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꼭 20년 뒤, 영화 속 허구는 현실이 됐다. 지난해 3월 서아프리카를 시작으로 발병한 에볼라병(Ebola Virus Disease, 이하 에볼라)이 아프리카 지역을 벗어나 미국, 스페인 등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4월 13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이후 총 2만5626명의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는 1만0619명이다. 대부분의 감염·사망자는 서아프리카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에서 집중 발생했다. 시에라리온에서만 1만2188명이 감염돼 3854명이 숨졌다.
지난해 9월 유엔은 ‘에볼라 특별고위급 회의’를 열고 세계 각국에 의료진 파견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12월부터 3개월에 걸쳐 민간과 군 의료진 24명을 순차적으로 시에라리온에 파견했다. 한국 구호대를 이끈 인물은 신형식(51)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병센터장(의학박사). 신 센터장은 의료팀장을 맡아 구호대를 이끌고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시에라리온 사람들의 두 손을 꼭 잡아줬다. 5월 4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신 센터장을 만났다.
에볼라 환자 첫 대면 순간
▼ 치명적 질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가겠다고 자원한 이유는.
“정부 차원의 일인 데다 우리 병원(국립중앙의료원)이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에요. 제가 이곳 감염병센터장을 맡고 있어 일종의 책임감이 작용한 것 같아요. 의사로서 갖는 사명감이죠.”
▼ 주변의 반대로 지원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에볼라 공포가 확산되던 때라, 그런 병을 진료하러 간다는데 걱정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제가 우리나라에서 신종 감염병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진료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아내도 이해해줬어요. 파견 의료진 모집 공고가 나기 전에 자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에볼라가 의사라고 피해가진 않을 텐데….
“지난해 10월 말 의료진 선발 공고가 날 때, 이미 많은 해외 의료진이 현지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벌이다 감염돼 사망한 상황이어서 심적 부담이 컸던 건 사실입니다. 더욱이 저는 1진 팀장으로 파견될 상황이어서 팀원 안전에 더 큰 부담감을 느꼈어요.”
그가 팀원들의 안전 귀국 못지않게 두려움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시에라리온의 에볼라 치료센터(이탈리아 비정부기구가 운영하는 ‘가더리치 에볼라치료센터’)에 도착 후 처음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보호복과 보호장구를 갖추고 통제구역인 2층 병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때다.
“2층에 올라가면 환자들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막 뛰었어요. 그런데 막상 환자를 보니 지금까지 숱하게 봐온 여느 환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 에볼라 환자를 직접 본 건 처음이었나요.
“그전에 우리 병원에 감염 의심 환자가 내원했어요. 시에라리온에서 입국한 두 살 남자아이와 기니에서 귀국한 한국인 한 명이 진료를 받았죠. 기니에서 온 사람은 병원에 왔을 때 열이 있었는데, 두 사람 다 ‘음성’ 확진을 받았어요.”
▼ 임상치료 경험 없이 진료에 나선 거네요.
“평소 병원에서 보호복 탈착용 연습 등 준비는 많이 했어요. 언제라도 감염 환자가 오면 진료해야 하니까요. 시에라리온 출국 전에는 국군간호사관학교에서 사흘 동안 교육을 받았어요. 미국의 에볼라 파견 의료진 교육 프로그램을 참고한 거죠. 지난해 12월 13일 출국해 영국에서도 일주일 교육을 받았고, 현지 치료센터에서도 나흘간 적응 훈련을 받았습니다.”
▼ 의사가 주사 놓는 법과 채혈하는 법까지….
“환자를 보려면 보호복과 보호장구를 완벽하게 갖추고, 장갑도 두 장씩 껴야 하니까 평소 진료와는 다르죠. 처음 경험하는 진료 상황에서 모든 의료행위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보호장구 때문에 무력감
▼ 실제 진료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보호장구 때문에 진료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환자 한 명이 사망했어요. 입원 하루 만에 상태가 호전되는가 싶어 한숨 돌렸는데, 이튿날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결국 사망했어요.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요. 보호복에다 안면보호구, 마스크(때로는 전동식 호흡장치)까지 낀 상태라 청진기를 사용할 수 없고, 두 겹의 장갑을 끼고 있으니 제대로 촉진(觸診) 하기도 어려워요. 그러다보니 ‘이 증상은 아마 이런 요인 때문일 거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처치한 거죠. 치료에 앞서 환자에 대한 정확한 신체검사 등 여러 임상 정보를 통해 진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던 겁니다.”
▼ 환자 상태는 어땠습니까.
“한 달여 진료하면서 우리 의료진이 본 환자가 57명인데, 그중 신규 환자가 43명이었습니다. 상태가 비교적 좋은 환자는 열만 나고 특별한 증상 없이 잘 먹고 건강한 편이었어요. 중환자는 거의 쇼크 상태가 돼 2~3일 뒤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57명 중 22명이 사망했어요.”
▼ 불안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의사도 사람인데 당연하죠. 감염되면 죽고 사는 확률이 반반씩이니 불안할 수밖에요. 그래도 현지에서 의료진이 감염되면 미국이나 유럽 국가로 후송해 치료한다는 정부 지침이 마련돼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어요.”
▼ 짧은 기간에 20명이 넘는 사망자를 봤으니 충격적이었겠네요.
“에볼라 치사율이 워낙 높다는 걸 아니까 생각보다 충격은 덜했어요. 대신 ‘의사도 못 고치는 병이 있다’는 걸 또 한 번 절감했죠. 치사율이 높은 질병임에도 보호복과 보호장구 때문에 환자들에게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컸습니다.”
한순간 벌어진 ‘사고’
의료진의 감염 방지를 위한 장비는 여러모로 불편함과 어려움을 안겼다. 신 센터장 일행이 현지에 머물 때 시에라리온은 건기(乾期)여서 낮에는 기온이 31~32℃까지 치솟고, 밤에도 25℃를 웃돌아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그는 “보호복과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진료를 하다보면 마스크 때문에 숨 쉬기도 힘들고, 옷은 공기가 통하지 않아 10분만 지나도 땀이 줄줄 흘렀다. 보호복을 벗으려면 진료 구역을 벗어나야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고 했다. 진료 환경은 열악했지만 현지 의료진이 부족하다보니 그의 팀은 한 달 넘는 의료지원활동 내내 쉬는 날 없이 12시간 교대근무를 해야 했다.
‘언제든 우리도 감염될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 1진 의료진 중 한 명이 진료 중 돌발상황으로 감염 의심 환자가 돼 독일로 긴급 후송된 것이다.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환자에게 안정제를 투여하거든요. 우리 의료진이 안정제 주사를 놓으려는 순간 환자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주삿바늘이 의사의 장갑을 뚫고 들어간 거죠. 잠들어 있던 환자가 주삿바늘 때문에 깨어난 거 같아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죠.”
▼ 잠복기(21일)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겠군요.
“걱정 많이 했죠. 우리 팀원이 계속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연락을 취하면서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검사 결과(음성)는 독일 현지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는데, 그제야 안도했죠.”
병실에서 환자보호복과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진료하면서 환자와 얘기를 나눈다.
비행기 가득 채운 동료의식
▼ 돌발 상황에 대비한 훈련도 했을 텐데요.
“에볼라 진료의 첫째 수칙이 ‘의료진 안전’입니다. 매일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숙지하고 마음속으로 수차 시뮬레이션을 한 뒤 진료에 임하죠. 우리 팀원에게 가장 강조한 것도 그 부분이에요. 그럼에도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한 거죠.”
▼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했습니까.
“대증요법과 함께 당시 전 세계에서 시도되고 있던 최신 치료법 등을 활용했습니다. 에볼라에 감염되면 초기엔 열이 나고 토하는데, 심해지면 출혈을 일으키고 쇼크에 빠져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열이 나면 해열제를 투여하고 구토억제제를 쓰고, 수액을 정맥주사하고 출혈이 심하면 수혈하는 식이죠.”
▼ 시에라리온에 발을 디뎠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시에라리온에 갈 때 150석 규모의 비행기를 탔는데 거의 모든 승객이 세계 각국에서 온 의료진이었어요. ‘사명감을 안고 에볼라 환자를 치료하러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에 깊은 동료의식을 느꼈습니다. 그 광경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걸어서 7~8분 거리인 숙소와 치료센터를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면서 24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달을 보내고 국내 의료진 10명은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다. 공항에서 그들을 기다린 건 ‘격리시설’로 데려갈 버스였다. 바이러스 잠복기를 거쳐 ‘음성’ 판정이 날 때까지 일반인과 접촉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
▼ 입국해서 곧바로 가족을 못 만났죠?
“가족이 공항에 마중 나왔는데, 못 보고 나중에 격리시설에서 만났어요. 공항에서 1차 몸 상태를 검사받고 격리시설로 이동해 정부 관계자들과 미팅을 한 다음, 또다시 검사를 받았어요. 특별한 이상 증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간단한 환영 행사를 했어요. 그 후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돌아와서 병이 난 사람은 없었나요.
“격리시설에 있는 동안 한 분은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고생했고, 한 분은 설사하고 배가 아파서 고생한 것 외에 특별히 아픈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도 건강한 편이었고요. 다만 평소 잘 줄지 않던 몸무게가 5㎏ 빠져 있었습니다.”
▼ 긴급구호대 파견 경험이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에볼라가 유행한 나라들 자체 힘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여러 나라가 에볼라 종식을 위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노력에 동참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죠. 덕분에 국가 이미지도 좋아졌고요. 의료진이 실제로 진료를 해봄으로써 감염관리와 치료 등 의학적 측면에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것도 큰 소득입니다. 에볼라 치료센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볼 수 있었던 점도 의미가 있죠. 개인적으로는 감염병센터 의사로서 국가가 하는 일에 자원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신종 감염병은 실시간으로 옮겨 다닌다. 신 센터장은 신종 감염병에 대해 철저한 대비와 국가적 차원의 ‘고도격리시설’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도격리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감염병 환자와 의료진의 출입 통로가 구분된 입원 시설을 갖추는 거예요. 환자가 안전하게 격리돼 치료받을 수 있는 넓은 병실, 의료진이 보호복과 보호장구를 탈·착용하기 편리한 공간, 환자에게서 나온 의료폐기물을 완전 멸균할 수 있는 시설, 환자 진단을 위한 검사 시설 등을 다 갖춘 시설이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