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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을 배신한 ‘투명인간’ 고려 노예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칸’을 배신한 ‘투명인간’ 고려 노예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남들과 달리 몹시 희미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어린 하윤근은 놀랍다기보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개경 남문 밖에서 대대로 양봉업에 종사하던 집안 막내로 태어난 그는 동무들과 어울려 성안 골목길을 무대로 술래잡기를 하곤 했다. 그 일이 벌어진 건 저물녘이었다. 성문이 닫히기 전 벌인 마지막 놀이의 술래였던 그는 붙잡힌 동무가 짓는 이상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이상하게 보니? 잡힌 게 분해서 그러니?”

동무는 말없이 윤근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자기 다리 쪽을 내려다본 윤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지 밖으로 드러난 다리가 윤곽선만 남은 채 뿌옇게 지워져 있었다. 서둘러 만져보니, 다리 자체는 멀쩡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이던 윤근이 웃으며 속삭였다.

“몸이 자라느라 이런 걸 거야. 곧 괜찮아지겠지.”

자꾸 사라지려는 존재

윤근의 기대와 달리 몸 형체가 흐릿해지거나 일부가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증상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소문이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자 이게 길조인지 흉조인지 논의하는 부락회의가 열렸다. 촌장은 마을 무당의 애매한 판단에 기대 윤근네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윤근네는 벌도 잘 기르고 만드는 꿀의 질도 아주 좋아. 윤근이는 늘 웃고 다녀 마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하지만 계속 저러다간 끝내 몸뚱이마저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사라진다면 아이한텐 슬픈 일이겠지만 그래도 깔끔하기라도 하지. 생각해 봐. 몸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지금이야 윤근이가 착하다지만, 또 모를 일 아닌가? 보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나? 제발 떠나주게.”

윤근 아비는 격노해 촌장과 말다툼을 벌였지만, 그날 밤 내내 근심으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 형과 누나들 역시 막내에게 찾아온 불행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될까 더럭 겁에 질렸다. 어느 날 맏형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윤근이를 아끼시지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자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의 혼혈 왕은 원나라 황제 곁에 가 있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천하의 바보랍니다. 대신 원 황제가 다루가치인지 뭔지 하는 몽골 감독관놈을 보내 국정에 간섭하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다루가치한테 부탁이라도 하자는 얘기더냐?”

“네! 왜 안 됩니까? 다루가치가 올 때마다 온갖 진기한 서역 물건을 선물로 가져오면서 기괴한 광대나 놀이꾼도 데려오지 않습니까? 혹이 둘 달린 꼽추도 본 적이 있습니다.”

“윤근이를 그럼 저 ‘달단놈’들이 데려오는 서역 곡예단에 팔자는 얘기냐?”

“그게 윤근이에게도 살 길입니다. 저 이상한 증세가 혹시라도 성안에 알려지기라도 해보십시오!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한데 무슨 모진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어디 다른 곳으로 떠날 뾰쪽한 재주라도 있습니까?”

윤근 아비는 아무 대답 없이 한숨만 몰아쉬었다. 그 소리를 엿듣던 윤근이 살며시 맏형 옆자리에 다가앉으며 속삭였다.

“아버지, 그리고 형님! 전 괜찮으니 달단 곡예단에 넣어주세요. 원으로 가서 세상 구경 크게 하고 반드시 대성해 돌아오겠습니다.”

남대문을 통해 원나라로 돌아가려던 다루가치는 낙타교 근처에서 자신을 향해 읍소하는 윤근 아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려어에 능숙한 그는 자못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데려와 봐라. 보고 나서 결정해야지. 만약 거짓말이면 바로 목을 친다. 알았느냐?”

고개를 끄덕인 윤근 아비가 막내를 데리고 다루가치가 탄 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호위병이 더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칼을 반쯤 뺐다가 칼집에 도로 넣었다. 윤근은 긴장으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루가치가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뒤 웃옷을 벗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다고 바로 몸이 투명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윤근이 그 순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눈가가 가늘게 찢어지며 다루가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통한 재주이긴 한데,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더 가까이 와라!”

낙타교의 다루가치

윤근은 다루가치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멈췄다. 콧수염을 쓸며 한참 동안 윤근의 몸을 살피던 다루가치가 행렬 뒤쪽의 곡예단 행수를 불렀다. 둘은 오래도록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마침내 다루가치가 입을 뗐다.

“데려가겠다.”

말을 마친 다루가치는 곧바로 성문 밖을 향해 말을 몰았다. 병사들이 윤근을 수레에 태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윤근 아비가 큰길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아니, 잠깐만요! 아들하고 이별 인사나 하게 해주시오! 손이라도 잡고 인사나 한번!”

갑주로 무장한 병사 하나가 윤근 아비를 방패로 밀쳐 길가로 몰아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한 윤근이 수레 장막을 걷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자 했지만 수많은 구경 인파 사이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장막은 이내 닫혔고 윤근의 유년기도 그렇게 느닷없이 끝났다.

원나라 수도인 대도는 ‘칸의 도시’라는 뜻의 몽골어 ‘칸발룩’이라 불렸다. 칸발룩 사람들은 세계 제국의 중심에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서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기초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황궁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골목길인 후통 곳곳엔 세계 유흥문화가 총집결해 있었다.

칸발룩에 처음 도착한 윤근은 동문인 숭인문 인근의 후통 숙소에 기거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곡예단 행수는 윤근이 빨리 몸 전체를 감출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윤근은 자기 몸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자체를 몰랐다. 어떤 때는 상체만 사라졌고 또 어떤 때는 얼굴만 사라졌다.

칸발룩 최고의 구경거리

먼 서역의 쿠차왕국 출신인 행수는 독실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윤근을 데리고 칸발룩 동북쪽 광희문에 자리 잡은 교회를 찾았다. 칸발룩 교회들은 ‘십자가가 달린 절’이란 의미인 십자사로 불렸다. 행수는 십자사 수도승에게 윤근의 상태를 살피게 했다. 만약 윤근에게 악마가 씐 것이라면 퇴마 의례로 이를 내쫓고 황궁의 잡역 노예로 팔아버릴 심산이었다. 윤근에게서 악마의 흔적을 찾지 못한 십자사 승려들은 퇴마식 대신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

윤근이 그저 밥이나 축내도록 놔둘 수 없던 행수는 부족하나마 그를 기예 공연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공연은 칸발룩 최고의 유흥지 종고루 해자촌에서 열렸다. 남쪽 도시 통주로 연결되는 운하 주변은 형형색색 꽃등으로 수놓아져 휘황찬란했다. 화려한 장막으로 치장된 공연장은 온갖 지역 출신의 관객으로 넘쳐났다. 서방 출신 금발미녀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 옷을 다 벗은 윤근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어느 순간 장내를 뒤덮는 탄성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개를 숙여 자기 몸을 내려다보자 목 아래 전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금발미녀가 급히 다가와 몽골어로 속삭였다.

“얼굴까지 없애봐. 넌 여기서 곡예단의 칸이 될 수 있어! 어서!”

윤근은 그게 불가능할 거라고 여겨 포기했다. 대신 자신은 이제 할 만큼 했고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서 고려로 돌아가겠다고 버텨왔지만 칸발룩의 벌거벗은 배우로 죽어도 좋겠다고 체념했다. 그 순간 주변에 침묵이 찾아왔다. 관객들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를 찾고 있었다. 당황한 윤근이 금발미녀 쪽으로 몇 걸음 움직였지만 그녀는 윤근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관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윤근이 금발미녀 옆에 바싹 붙어 서서 속삭였다.

“왜 다들 숨을 죽이고 있지?”

깜짝 놀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어머! 너 진짜 다 사라졌어! 여기 있으면 조금 모습을 보여줘 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윤근은 자기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보려 했다. 하지만 투명해지는 법을 몰랐으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도 알 리 없었다. 무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그는 장난기가 발동해 횃불 하나를 집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신이 난 그는 고수가 쥔 북채를 빼앗아 북을 두드리고 양금을 타고 곤봉을 돌렸다. 욕심이 발동해 페르시아 광대의 두건을 벗기려 할 때 그의 몸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공연장은 새로 등장한 ‘고려 요술쟁이’로 인해 끝 모를 열광에 휩싸였다.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윤근을 대하는 행수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그는 윤근을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금발미녀가 다가와 윤근에게 속삭였다.

“이제 너의 시대가 열렸어. 내 이름은 후마디야. 넌 칸발룩 최고의 구경거리가 됐어.”

금발미녀 후마디와의 사랑

종고루 해자촌에서 시작된 입소문은 삽시간에 황성 전체로 번져갔다. 몸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윤근은 어떤 이에겐 공포를, 또 다른 이에겐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몇 달 만에 돈방석에 앉게 된 행수는 윤근에게 후마디를 포상으로 내려줬다. 후마디는 윤근의 여자가 됐다. 윤근에게 몸을 자유자재로 사라지게 하는 비결을 깨닫게 해준 게 바로 그녀였다.

후마디와 첫 잠자리를 하던 날 새벽, 그녀가 윤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이제 알겠어. 방법을 알았어. 네가 마음대로 사라질 수 있는 비법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그를 향해 후마디가 다시 말했다.

“난 북방 킵차크 출신이야. 비록 곡예단 노예가 됐지만 라틴어도 할 줄 알아. 넌 모르는 서방 언어지. 아무튼 난 알아냈어.”

“뭘 알아냈지?”

“네 몸은 나랑 잘 때 완벽히 다 보였어. 어느 구석도 희미해지지 않았지.”

“그런데?”

“잠자리가 끝나며 네 몸에 희미한 부분들이 얼룩처럼 생기기 시작했어. 이게 뭘 뜻할까? 네 몸을 움직이는 게 바로 네 욕망이라는 거지!”

“내 욕망?”

“그래. 욕망을 없애면 네 몸도 사라져. 그걸 다스릴 줄 알면 우린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어. 그때 날 노예 신분에서 풀어줘. 날 사서 해방시켜 줘!”

후마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윤근은 그녀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행수에게 봉사했다. 행수는 별도로 봉급을 지급하진 않았지만 관객이 윤근에게 던져주는 선물 값은 건드리지 않았다. 칸발룩에선 그걸 ‘사르화’라고 했다. 사르화가 제법 모이자 윤근은 그 돈으로 자신과 후마디의 자유를 사고자 했다. 그의 제안을 검토하겠다던 행수는 어느 날 윤근을 불러 새로운 계약을 제시했다.

“너의 재주는 그저 놀이판 기예로만 썩히기엔 너무 아까워. 그래서 얘긴데, 나랑 더 큰돈을 벌어보지 않겠나?”

“전 후마디와 저의 자유를 사는 걸로 족합니다.”

“사고 나면? 그럼 뭘 먹고 살래? 그녀를 데리고 떵떵거리며 고려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말이 없는 윤근을 향해 행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랑 내일 테무르 님을 뵙자! 황실의 큰 어르신이시다. 너의 재주라면 크게 쓰일 수 있어, 우리 둘 다, 아니 후마디까지 벼락출세할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

“테무르 님은 뭐 하는 분이신가요?”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그저 그분이 시키는 일을 몇 번 하면 돼. 이것만 알아둬. 그분께선 황제가 되실 수도, 그리고 황제의 후견인이 되실 수도 있는 분이야. 칭기즈칸의 피를 물려받은 황금씨족의 귀족이지.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꿔버릴 수 있는.”

황궁 안 인공섬 경화도 구석 후미진 곳에 지어진 정자에 도착한 행수와 윤근은 오래도록 테무르를 기다렸다. 테무르는 초저녁이 다 돼서야 두 명의 경호원과 한 명의 비서를 데리고 나타났다. 고개를 살짝 들어 테무르의 비서를 바라본 윤근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고려에서 데려온 그 다루가치였다. 테무르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 재주는 익히 들었다. 아주 재미있어! 좋은 징조야! 하늘이 널 내게 보내준 게 틀림없다.”

윤근은 고개를 조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테무르가 다시 말했다.

“뭐 별일 아니야. 몇 명만 감쪽같이 죽여라. 할 수 있지?”

[GettyImage]

[GettyImage]

테무르의 위험한 제안

정신이 번쩍 든 윤근이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하려 분투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행수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서 대답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윤근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테무르가 메마른 음성으로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많은, 아주 많은 지전을 주지. 평생 써도 남을 거야. 대신, 배신하면 너와 네 주변 사람 모두를 갈가리 찢어 죽일 거야. 난 약속을 꼭 지켜. 그리고 누굴 죽일지는 곧 정해서 알려주마.”

테무르가 고개 숙인 윤근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멈췄다. 코 높은 신발 쿠랄이 윤근 눈에 들어왔다. 영롱한 보석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테무르가 웃음기 섞인 소리로 말했다.

“넌 이제 내 개다. 신발에 입 맞춰라.”

윤근이 쿠랄에 입 맞추자 테무르가 발길을 돌려 천천히 어둠 속 황궁 저편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온 윤근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후마디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말을 들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던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테무르는 너와 나 그리고 행수까지 모조리 죽일 거야.”

“어떻게 그걸 알지?”

“내 오빠가 황궁 용병 수비대인 킵차크군이었어. 색목인 노예로만 만든 특수부대였지. 황실엔 권력 다툼이 끊이질 않아. 오빠는 황실 중 한 명이 일으킨 역모에 투입됐다 목이 잘렸어.”

“몇 명만 죽이면 된댔어. 게다가 난 남들에게 보이지도 않아. 꼭 성공할 거야!”

시름에 잠긴 얼굴로 후마디가 윤근을 끌어안고 힘주어 말했다.

“킵차크군의 반역은 성공했었어.”

“그런데 왜 목이 잘려?”

“실패해도 죽이고, 성공해도 죽이는 거야.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지?”

윤근의 두 볼을 양손으로 움켜쥔 후마디가 비장하게 말했다.

“테무르가 시키는 일을 한 번만 하는 거야. 딱 한 번만! 그럼 아직 이용가치가 있는 네게 약속한 돈을 줄 거야. 그 돈만 받고 도망가야 돼! 절대 더 욕심내거나 입에 발린 칭찬에 현혹되면 안 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칸발룩에서 홀로 탈출한 윤근이 가까스로 개경에 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대지주의 농장이 들어서며 남문 밖 고향 마을은 이미 사라졌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의 행방도 찾을 길이 없었다. 신분을 속인 채 절에서 그림자처럼 숨어 살던 그가 운명의 짝을 만난 건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점쟁이 노파 때문이었다. 삶을 여기서 포기할지, 아니면 조금 더 견뎌볼지 묻자 점쟁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구한 팔자구먼. 그런데 마지막 기회가 하나 더 남아 있어. 빨리 남문 밖 동남 방향으로 십 리만 가보게나. 길이 없어도 무조건 그 방향으로 가야 해. 오늘 밤을 넘기면 안 돼.”

어차피 죽을 목숨인지라 윤근은 장난삼아 점쟁이 말대로 십 리를 내달렸다. 온몸이 가시덤불과 나뭇가지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밤을 맞았다. 점쟁이를 원망하며 떨어져 죽을 벼랑을 찾던 그의 눈에 도깨비불 같은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작은 별장이었다.

시녀 두 명과 별장에 숨어 살던 젊은 처자는 자신을 살아 있는 귀신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윤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출현을 반가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숨어들기 직전, 그러니까 세상에서 숨어 자결하기로 결심하던 즈음에 남문 근처에서 어떤 점쟁이 노파를 만났어요. 이곳에서 기다리면 소녀를 구해 줄 사내가 나타날 거라고 했거든요. 그게 당신인지요?”

대답을 망설이던 윤근이 멀쩡한 숙녀가 왜 이런 곳에 숨어 지내는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저에겐 남모를 질병이 있거든요. 부모님께서도 고치려 어지간히 노력하셨지만 이젠 포기하셨어요. 집안의 수치가 돼버린 거죠.”

“어떤 질병이시오?”

오래 망설이던 그녀가 부끄러운 낯빛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몸이 사라져요. 아니, 몸은 그대로인데 자꾸 보이지 않게 돼요.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들 저를 귀신이라고 불러요.”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윤근이 갑자기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놀라는 상대가 두 눈을 감고 소리를 질렀다. 윤근이 급히 말했다.

“잠깐 날 보시오. 나도 처자와 같소. 몸이 사라지는 병이 있소.”

그제야 가늘게 눈을 뜬 처자가 윤근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윤근이 다시 말했다.

“처자의 병을 고칠 방법이 없진 않소. 이게 다 욕망의 문제요. 우리가 무언가에 욕심을 품게 되면 몸은 절대 사라지지 않소! 세상에 강한 애착만 갖는다면 남들과 같이 살 수도 있소.”

그날 밤 부부의 연을 맺은 남녀는 아주 오랜만에 길고 달콤한 잠에 빠졌다. 그렇게 사흘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처자가 물었다.

“소녀는 개경 부호인 시중 최만의 막내딸 소현이에요. 제 질병을 고쳐주셨으니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부부가 되고자 하오나 그간 어찌 사셨는지는 알고 싶어요.”

윤근은 기구한 어린 시절과 칸발룩에서 보낸 파란만장한 삶을 길게 얘기했다. 눈을 반짝이며 듣던 소현이 촉촉한 음성으로 물었다.

“끝만 좋으면 다 좋은 거지요. 그런데 연모하셨던 후마디라는 색목인 여인은 어찌 됐어요?”

살아남은 자의 슬픈 기억

황궁에 숨어든 윤근은 다루가치가 일러준 대로 흥성궁 침전 구역으로 잠입했다. 그는 자신이 죽일 사람의 신분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암기한 지도를 떠올리며 목표 장소에 닿고자 서두를 뿐이었다. 마침내 당도한 중앙 편전에선 수비대가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윤근은 살의를 억제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방심해 평정심이 흔들리면 몸의 윤곽이 드러나 체포될 정도로 편전 주변은 수많은 횃불이 환히 밝히고 있었다.

수비병이 교대하는 틈을 타 살며시 문을 열고 편전 안에 들어선 윤근은 조금씩 침상을 향해 전진했다. 용무늬가 새겨진 황금빛 침상 주변엔 궁녀 둘이 무릎을 꿇은 채 졸고 있었다. 옥으로 된 화려한 요강과 방향기에 갈아 넣을 박하 향료가 담긴 은제 항아리가 보였다. 숨을 멈춘 그는 다루가치가 살해 도구로 사용하라 일러준 장신구함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귀한 상아로 만든 날카로운 비녀를 발견해 손에 움켜쥔 그가 침상을 둘러친 휘장을 살짝 들어올렸다.

상대 목에 비녀를 내리꽂으려는 찰라, 그는 멈칫대며 주저했다. 그가 상상했던 암살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황제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반복해 마음의 훈련을 거듭했고 감정을 무색무취하게 유지하려 정진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 아래에서 새근대며 잠든 어린 소년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정서의 떨림을 만들어냈다. 그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최적의 기회를 놓치고야 말았다. 마침내 이상한 인기척에 눈을 뜬 소년이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자가 잠을 깨자 시녀들도 덩달아 잠이 깨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편전에서 간신히 몸을 빼낸 윤근은 잠입했던 궁궐 남쪽 연못 태액지를 거쳐 남쪽 문명문에 걸쳐둔 사다리를 타고 황궁 밖으로 탈출했다. 통주로 이어진 운하인 통혜하 위의 배에서 숨겨둔 옷을 꺼내 입은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윤근은 후마디의 생사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황자 시해 시도 자체가 없던 일이 됐으니 어쩌면 테무르가 다음 기회를 줄지도 몰랐다. 숭인문 숙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숙소 앞 후통 거리에 널브러진 시신들과 그 주변을 에워싼 군중을 발견한 순간 그의 작디작은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윤채근 #환상극장 #투명인간 #테무르 #신동아

* 이 작품은 ‘기재기이’의 ‘하생기우전’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1년 11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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