는 교수들과는 헌신성에 있어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교수가 공중전에 치중했다면, 간사는 진지전·지구전에 능했고 저인망 방식으로 바닥부터 다질 줄 알았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이 단절선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원순 당선자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캠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동아DB]
전두환 정권에 맞섰던 ‘왕년의 운동권’ 청년들은 이즈음 시민단체의 간사로 변신해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훗날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된 이인영 민주당 의원은 1988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간사로 합류했다. 비슷한 시기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도 시민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인영이 전대협 의장을 하던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내며 6월항쟁에 함께 참여한 인연이 있다.
이인영은 1999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정치권에 들어갔다. 김대중 정부 출범은 시민단체의 제도권 진출에 물꼬를 텄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던 1998년 1월 4일 시민단체연합 신년 하례식에 참석했다. 2003년 1월 6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신년하례식을 찾았다. 2004년 5월에는 대통령비서실에 ‘시민사회수석실’이 신설됐다. 전례 없는 일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민경우의 회고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 (386 학생회장 출신) 대부분이 사회운동의 언저리에 있었어요. 같이 회의도 하고 그랬죠. 윤미향 씨도 몇 번 봤어요. 이후 김대중 정권에서 과거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만들어졌잖아요. 시민단체에서 간사로 일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3급, 4급 공무원으로 꽤 많이 갔어요. 연이어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니 상당 규모로 시민단체 출신 공무원 풀(pool)이 형성됐습니다. 이 친구들이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일을 잃더라고요. 이때부터 뭐랄까요, 분노가 축적됐다고 할까요.”
2011년 10월 중요한 단절선이 등장했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를 만든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학번으로 환경 관련 단체에서 활동해 온 S씨는 “박 변호사가 서울시장이 된 뒤 환경, 노동, 청년, 젠더 등 진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서울시청 안팎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정적 월급이 주는 안락함도 있고, 비상근이더라도 공적 지위를 갖게 된 명예가 생겼다”고 했다. S씨는 한때 서울시가 꾸린 자문기구 회의에 수차례 나갔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가 2017년 10월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박성중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제출한 ‘서울시 별정직 채용현황’ 자료에 따르면 박 시장은 2011년 10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총 105명의 별정직 공무원을 채용했다. 이 중 27명이 시민사회단체 및 노조 출신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희망제작소 출신은 9명에 달했다. 그 외에 민주노총, 아름다운재단, 환경정의연구소, 참여사회연구소 출신 인사들이 서울시에 입성했다.
민경우는 “같이 운동했던 친구 대부분이 ‘박원순 서울시’ ‘이재명 경기도’ ‘조희연 서울시교육청’에 들어갔다. 2010년대 초 함께 청년당을 만들려던 청년들도 서울시에 꽤 높은 직급으로 갔다”며 “(활동가들이) 정부 및 각 지자체에서 종횡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세력화했다. 하나의 권력집단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이후 시민단체는 돈도 많이 쓰고 정치권과 결합도 강화하는 등 내가 익히 알던 모습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간사에서 국회의원까지 질주
무소속이던 박 시장은 2012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이 시기를 즈음해 민주당과 시민단체 간의 담장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2012년 7월 20일 국회에서 ‘국회 시민정치포럼’ 창립행사가 열렸다. 포럼은 “2010년,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2012년 총선을 거치며 제도권 정치와 시민운동,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간 협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해 갔다. ‘시민 정치’ 활성화를 국회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정당과 시민운동, 국회와 시민사회가 협력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을 연구하겠다”고 선언했다. 포럼의 대표는 시민단체 출신인 남인순 의원과 이학영(민주통합당), 박원석(정의당) 당시 의원이 맡았다.학생회장 경력을 훈장으로 젊은 나이에 정치권에 진출한 ‘이인영 모델’과는 다른 모델이 생성되고 있었다. 먼저 시민사회단체 핵심 실무자로 있다가 ‘박원순 서울시’를 경유해 청와대와 국회에 진출하는 식이다. 경실련 간사·정책실장 출신인 하승창 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 입성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김기식 전 의원은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 특별보좌관을 지낸 뒤 이듬해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4번을 받고 국회의원이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금융감독원장에 지명된 뒤 15일 만에 퇴진했다.
한편에서는 또 다른 모델이 개화했다. 간사로 시작해 사무국장, 대표, 이사장 등을 역임한 뒤 그 명망을 바탕으로 비례대표 안정 순번을 받고 국회에 입성하는 형태다. 민주당 윤미향, 남인순, 정춘숙, 양이원영 의원과 권미혁 전 의원 등이 이런 이력을 공유한다.
윤미향은 1992년 정대협 간사로 시작해 사무국장, 사무총장을 거쳐 2008년부터 정대협 상임대표를 지냈다. 그 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이 됐다. 21대 총선 때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7번을 받아 당선됐다. 남인순은 1988년 인천 일하는여성의나눔의집 간사로 시작해 1994년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사무국장과 상임대표를 지냈다. 19대 총선 때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9번으로 당선됐다.
정춘숙은 1992년 여성의전화 간사로 시민사회단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를 지냈다. 20대 총선 때 민주당 비례대표 13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21대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9번으로 당선된 양이원영은 1997년 환경운동연합 간사로 합류해 에너지기후팀 처장을 지낸 뒤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을 지냈다. 권미혁은 여성평우회 간사를 지낸 후 1987년 한국여성민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2005년부터 6년간 상임대표를 맡았다. 제20대 총선 때 민주당 비례대표 11번을 받아 당선됐다.
“부동산 투자·자녀 사교육 하는 등 변질돼 가고 있었다”
청와대도 ‘간사 출신 고위직의 산실’이 됐다.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한국여성단체연합 간사와 정의연 실행이사 출신이다. 탁현민 의전비서관은 참여연대 문화사업국 간사를 지냈다. 김금옥 전 시민사회비서관은 전북민주여성회 간사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해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사무처장을 지냈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6월 10일 국민의당 주최 세미나에서 “제3섹터라 할 수 있는 시민단체는 어용이 됐다”면서 “시민단체들이 착란 상태에 빠졌다. 아예 저쪽에 붙어서 그들보다 더 해먹고 있다. (여권과 시민단체의) 거대한 블록이 형성돼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다”고 꼬집었다. 정작 활동가 출신 ‘권력자’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운동가’로 자처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운동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 ‘법과 제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해서’라는 게 주된 명분으로 활용된다. 연간 1억5187만9780원에 달하는 연봉(국회사무처)을 받는 최고위공직자가 ‘운동을 한다’고 한다. 민경우에게 물었다.
-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정부·국회에 가서도 ‘나는 운동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부터 괴리가 생겨나는데, 이 친구들을 실제 만나 보면 그 내면에서는 상당한 월급과 지위에 심취해 있어요. 중산층화한 거죠. 또 부동산 투자나 자녀 사교육을 하는 등 많이 변질돼 가고 있었어요. 어쨌든 자신들을 변호해야 하니 ‘운동을 한다’는 레토릭을 씌웠을 뿐이죠. 2010년 넘어가면서 그 친구들에게 상당히 이질감을 많이 느꼈어요. 옛날에 알던 걔네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 한때 시민단체에서 정치권에 가는 걸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뭐 어때’인 듯합니다.
“과거에는 정치권에 가는 것보다 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생각했어요. 중추 인력은 현장에 있었고, 정치권에 가더라도 파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2010년 이후에는 운동권의 중심들이 아예 가버린 거죠. 그러고는 자신을 변호하는 논리를 만들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챙겼죠.”
- 정치권에서 법과 제도를 바꾸겠다는 게 공통적 발언인데요.
“집단적인 자기변명이에요. 오히려 현장에서 할 일이 있어요. 시민단체 사람들이 정치권에 가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다 자기합리화입니다.”
“시민단체 권력화, 굉장히 곤란한 일”
시민단체는 청와대보다 높은 신뢰도를 자랑하던 집단이었다. 성균관대와 삼성경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한국 종합사회 조사’에서 시민단체의 신뢰도는 2003년, 2004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청와대와 국회, 검찰 등을 모두 제친 순위였다. 이듬해 순위는 5위로 떨어졌다. 그 뒤 좀체 반등하지 못했다. 권력과 불화하는 행동 양식은 가뭇없이 사라졌다.해외의 경우는 어떨까. 랠프 네이더(Ralph Nader)는 1960년대부터 미국 시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64년 제네럴모터스(GM) 자동차의 구조 결함을 문제 삼아 수십만 대 자동차 리콜을 이끌어냈다. 그 뒤 환경운동, 의회 감시 등 운동의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그는 1992년 이후 미국 대선에 4번이나 출마했다. 하지만 늘 민주‧공화 양대 정당이 아닌 소수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시민운동을 정계 진출의 도약대로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외려 그는 영향력 확산 등 시민운동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선거를 도구로 삼았다. 시민운동에서 쌓은 명망을 상징자본 삼아 집권당 후보로 공천 받는 행태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올해로 창당 40년을 맞은 독일 녹색당은 1970년대 후반 시민단체 연합체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1월 창당했는데, 당시에는 ‘반정당 정당(Anti-Parteien-Partei)’의 기치를 내걸었다. 편하디 편한 기성정당의 길을 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면서 기민당, 사민당이 포괄하지 못하는 환경‧생태 이슈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혁혁한 성과를 냈다. ‘시민사회’ 몫으로 집권당에 영입되는 것과는 구별되는 사례다. 물론 독일 특유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동력이 됐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거에 시민단체가 성직자와 비슷한 수준의 신뢰도를 가진 적도 있었다”면서 “직업 선택의 자유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시민운동이 정치로 나아가는 건 지양해야 한다. 이념 지향이 무엇이건 시민운동 본연의 기능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다. 스스로 권력화하면 굉장히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