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주권에 도전한 楚 장왕과 시진핑의 中國夢
- 淸 · 日에 양속(兩屬)된 류큐, 멸망한 오스만투르크의 교훈
- 왔다갔다 하다 망한 초나라와 정나라
- 비스마르크, 에마뉘엘레 2세의 용기와 지혜 배워야
- 반성할 줄 모르는 아베 신조의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의 꿈이 실현될 길이 열렸다. 미국과 일본이 18년 만에 미·일 방위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태평양을 동서로 나눠 지배하자며, 패권 의지를 드러낸 중국에 맞섰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에 선 한국의 오늘을 ‘외교의 눈’으로 들여다볼 새 연재 ‘세계는, 한국은’을 이번 호부터 게재한다. 한국의 외교 전문가인 필자는 정치학박사로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도 맡고 있다. 이 글에선 ‘장량(張良)’이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다. <편집자>
주체(主體)를 내세우는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소련과 중국,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에는 중국에 기대 생존해왔다. 중국을 종주(宗主)로 보는 주자학(朱子學)이 국가 이념이 된 조선 건국 이후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하기보다는 최강대국을 추종해 국가 안보를 유지하려 해온 것이다.
‘국가 위기’ 감지한 일본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 두만강 유역의 회령까지 유린하는 상황에 처하자 국왕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려 하는 등 명나라에 기대 정권을 유지하려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에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앞세운 국왕 인조를 비롯한 서인 지배층의 과오로 청나라의 침공을 두 차례나 당한 끝에 수십만 명의 국민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국왕이 항복하는 고통과 수치를 겪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三學士)와 김상헌을 포함한 다수의 주자학자는 명나라 황제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청나라 배격을 주장했다. 그들은 청나라를 배격하는 것만이 정치 · 사회적으로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초에는 이기적이기까지 한 왕실과 노론벽파(老論僻派)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망국의 치욕을 당했다. 일제의 압제를 겪으면서 우리 스스로의 시각으로 우리 문제를 관찰하고 해결해보려는 의지와 능력은 한층 더 약화했다.
2015년 현재는, 중국의 지속적 부상(浮上)과 미국의 점진적 쇠퇴, 일본의 재무장(rearmament)이라는 세력 전환(power shift)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격변기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전부터 완만히 진행되던 영미 간 세력 전이와는 달리 미중 간 세력 전이는 문화적 · 인종적 배경이 다른 나라 간,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세계제국 미국의 쇠퇴 현상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미국의 세계 지배 기둥 중 하나인 경제 · 금융 부문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등이 가입하는 것으로 결론 나면서 붕괴의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를 탈취함은 물론 돈바스 지역 내전에 개입하는데도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앞서 2013년 12월 중국이 동중국해 상공에 한국 일본과 겹치는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했는데도 중국이 위협으로 느낄 만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중국이 중국판 먼로주의(Monroe Doctrine), 즉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은 미중 두 나라를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고 말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함께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선포 및 태평양 분할 요구 발언은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로 하여금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대응을 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국가 차원의 위기를 감지한 일본은 아베의 주도 아래 재무장으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일본의 정치 · 사회 엘리트는 일본을 요시다 쇼인, 다카스키 신사쿠 등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던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일본은 중국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와 대한해협으로 동진하는 현 상황을 러시아가 랴오둥반도의 뤼순커우만(旅順口灣)과 한반도의 원산만, 영도로 남진하던 19세기 말과 유사하다고 보고, 이에 대응하고자 미국의 후원하에 국가 안보 체제의 근간을 바꾸어나가고 있다.
Great Republic of Korea
미국은 기존 세계 질서를 바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고자 2009년 2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연설을 통해 아시아 복귀(pivot to Asia)를 선언했다. 하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도처에서 도전을 받는 터라 단독으로는 중국의 동진을 저지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대처하고자 셰일가스를 활용한 제조업 재건 등 경제 활성화와 함께 한국, 일본, 호주 등과 동맹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러시아 제국의 남진에 맞서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한 19세기 말의 영미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초의 미국도 중국의 동진에 맞서 특히 세계 제3위 경제대국 일본과 동맹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에 대처해야 하는 미국 처지에서 한국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일본보다는 상당히 비중이 떨어지는 나라다. 반도국가인 한국은 중국과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일본과는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고, 극단적 상황에서는 미국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나라로 미국은 보고 있다.
한국은 중견국(middle power) 수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졌지만, 안보 측면에서는 미국, 경제 측면에서는 중국에 과다하게 의존하고 있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태풍의 눈’에 자리해 있으며, 북으로는 적대하고 있는 북한, 남동으로는 일본, 서로는 중국이라는, 언제든지 적으로 바뀔 수 있는 나라와 연접(連接)해 있어 활동 공간이 극도로 제한돼 있다. 그렇기에 국가적 위기는 상시화할 것이며, AIIB 가입과 사드(THAAD ·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시스템의 한국 배치 문제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사안은 계속 늘어갈 것이다.
위기의 폭이 나날이 확대되고, 강도도 강해지는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대응해야 한다. 특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 엘리트들의 혁명에 가까운 인식 및 태도의 변화다. 조선시대 이후 늘 그래온 것과는 다르게 정치, 외교 · 국방, 재계, 언론 등 각계 엘리트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세를 확고히 해야 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통일을 달성해 고구려 이후 처음으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대한민국(Great Republic of Korea)’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또한 내정의 혼란과 부패를 일소해야 한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고, 최강대국에 안보를 의존한 선조들의 행태를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국가와 민족 소멸의 운명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강대국의 卒로 남을 것인가
국내외 일부 외교 전문가들이 미중 세력 전환기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주장하는 ‘균형외교’는 ①앗시리아, 신(新)바빌로니아, 이집트 사이에서 시계추 외교를 한 유다 왕국(BC 10세기~BC 6세기) ②중국 춘추전국시대 남방 강국 초(楚)와 북방 강국 진(晋) 사이에서 고통을 겪은 정(鄭) ③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에 끼여 있던 폴란드 ④청(淸)과 일본(사쓰마번)에 양속(兩屬)되고 만 류큐(琉球) 등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증명하듯,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정나라와 폴란드가 인근 강대국에 지속적으로 침탈당한 끝에 결국 분할되거나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균형외교는 근본적인 방책이라고 할 수 없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에 따르면 “과거 수세기 동안 한반도의 운명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세력균형에 의해 좌우돼왔다”고 한다. 균형외교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돼 있다. 강대국 정치의 졸(卒)로 계속 남아 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북통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국가 안보 최후의 수단은 군사력이다. 군사력은 경제력과 무기의 수준 · 체계와 함께 군(軍) 지도자들의 정신 자세와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 인사들은 미군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층 인사들은 북한을 통합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지도층 인사들이 더 이상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만을 바라보지 않고 전쟁터 같은 가장 위험한 곳에 자기 자식을 먼저 보내는 등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때 국가안보는 반석 위에 놓일 것이다. 로마제국, 대영제국, 미국, 독일 제2제국, 일본제국 등은 흥성기에 예외 없이 지도층 인사들이 먼저 희생해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중국의 정나라나 조선, 우크라이나처럼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는 나라는 제대로 된 친구도, 심지어 적(敵)조차 될 수 없다. 우리는 적군 앞에서 먼저 도망친 선조나 인조 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까지 들어간 을지문덕, 아들과 조카까지 종군시킨 이순신 같은 유능하고 국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지도자에게 나라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한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국가사회를 통합 · 조직화할 때 통일외교는 순조롭게 추진될 것이며 5000만 인구의 한국이 통일은 물론, 13억5000만 인구의 중국, 1억2000만 인구의 일본에 맞서 국가와 민족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조차 바꿀 수 있다. 12세기 칭기즈 칸은 가진 것이라고는 양과 말밖에 없던 몽골을 유라시아 대제국으로 창조해냈다. 19세기 비스마르크는 몇 백 개의 소국(小國)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통합해 강대국으로 재탄생시켰다.
“九鼎의 무게는 얼마인가”
이순신 같은 위대한 리더는 국가의 운명을 바꾼다.
앞서 다뤘듯 현 국제 질서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쇠퇴, 일본의 재무장 시도 등으로 인해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와 최근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AIIB 가입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끝나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중국은 세계경제위기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강대국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패권을 이양 받은 과정과 방법을 연구해왔으며,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고 있다.
춘추시대 중원 국가들에 의해 남방 오랑캐로 취급받던 초(楚)의 장왕(莊王)은 종주국 주(周)에 통치의 상징인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었다. 이는 주의 종주권을 뺏어올 수도 있다는 선언으로 주의 종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시진핑의 “태평양은 미중 두 나라를 모두 수용할 만큼 넓다”는 발언 역시 중국이 앞으로 미국의 태평양 패권에 정면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계제국 미국과 도전국인 중국 간 경쟁의 심화와 함께 일본의 재무장,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세력의 대두 등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변화의 태풍 속에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국력이 약하고 분단돼 있는 우리나라는 선택을 잘못하면 망국멸종(亡國滅種)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득실 애매한 외교 · 안보
이러한 절체절명 시대의 지도자는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처럼 ①자신을 먼저 희생할 준비가 돼 있고 ②국민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③매우 유능하고 ④갈등과 분열의 치유(治癒)라는 시대정신(Zeitgeist)에 충실해야 한다. 지도자는 △투철한 역사의식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경제와 사회, 외교 · 안보 분야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도 갖춰야 한다. 이와 함께 판단력과 결단력도 갖춰야 한다.
지도자는 종적(縱的)으로는 역사, 횡적(橫的)으로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에게 무한한 책임을 진다. 지도자는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빈부를 하나로 묶는 국민통합도 이뤄내야 한다. 또한 지금의 국민은 물론 그들의 후손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여건도 마련해줄 책임을 지녔다.
우리나라는 ①강대국에 둘러싸인 ②분단된 ③중견 국가로 외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다. 외교가 특히 중요한 이유다. 대통령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외교 · 안보정책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며, 장 · 차관의 진퇴는 대통령의 결정에 좌우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장 · 차관과 그 휘하 관료들은 대통령의 말을 금과옥조(golden rule)처럼 받드는 경향이 있다. 지도자가 외교 · 안보정책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만회가 거의 불가능하며 심각한 후유증이 야기된다. 따라서 지도자는 외교 · 안보 분야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는 6 · 25전쟁과 1997년 경제·금융위기, 자원협력외교 등 현대사를 통해 무능하고 아집으로 가득한 지도층이 어떻게 국가적 위기나 대규모 경제적 손실을 불러왔는지 잘 안다.
지도자가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대로 조타(操舵)해나가지 못하면, 한국은 급부상하는 중국,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무장에 나선 일본 사이에서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실물(實物)을 다루는 경제와 달리, 외교 · 안보는 득실이 바로 드러나지 않으며, 국민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단기간 내에는 감지할 수 없다. 세계체제가 급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이나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선포,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마저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대다수 국민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나 쌀 · 자동차 협상, 영사 · 교민 보호 등 실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외교 · 안보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심도 적다.
우리는 甲 아닌 乙
전쟁이나 대규모 전투, 해외파병 같은 중대 사안이 발생하면 결정자는 결국 지도자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 건국 이후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나라를 망치고, 국민을 도탄(塗炭)에 빠뜨린 지도자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 말 청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강대국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시계추 외교에 몰두한 고종과 민씨 일가를 포함한 노론벽파 집권층이 대표적 예다. 19세기 말 고종을 포함한 노론 집권층의 우물 안 개구리식 ‘시계추 외교’는 조선을 망국멸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일부 백면서생이 말하는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도 긴밀히 하라’는 모순된 주문에 따라 미국과 중국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외교정책을 취하면 다시 20세기 초와 같은 망국의 비극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동맹은 약자가 아닌 강자의 선택이다. 한미동맹의 성격과 강도, 용도도 한국이 아닌 미국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공산이 크다. 미중 세력 전환기에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나라가 한미동맹 강화와 함께 중국과의 관계도 더 밀접히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은 한마디로 지속 가능성이 없는 외교정책이다. 많은 전문가가 위기 타개 방안으로 미중 간 균형외교와 함께 용미(用美), 용중(用中)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나라가 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강대국을 활용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우리는 갑(甲)이 아닌 을(乙)의 처지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對)북한 정책을 비롯한 대내외 정책을 두고 지금과 같은 극단의 국론 분열이 지속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장강(長江) 유역의 초(楚)나라는 친진(親秦)이냐 친제(親齊)냐, 즉 진(秦)나라와 연합하는 연횡(連衡)이냐, 진나라를 배제하는 합종(合縱)이냐를 두고 지도층 인사들 간 내분에 가까운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국력을 소진하고 끝내 진나라에 병탄(倂呑)당하고 말았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웅씨(熊氏) 왕족 중심의 친진파는 굴원(屈原)을 포함한 친제파를 적국인 진나라보다 더 증오하고, 말살하고자 했다. 춘추시대 초나라와 진(晋)나라 사이에 끼여 있던 정(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친초(親楚)와 친진(親晋)을 왔다갔다 하다가 진(晋)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한(韓)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차라리 히틀러를…”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도부는 연합국(영 · 불 · 러)과 동맹국(독 · 오스트리아) 중 어느 쪽에 서느냐를 두고 친영파와 친독파 간 정쟁을 벌였다. 터키의 국부가 된 케말 파샤는 친영적, 주독대사관 무관(武官)을 지낸 엔베르 파샤는 친독적 위치였다. 정권 1인자 엔베르 파샤는 독일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독일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이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해체로 이어졌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1936년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의 집권이 임박해 보이자 일부 우파는 “차라리 히틀러를…”이라고 외친 적도 있다. 한국에서도 친미파와 친중파의 정쟁으로 인한 혼란이 빚어질 수 있다.
이에 반해, 19세기 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피에몬테의 에마뉘엘레 2세 같은 지도자들의 용기와 지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가져왔다. 그리고 1990년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결단력은 독일 통일의 새 시대를 열었다. 최고지도자의 결단은 그만큼 중요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광복과 분단, 6 · 25전쟁,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김일성 · 김정일의 사망 등 중대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당시로서야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이승만과 김영삼, 이명박 등 당시 지도자들이 과연 올바른 판단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 포격 도발을 감행했다.
1976년 8월 발생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나 2010년 11월 일어난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같은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때는 청와대 안보실장이나 외교장관, 국방장관, 국가정보원장도 결국 조언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나 2011년 2월의 구제역 사태 등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 지도부는 정치(精緻)한 해결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개 도서가 아니라, 만약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나 포항, 울산 같은 기간산업 도시에 북한의 포탄이 떨어진다면 일반 국민에 앞서 지도층 인사들이 먼저 패닉(panic)에 빠지고 말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 사례도 있다. 민주당 출신 간 나오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은 지진과 쓰나미에 이은 원자로 사고가 발생하자 오판에 오판을 거듭한 끝에 일본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는 민주당의 총선 대패와 함께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도 기여했다. 지도자가 위기의 순간에도 정확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으려면 직관뿐 아니라, 정치는 물론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함께 다양한 사건을 상황에 따라 정밀하게 분석, 대처 방안을 제시해놓은 매뉴얼을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한다.
- 2015년 5월 중국 랴오둥반도의 끝 뤼순 항이 내려다보이는 러일전쟁 격전지 203고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