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랭킹 69위 도약…윔블던 출전권 확보
- “메이저 대회 본선 1승이 올 시즌 목표”
- “어릴 적 우상과 같이 테니스 치는 게 신기해요”
- 조코비치가 롤모델…“서브 보완해야”
“현이, 귀국하자마자 정신 하나도 없겠네. 그래도 인터뷰할 때가 행복한 거야.”
이형택의 말에 수줍은 듯 미소 짓는 정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4월 28일 미국에서 귀국해 시차 적응할 여유도 없이 곧장 부산 국제대회에 출전하게 됐으니 힘들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기분 좋은 피곤함”이라고 했다.
967위→69위 수직 상승
정현은 4월 27일 열린 남자 프로테니스(ATP) 투어 세인트 조지프 캔들러 서배너 챌린저 대회 결승에서 아일랜드의 제임스 맥기를 꺾고 챌린저 무대 세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서배너 챌린저 대회 우승으로 세계 랭킹을 19계단 끌어올리며 88위를 기록했다. 이형택에 이어 한국 남자선수로는 두 번째로 세계 100위권 내에 진입한 것.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정현은 ATP 랭킹 88위였다.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것만 해도 ‘한국 테니스계의 최고 경사’로 꼽혔고, 모든 방송과 언론에서 정현의 랭킹 ‘88’이란 숫자에 주목했다. 그런데 정현은 5월 10일 끝난 ATP 부산오픈 챌린저(총상금 10만 달러)에서 또다시 우승을 거머쥐며 랭킹 포인트 110점을 챙겼다. 랭킹 포인트 690점이 된 그는 순위도 88위에서 69위로 껑충 뛰었다. 한국 선수의 역대 최고 랭킹은 이형택이 기록한 36위다. 정현은 한국 테니스의 ‘샛별’ ‘미래’에서 어느새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먼저 남자 프로테니스의 등급에 대해 알아보자. 프로는 등급 순으로 그랜드슬램, ATP투어 1000시리즈, 500시리즈, 250시리즈, 챌린저, 퓨처스로 구분된다. 챌린저와 퓨처스는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한 등용문 격이다. 챌린저는 주로 랭킹 100~300위권 선수가 출전한다. 정현은 챌린저 대회에서만 통산 네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따른다, 먼저 테니스 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 본선에 자동 출전할 수 있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데뷔하는 프로 선수들의 1차 목표는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것이다. 그래야 챌린저, 퓨처스가 아닌 투어대회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0월 29일 967위에서 시작한 정현은 911일 만에 랭킹 100위 안에 들어섰다. 3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패배를 견뎌내며 포인트를 쌓아갔다고 말한다.
“매주 경기에 출전했고, 매번 패하면서 배워나갔다. 정체됐던 테니스 실력이, 지는 횟수에 비례해 조금씩 성장했다. 어차피 우승은 잘해야 1년에 한두 번뿐이다. 8강에서 지든, 4강에서 지든, 우승을 못했으면 패한 것이다. 그런 패배의 쓰라림, 대회 경험, 그리고 랭킹이 높은 선수들과의 대결을 통해 나의 테니스도 단단해져갔다. 패배가 쌓이다보니 우승이 나왔다. 그래서 난 마음이 편하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으로 질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질 기회가 많다는 건, 언젠가 우승할 기회도 생긴다는 걸 의미한다.”
100위 진입은 ‘고시 패스’
정현은 4월 27일 서배너 챌린저 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6주가량 미국을 돌며 챌린저 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단 한 번도 랭킹 100위 내 진입에 대해 욕심도,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100위 벽을 허문 이형택(왼쪽)과 5월 15일 현재 69위까지 오른 정현.
한국 테니스에서 정현의 세계 무대 도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원홍 대한테니스협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ATP 랭킹 100위권 진입은 남자테니스에서 일종의 ‘고시 패스’와 같은 의미”라며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인증서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제 막 ‘고시’를 패스한 정현은 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정현은 그동안 출전한 수많은 대회 중 영원히 잊지 못할 대회로 3가지를 꼽았다. 먼저 ‘테니스 선수 정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단식 준우승. 정현은 윔블던 주니어 16강전에서 당시 주니어 세계 랭킹 1위 닉 키르기오스(호주)를 2-0으로 물리치며 파란을 일으켰고, 8강전에선 보르나 코리치(당시 주니어 6위, 크로아티아)를 2-0, 4강전에서 막시밀리안 마르테레르(당시 주니어 30위, 독일)를 2-1로 제압했지만 결승에서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키르기오스와 코리치는 현재 각각 세계 랭킹 34위, 55위에 올라 있다).
“상대 선수들이 다 나보다 랭킹이 높은 데다 우승 후보들이라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나선 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당시엔 그들이 나보다 더 부담을 느꼈다. 경기를 하다보면 심리전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하는데, 그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비우긴 했지만, 솔직히 엄청 긴장됐다. 워낙 대단한 선수들이라 그들과 경기하는 자체가 기뻤다.”
윔블던 주니어 단식 준우승은 정현에게 단단한 자신감을 선물했다. 그후 국제대회에 출전해 자신보다 랭킹이 높은 선수를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게 꿈이지? 꿈일 거야
2014년 9월 29일은 정현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 날이다.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 복식에서 28년 만에 금메달이 나온 역사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단식 전문인 5년 선배 임용규와 짝을 맞춘 정현은 숱한 악조건을 극복하며 결승에서 만난 인도의 사남 싱, 사케스 미네니 조를 세트 스코어 2대 0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테니스가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때 김봉수-유진선의 금메달이 마지막이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노골드’ 수모를 겪은 한국 테니스는 인천 대회에서도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할 위기에 몰렸지만 임용규와 정현의 활약 덕분에 그야말로 금쪽같은 금메달을 차지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전까지만 해도 정현은 윔블던 주니어 단식 준우승 이후 몇 차례 더 우승을 차지했지만 큰 대회에선 이렇다 할 성적을 기록하지 못해 아쉬움을 곱씹고 있었다. 세계 랭킹을 끌어올리려면 규모가 큰 국제대회 성적이 중요한데, 아시아경기대회 우승으로 금메달과 함께 병역 문제까지 해결하는 ‘선물’을 받았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정말 힘든 훈련을 소화했다. 트랙도 많이 뛰고, 공도 많이 치고…한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의 한을 풀고 싶어 더 훈련에 매달렸다. 그런데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에도 믿기지 않았다. ‘이게 꿈이지? 꿈일 거야’라는 생각이 무한 반복됐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내 생애 잊지 못할 경기 중 하나다.”
세계 9위와 대등한 경기
정현은 3월 23일부터 4월 5일까지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마이애미오픈에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출전했다. 마이애미오픈은 세계 테니스 대회 중 그랜드슬램에 이어 등급이 가장 높은 ATP투어 1000시리즈로 세계적인 스포츠마케팅 기업 IMG가 주관·진행하는 대회. 지난해 남녀 우승자는 노박 조코비치(세계 1위, 세르비아)와 세레나 윌리엄스(세계 1위, 미국).
정현은 3월 25일 마이애미오픈 1회전에서 세계 랭킹 50위 마르셀 그라노예르스를 무너뜨렸다.
2차전 상대는 ATP 투어 단식에서 5차례 우승을 거둔 토마시 베르디흐(9위, 체코)였다. 정현이 수세에 몰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현은 베르디흐를 만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비록 그 경기에서 패했지만, TV로만 봐온 선수와 같은 코트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릿했다. 대회 분위기가 챌린저 때와는 사뭇 달랐다.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대회 관계자들이 세심하게 배려했다. 수많은 관중이 베르디히보다 나를 더 응원했다. 나이도, 랭킹도 비교가 안 되는 동양 선수라 조금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포기하지 말고 최대한 붙어보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졌지만 많은 걸 배운 대회였다. 베르디흐는 테니스도 잘 쳤지만 매너도 아주 훌륭한 선수였다. 테니스만 잘 친다고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게 아니더라. 내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그 대회를 통해 깨달은 바가 아주 많다.”
정현의 가족은 어머니 김영미 씨(물리치료사) 외엔 모두가 테니스에 몸담고 있다. 아버지 정석진 씨는 삼일공고 테니스부 감독, 정현보다 세 살 위인 형 정홍은 건국대(4학년) 테니스 선수로 활약 중이다. 3부자가 테니스 유전자로 똘똘 뭉쳐 있는 셈.
“아버지는 내게 ‘산’과 같은 존재다. 아버지가 테니스 선수 생활을 하셨고, 그 덕분에 형이 자연스럽게 테니스 라켓을 잡았다. 나는 형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얼떨결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게임기나 만화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형과 테니스를 쳤다. 그렇다고 테니스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테니스 치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지 못했을 뿐이다. 취미로 라켓을 잡다가 어느 순간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로 변모했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기는 기쁨을 맛봤다. 그다음엔 선수 정현이 돼 있었다. 테니스의 시작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중간에 슬럼프를 겪거나 도망치거나 힘들다고 포기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美 테니스아카데미 유학
아버지 정석진 감독은 두 아들 중 하나는 테니스 대신 공부를 선택하길 바랐다고 한다. 정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큰아들이 운동을 하니까 둘째는 공부하길 바랐다. 하지만 현이는 테니스를 정말 좋아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기 때문에 하기 싫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좋다고 얘기했지만, 현이 입에선 ‘테니스가 재미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릴 때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니까 그런 마음에서 테니스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결국엔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정홍과 정현 형제는 어릴 때부터 주니어 무대를 평정하다시피 했다. 2008년 12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제47회 오렌지볼 테니스대회 남자 12세부 결승전에서 13세의 정현은 톱시드의 실라스 세르케이라(브라질)를 2-0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로는 10년 만에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08년 세계 주니어 12세 대회 에디허 인터내셔널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단식 우승과 복식 준우승을 차지했고, 프린스컵 단식 준우승에 이어 오렌지볼 우승까지 아시아 선수 최초로 3주간 연속 3개 대회 결승전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정홍은 국제테니스연맹(ITF) 주니어대회 단식 2회, 복식 1회 우승 경력과 2009년 3월 종별선수권대회에서 고교 1학년생으론 최초로 단·복식을 석권했다.
두 형제는 2009년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한 IMG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테니스 유학길에 올랐다.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 들어가 3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다음은 정 감독의 회고.
“당시 우리 형편에 두 아들을 모두 미국 유학 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IMG의 도움도 받았지만, 아이들한테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지인들의 도움도 받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테니스를 치며 영어를 습득하길 바라는 마음에 무리해서 유학을 보냈다. 그땐 진짜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것 같다. 테니스를 대하는 시각도 달라졌고,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정현은 “밸런스를 교정해 안정된 서브를 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감독을 맡은 삼일공고에 진학했다. 주위에선 아버지가 감독이라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난 딱히 불편할 일이 없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버지는 나를 포함해 다른 선수들한테도 사사로운 간섭과 지적보다는 믿고 맡겨주시는 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보단 오히려 마음 편히 테니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홍·정현 형제는 3년 터울이라 국내 대회에선 부딪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국제대회에선 3차례 맞붙었다고 한다. 결과는 정현이 형한테 2승1패로 앞서 있다. 아버지 처지에선 형제 대결이 영 불편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본 정홍, 정현
“형제가 맞붙다보니 미디어의 관심이 들끓었다. 부모로서 형제의 대결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경기 결과보다 대회를 준비하는 두 아들을 지켜보며 부상 없이 서로 최선을 다하길 바라면서도 결과에 따라 희로애락이 갈리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당시 홍이도 국가대표선수였고, 현이는 차세대 주자로 불리며 이슈 메이커로 떠올랐기에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컸다. 나로선 그런 분위기가 한편으론 기쁨이고, 다른 한편으론 상처가 된다고 봤다. 그래서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애들 얘기 크게 다루지 말아달라’고 따로 부탁했을 정도다.”
정현은 형과의 맞대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대회에서 맞붙으면 친형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형도 상대 선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더 냉정하고 침착하게 시합을 펼친다. 승부는 치열하게 벌이고, 경기가 끝나면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플레이에 대해 얘기해준다. 그때는 형, 동생이 아닌 상대 선수로서 서로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정 감독은 정홍이 테니스 기량이나 센스가 뛰어난 편이라면, 정현은 체격이 크고 ‘멘털’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정현의 세계 랭킹이 형보다 앞서 있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이고, 두 아들이 걸어야 할 길이 멀고 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현이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 있다. 주위의 관심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라는 거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진다고, 인기를 얻는다고 그게 네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시킨다. 시합 때는 멘털이 강해 보이는데, 코트 밖에서는 아이 같은 순진함이 있다. 지나간 시합은 마음에 담지 말고, 다가오는 시합을 준비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어려움, 위기, 슬럼프 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계 무대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얘기도 강조한다.”
아들에게 그저 평범한 아버지이고 싶지만, 테니스와 관련해서는 감독이 될 수밖에 없는 그의 부성애가 느껴지는 말이다.
정현·홍성찬·이덕희 트로이카
한국 테니스는 정현을 비롯해 홍성찬, 이덕희 등 유망주들의 활약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홍성찬(18·횡성고, 주니어 세계 랭킹 3위)은 1월 31일 호주오픈 테니스 주니어 남자 단식 결승에서 러시아의 로만 사피울린에게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국 선수가 그랜드슬램 주니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은 1994년 윔블던 전미라, 1995년 호주오픈 이종민, 2005년 호주오픈 김선용, 2013년 윔블던 정현에 이어 이번이 다섯 번째다. 홍성찬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09년, 106경기 무패 행진과 국내 15개 대회 연속 우승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올리며 급성장했다.
청각장애 3급인 ‘테니스 신동’ 이덕희(17·마포고)는 4월 19일 ITF 인도네시아 PGN 퓨처스 대회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왈리코타 테갈오픈에 이어 퓨처스 대회 2연속 패권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통산 4번째 퓨처스 대회 우승. 스페인 최대 스포츠 전문지인 ‘마르카’가 이덕희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며 관심을 나타냈고, 세계적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은 자신의 트위터에 ‘장애를 이겨낸 이덕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늘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는 글을 올렸다.
비슷한 또래의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 상황이 성장 과정에 있는 정현에게 커다란 자극과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프로에 먼저 진출한 정현이 세계 랭킹 69위에 오르며 두 선수보다 앞서나가고 있고, 홍성찬·이덕희가 정현을 보며 따라가는 모양새이지만, 세 선수가 앞으로 국제 무대에서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현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 다 잘됐으면 좋겠다. 그동안 한국 테니스는 주니어에서 잘하던 선수가 프로 진출 후 실패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주니어뿐만 아니라 프로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테니스가 더 이상 비인기 종목에 머물지 않고 야구나 축구처럼 인기 종목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거둬야 한다. 메이저 대회 본선 1승이 올 시즌 내 목표다.”
정현은 어릴 때부터 ‘테니스 전설’ 이형택을 보고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한 국내 대회에 볼보이로 참가했다가 대회에 출전한 이형택을 만나 줄을 서서 사인 받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때 사인을 꽤 많이 받았다. 옷에도, 종이에도, 모자에도 받고 또 받았다. 물론 원장님(이형택)과 사진도 같이 찍었고. 그런 분과 대표팀에서 감독과 선수로 만났을 때 정말 기분이 묘했다. 내 우상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그 분과 같은 장소에서 테니스를 치고 배우고 있다는 게 엄청 신기했다.”
관건은 ‘시속 200km 서브’
정현에게 이형택은 우상이고, 노박 조코비치는 롤모델이다. 강한 멘털과 압도적인 플레이로 상대의 혼을 빼놓는 조코비치의 경기 방식을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조코비치는 정현의 인터뷰 때마다 등장한다.
정현은 현재 삼성증권 후원으로 전담팀과 함께 움직인다. 삼성증권 테니스단이 해체되기 전 남자선수들을 지도한 윤용일 코치와 김태환 트레이너가 투어 동반자들이다.
“윤용일 코치님과 김태환 트레이너님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그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때론 스승으로, 파트너로, 또 인생의 선배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투어 생활은 매우 단조롭다. 코트와 숙소만 반복해 오가기 때문에 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계셔서 덜 외롭고, 힘들 때 큰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정현의 약점은 서브다. 세계 강자들과 상대하려면 시속 200㎞ 이상의 스피드를 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윤 코치는 이에 대해 “서브는 정현뿐만 아니라 아시아 선수들의 고질적인 문제다 그러나 올 시즌 정현의 서브를 이전과 비교해보면 많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내리꽂는 정확도까지 갖췄다”라고 설명했다.
정현도 “아직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서브 밸런스를 교정하면서 토스, 체중 이동 등 모든 걸 조금씩 교정하고 있다. 시속 200km 스피드가 나온 적도 있기 때문에 계속된 훈련을 통해 안정된 서브를 장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현은 5월 24일부터 열리는 올 시즌 두 번째 그랜드슬램 대회인 프랑스오픈에 예선부터 참가한다. 그리고 6월 영국 윔블던에서 열리는 대망의 윔블던 대회 본선에 진출한다. 정현의 가파른 성장세는 메이저 대회에서도 쭉쭉 이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