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구, 손학규, 이병헌처럼 입어라
- 좋은 슈트 안 입어 승진 못한다
- 슈트는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커스터마이징’
- 슈트는 고르지 않는다, 다만 맞출 뿐
처음 양복점을 열었을 때는 맞춤 슈트 호황기였다. 매달 150벌 이상 제작했다. 몇 년 전에는 대기업이 만드는 기성복이 인기를 끌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남성 복식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기술과 디자인이 진화하면서 다시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정·관계 명사는 물론 결혼을 앞둔 남성과 그 가족, 슈트의 가치를 잘 아는 외국인 등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사무실 밀집지역이다. 매장이 있는 건물만 해도 삼일회계법인, 존슨앤드존슨, LS네트웍스 등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이 여럿 입주해 있다. 그렇다보니 회사원들, 특히 영업사원이나 변호사, 기업 임원 등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장인들을 자주 접한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들의 옷차림을 오랫동안 눈여겨보다보니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옷차림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양주보다 맞춤 슈트’
이완구 전 총리는 신체적 단점을 맞춤 슈트로 보완한다.
왜 한국 성인 남성들은 술값은 아끼지 않으면서 옷값은 아낄까 하는 것이 나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술로 스트레스를 좀 풀어보겠다는 샐러리맨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슈트 원단을 집을 때 덜덜 떨리는 손이 술 뚜껑을 열 때는 거침없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 못 하겠다.
옷에 신경 쓰는 남자는 상대적으로 술을 적게 먹는다. 일단 옷에 돈을 들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술에 돈을 덜 쓰게 된다. 먹더라도 적게 먹고 쓰더라도 적게 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술고래로 통하는 직장인치고 옷 잘 입는 사람이 있는지. 반면 옷 잘 입는 사람치고 술고래는 드물다.
옷은 못 입는데 술만 잘 먹는 직장인과 옷도 잘 입고 술도 적게 먹는 직장인 중 과연 누가 직장에서 인정받고 승진할 것이며, 이성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중에 ‘자살보다 SEX’가 있다. 나는 이에 빗대 ‘양주보다 맞춤 슈트’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최근 MBC ‘무한도전’에서 여섯 번째 멤버를 선발하겠다며 ‘식스맨’ 코너를 방송했다. 멤버들이 후보에 오른 이들을 직접 면접하는데, 모두 슈트를 입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엔 슈트가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입은 슈트를 보면서 너무 딱 달라붙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장신에 덩치도 큰 정준하 씨의 슈트는 정말 위태로워 보였다. 의자에 앉았다가 바지가 뜯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무한도전’ 멤버면 정상급 연예인인데 왜 저렇게 입었을까 싶다. 코디가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주얼과 슈트가 어떻게 차이나는지 잘 모를 그녀들이 캐주얼 의류를 입히듯 정장을 입힌 듯했다.
임원 되려면 임원처럼 입어야
제대로 된 슈트는 좋은 이미지를 만든다. 영화 ‘킹스맨’에 나온 남자 배우 콜린 퍼스는 입고 있는 슈트만으로 영국 신사의 품격을 보여준다.
몇달 전 이완구 전 국무총리 후보자청문회를 봤다. 다들 그의 전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그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작은 키에 두터운 몸집, 큰 머리, 굵고 짧은 목은 분명 그의 핸디캡이다. 하지만 이른바 ‘딱 떨어지는 맞춤 슈트’와 그에 걸맞은 넥타이로 신체의 단점은 가리고 장점은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영국 유학파 출신답게 신사의 풍모를 적절히 드러내는 슈트로 자신의 이미지를 잘 부각한 정치인이다. 배우 이병헌 씨는 사실 키가 작은 편인 데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인상이 날카로운 등 신체 조건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슈트로 단점은 확실히 가리고 장점은 확실히 살리는 재능을 지녔다. 배우 김용건 씨도 종종 과도한 화려함이 거슬릴 때도 있지만 슈트가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한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나란히 걸어가면 복장에서부터 차이가 나서 언뜻 봐도 누가 의원이고 누가 보좌관인지 알 수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이사 등 임원과 만년과장의 옷차림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공한 이들은 자신의 복장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니 좋은 옷을 입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냐 할 수도 있다. 나도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면, 더 많은 연봉을 받으면 옷에 더 신경을 쓸 수 있다고. 틀렸다. 내 경험으로 보면 주니어 직장인 시절부터 복장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이들이 사회에서 잘나갈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오랜 기간 몸에 맞는 맞춤 슈트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이들이 승진 한번 했다고, 연봉이 좀 올랐다고 맞춤 슈트를 선택하는 일은 아직 흔치 않다. 주니어 직장인 시절 인터넷에서 20만~30만 원짜리 기성복을 사 입다가 아웃렛 매장 등에서 30만~40만 원짜리 기성복을 사는 정도가 대부분인 듯하다. 하지만 40대 중반에 여전히 몸에 안 맞는 슈트를 싼값에 사 입는 이들치고 임원이 되는 예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사람의 ‘아우라’라는 것은 절대 단기간에 형성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승진을 못해 좋은 슈트를 안 입는 게 아니라, 좋은 슈트를 안 입으니 승진을 못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첫인상이 80%를 차지한다. 그 첫인상의 절반 이상은 옷차림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영업사원이 새 거래처를 뚫기 위해 나섰다. 길을 걷던 중 흙탕물이 튀어 구두가 더러워졌다. 점심시간이라 배도 고팠다. 수중에 있는 돈은 3000원. 한 명은 그 돈으로 라면을 사 먹었고, 다른 한 명은 그 돈으로 구두를 깨끗이 닦았다. 당신이 거래처 사장이라면 구두까지 말끔한 차림으로 들어서는 영업사원과 흙탕물 범벅이 된 구두를 신고 들어오는 영업사원 중 누구에게 더 호감과 신뢰를 갖겠는가.
불편한 진실
‘맞춤 슈트는 촌스럽다’ ‘맞춤 슈트는 비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한편으로 맞는 말이고, 한편으로 틀린 말이다. 과거 맞춤 슈트 호황기에 제대로 기술을 못 배운 사람들이 돈이 된다니까 너도나도 동네 양복점을 열었다. 새로운 기술과 패턴으로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처음 배운 것만을 고집하다보니 촌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술력이 떨어지는 그런 재단사들은 이제 웬만큼 도태됐다.
요즘에도 일부 가격 거품이 있는 매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원단값에 적절한 재단비를 받는다. 저가 40만 원, 중가 80만 원, 고가 200만 원대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싶다. 가격 거품과 고급화는 다른 개념이다. 에르메네질도 제냐, 로로피아나 등 이탈리아 최고급 원단은 입어보면 그 가치를 안다. 또한 제대로 된 맞춤 슈트와 기성복을 비교해 입어보면 오랫동안 기술을 연마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인터넷 쇼핑몰이나 홈쇼핑에서 10만 원대 슈트를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홈쇼핑 업체에 지급하는 마진을 고려하면 한 벌에 10만 원도 안 받고 제품을 공급한다는 의미다. 도대체 어떤 원단을 쓰고 어떻게 바느질을 하기에 저런 가격이 가능할까 싶다. 묵은 원단, 조잡한 바느질, 외부 하청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가격 파괴를 표방하는 몇몇 프랜차이즈 맞춤 슈트집도 마찬가지다. 어떤 업체는 소셜커머스 업체와 손잡고 25만 원짜리 맞춤 슈트를 내놓았다. 35만 원짜리 맞춤 슈트를 구매하면 맞춤 드레스셔츠와 넥타이를 선물하는 업체도 있다. 가산디지털단지의 아웃렛에서 유명 기성복 업체들의 슈트 한 벌 가격이 통상 35만~50만 원인 점을 고려하면 이런 맞춤 슈트 업체의 가격은 뭔가 석연치 않다. 기성복보다 싼 맞춤 슈트라니?
포털사이트의 유명 여성 전문 커뮤니티에선 ‘맞춤 슈트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성토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도 “프랜차이즈 슈트집에서 옷을 맞췄는데 도저히 못 입겠다”며 찾아온 고객을 여럿 만났다. 원가를 무리하게 낮추다보니 조악한 원단을 쓰고, 직접 재단하지 않고 기성복 만들 듯 하청업체에 맡기고, 맞춤에 걸맞은 고급 바느질을 하지 않고 대충대충 만든 결과다.
이런 슈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재로 값싼 걸 쓰기 마련이다. 가령 양복은 원단과 안감 사이에 심지를 넣는다. 심지를 안 넣고 접착제로 붙이거나 싸구려 심지를 사용한 양복은 몇 번 클리닝을 하고 하면 옷 모양이 틀어져 입을 때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그 차이는 제대로 된 옷을 입어봐야 알 수 있다.
얼마 전 웨딩플래너의 꾐에 넘어가 엉터리 예복을 샀다는 남성 손님을 만났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옷의 하나가 결혼예복일 터인데, 결혼 준비에 바쁜 나머지 함량 미달 업체를 찾은 것 같다. 맞춤 슈트는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오랜 기간 기술이 숙성돼야 가능하다. 이탈리아와 영국의 슈트 장인들이 대개 지긋한 나이인 건 그 때문이다.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옷감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옷값은 옷을 만드는 데 써야 한다’는 한 업체의 광고가 생각난다. 맞춤 슈트는 아무리 싸도 수십만 원대다. 당연히 고객들은 그에 걸맞은 고품질의 제품을 원한다. 그런데 슈트 제작에 들어가야 할 돈의 상당수가 소셜커머스 업체의 마진, 포털사이트의 키워드 광고비 등으로 나간다는 불편한 진실을 아는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요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유행이다. 소비자의 기호, 취향,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희귀하면서도 특색 있는 제품에 대한 수요는 늘고 있다. 가전업체는 다양한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멀티 가전제품을 내놓았고, 의류업계는 소비자가 원하는 모양이나 문구를 넣어준다. 현대자동차는 튜닝제품을 판매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다.
남자는 철학을 입는다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시대이니 당연한 변화상이다. 소비자는 자신의 소비 행태가 남보다 우월함을 끊임없이 입증하고 싶어 한다. 어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고 있는지 SNS를 통해 드러내고 전파한다. 우월함은 희소성과 높은 가치(가격)를 전제로 한다. 명품 열풍은 우월하고 싶은 현대 소비자의 인정 투쟁을 웅변한다.
문제는 가능성과 비용이다. 아무리 나만의 자동차를 원한다 한들 엔진과 외관을 마음대로 세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아무리 멀티 가전제품이라 할지라도 원하는 모든 옵션을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커스터마이징을 가장 확실하고 저렴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게 바로 맞춤 슈트다. 슈트를 맞추는 과정에서 남성은 소비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원단의 색상과 디자인을 고르고 라펠(깃) 두께와 바짓단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이외에도 버튼, 주름, 뒤트임 등에서도 자기 의견을 가져야 한다. 원단 제조업체에서 해마다 출시하는 원단이 수백 종에 달한다. 맞춤 슈트야말로 자동차 옵션 선택이나 튜닝 작업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연코 커스터마이징 체험의 정점에 서 있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자기 체형에 대해 정확히 알 수밖에 없다. 키가 작은 사람은 스트라이프를 입으면 커 보이고, 얼굴이 큰 사람은 라펠을 크게 만들면 균형 있게 보인다는 기초 지식을 쌓게 된다. 성인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면 살이 붙는데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정할 수 있는지도 슈트로 해결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남성은 슈트를 통해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사람으로 비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화려한 패셔니스타로 기억될지, 중후한 신사로 보일지,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맨으로 비칠지. ‘남자는 철학을 입는다’는 유명한 말은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런 면에서 우리의 현실은 아직 아쉬운 대목이 많다. 여전히 수많은 남성이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복들을 약간 재단해서 입고 다닌다. 자기 체형에 대한 이해나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이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컨베이어벨트에서 대량 생산된 공산품을 마구 걸치고 다닌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프로크루테스는 침대 크기에 따라 큰 사람은 자르고 작은 사람은 늘이는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규격화한 공산품 슈트에 자신의 몸을 억지로 끼워 넣는 이들은 과연 자신의 스타일이 죽어가는 걸 알고 있을까.
기성복은 표준체형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 자신과는 어딘가 안 맞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체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등이 굽은 정도도 다르고, 허리 사이즈가 같더라도 엉덩이 크기가 다르다. 그렇다보니 기성복을 사서 수선해 입는 사람도 있다. 완성된 옷을 수선하면 옷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입으면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맞춤 슈트 체인점 중에서도 각 개인의 체형과 취향에 맞춰 재단사(테일러)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소위 비스포크(bespoke) 제품을 파는 것처럼 광고를 해놓고 실제로는 반맞춤 슈트를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 만들어진 몇 가지 패턴을 수정해 만든 슈트가 비스포크 제품으로 포장돼선 안 된다.
이참에 팁을 하나 주겠다. 제대로 된 비스포크 집인지 아닌지는 테일러가 치수만 재는 게 아니라 직접 패턴(본 뜨기) 작업을 하는지, 자신이 선택한 원단으로 직접 재단하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테일러가 직접 재단하지 않는다면 그 가게는 단지 ‘영업창구’일 뿐이다. 당신이 만난 사람은 테일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맞춤 슈트는 오직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 몸을 재고 패턴을 만들고 재단을 하고 봉제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분위기, 취향과 개성을 최대로 살린 예술품에 가까운 옷이 만들어진다.
나는 슈트를 맞추는 과정을 ‘남성이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을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슈트를 만들어 입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보상과 자기 계발을 위한 최적의 아이템은 바로 맞춤 정장이 아닐까. 지금도 기성복 매장을 기웃거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슈트는 고르지 않는다, 다만 맞출 뿐.”
제대로 된 슈트는 좋은 이미지를 만든다. 슈트로 영국 신사의 품격을 잘 드러낸 배우 콜린 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