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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리는 글과 말

그림으로 그리는 글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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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리가 선명하게 보이는 벌판에 서 있는 부녀의 모습을 그린 메모, 또 남쪽 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해변의 와상(臥床)에서 사랑을 구하는 모습을 그린 메모를 보고서도 나는 시를 지었다.

‘구름이 가는가/ 앞산이 가는가/ 구름이 연 날개 달고/ 지나가며/ 산머리를 슬쩍 만진다’는 구절의 ‘늦은 사월 봄 풍경’은 골프 라운딩 중 골프장 풍경을 먼저 마음속 거울에 비추어보고 메모지에 그림을 그린 후 지은 시이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원고를 쓸 때나 글을 읽을 때 안경을 쓴다. 그런데 안경을 쓴 채로 강연이나 강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급적 할 말을 외우는 편이다. 주례나 축사, 특별강연도 원고를 보지 않고 하는데 어떤 분들은 이것을 신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연할 때도 시를 지을 때처럼 먼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린다. 강연에도 서두가 있고 본론이 있으며 결말이 있지 않은가. 또한 듣는 사람 입장이 되어 강연의 ‘그림’을 그려본다. 그런 후 강단에 서서 미리 그려놓은 그림을 말로 옮긴다. 흰 도화지에 산과 벌판, 꽃과 나무를 그리는 것으로 강연 내용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그 도화지 위를 거닐어보는 것으로 강연을 끝맺음하는 것이다.

글과 말, 그리고 그림은 모두 자신의 내면적 소양과 지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소양과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그림을 그려보는 것에 익숙해야 하며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로 설계의 단계이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나 미술가라 하더라도 설계의 습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막연히 떠오른 구상은 그저 혼란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소양과 지식을 기르는 방편으로 독서를 권하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책을 많이 읽고 읽은 내용을 정리해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필자는 예전부터 ‘귀록(貴錄)’이란 제목을 단 공책에 읽은 내용을 적어놓는데, 이것이 소위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고 강연을 할 때 매우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수없이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하면서 글을 쓰고 말할 거리를 생각하며 대화하다 보면 가족(family)과 친구(friend), 그리고 신뢰(faith)가 충만한 거짓(lie)이 바로 인생(life)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동아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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