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英 AIIB 전격 가입에 57개국 동참…존재감 浮上
- 독립 英연방 54개국, 英여왕 군주로 모셔
- 런던 1일 거래량 2조7630억 달러(41%)
- 英 아프리카 인프라 투자 AIIB보다 100년 앞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추인’에 나섰다. 지난 4월 말 미일 정상회담 때 오히려 “미국은 AIIB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적이 없다”고 공언하며 우방 일본이 AIIB에 가입하는 것을 은근히 용인한 것은 물론,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 자국을 대신한 ‘대리 견제’가 가능하도록 멍석을 깔아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영국 덕택에 AIIB의 존재감이 순식간에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유무형의 여러 외교적 부담을 감수하고 영국이 먼저 중국에 다가가 손을 내민 것은 인프라 건설 자체에서 파생되는 경제효과는 물론, 자금조달과 외환거래 시장의 상당부분에서 플랫폼으로 활용될 영국이 얻어낼 이익 규모가 막대하다는 속셈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런던 금융시장은 국가 간 은행 대출, 외환 거래, 장외 파생상품 거래, 국제 채권 거래, 해상보험료 수입 등에서 세계 1위다. 외국 주식 거래, 자산 운용업, 헤지펀드 자산 규모 등에서도 세계 2, 3위 수준이다. 영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2조8500억 달러로 한국의 2배 수준. 세계 6위권이다. 제조업 기반이 마땅치 않고 고령화의 진전으로 인해 장밋빛 성장이 예상되지는 않는다. 다만 금융산업이 통계상 GDP의 약 10%를 차지하는데, 컨설팅 · 법무와 같은 파생 서비스업 및 인터넷은행, 핀테크 등 온라인 산업에 미칠 효과 등을 감안하면 존재감은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돈줄을 쥐다
특히 영국과 더불어 양대 금융시장인 미국은 자국과 상대국 간 거래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런던 시장은 아시아 · 태평양 및 아메리카 대륙과 중간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제3국 간의 거래 · 결제 비율이 높다. 금융시장 참여자는 거래에 따라 이득도 손해도 볼 수 있지만, 금융시장 자체는 ‘판’을 깔아놓는 것만으로도 안전한 ‘자릿세’를 받는다. 라스베이거스 같은 근사한 도박장을 차려놓고 참여자들로부터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떼는 개념이라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영국발 두 번째 관심 뉴스는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가 왕실 순위 ‘넘버 4’가 될 공주를 나았다는 소식이다. 세계 각지에서 축하 일색인 것을 보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존재 이상의 힘이 느껴진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등 과거 영국 식민지 국가였다 독립한 영연방국가(Commonwealth Countries) 54개국이 아직도 표면적으로 영국 여왕을 군주로 모시고 있다. 영연방끼리는 대사(Ambassador) 대신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을 파견하고, 여왕을 대신하는 의미로 총독도 보내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공감대랄지 합의는 짧게는 2세기 전부터 영국이 앞장서 시작한 제국주의의 발현과 관계가 깊다.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독일, 일본, 중국보다 훨씬 앞서 ‘세계의 공장’을 자임했다가 이제는 ‘세계의 은행’으로 자리매김하며 ‘땅 짚고 헤엄치며 돈 버는’ 시장을 구현하고 있다. 유럽 · 아메리카 · 중동 · 아시아 · 아프리카 등 모든 대륙에 걸쳐 ‘패권’을 행사한 영국이 2차대전 이후 미국에 밀려 쇠락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조용히 세계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중개의 귀재
세계의 돈이 각국의 표기 통화와 그 교환가치에 맞춰 거래되는 외환시장(Foreign Exchange Market)이야말로 전 세계 금융시장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이 금 일정량에 달러 교환가치를 연동시킨 ‘금-달러 본위제’를 폐기한다고 선언한 이후 1973년부터 세계적으로 변동환율제가 정착되면서 외환시장은 급속히 확대됐다. 1980년대부터 세계무역량 확대에 따른 자본거래가 급증하고, 1990년대부터는 환거래 때 위험 회피 등을 목적으로 한 파생상품이 등장하는 등 양적, 질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국제결제은행(BIS)이 각국 중앙은행의 협력을 통해 3년에 한 번씩 시장조사를 실시해 세계 시장별 통화별 거래량을 발표하는데, 가장 가까운 2013년 4월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1일 평균 외환거래량은 5조3400억 달러로, 한국 연간 GDP의 4배에 가까운 규모다. 3일간의 외환거래량이 전 세계 1년간 무역 거래량(18조 달러)에 육박할 정도다.
시진핑 중국 주석(앞줄 왼쪽 네 번째)등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한 국가의 대표들. 영국이 가입하면서 동참한 국가가 57개국으로 크게 늘었다.
시장별로 살펴보면 런던 시장 1일 거래량이 전체 41%인 2조7630억 달러로 1위를 차지했으며, 2위는 뉴욕(1조2630억 달러)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3위는 싱가포르(3830억 달러), 4위는 도쿄(3740억 달러)였으며 홍콩과 스위스가 뒤를 이었다. 외환시장의 트레이딩은 대개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 도쿄→홍콩→싱가포르→스위스를 거쳐 런던→뉴욕으로 24시간 내내 진행된다. 런던에서 오전에는 아시아 및 중동 지역 거래 수요를, 오후에는 미국과 유럽을 커버하기 때문에 중개 기능의 완결성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런던 시장은 또 달러나 유로에 편중되지 않고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 개별 통화의 유동성도 강하다. 2000년대 들어 유로화 경제권의 본격화, 정보통신(IT) 기술 발달, 위안화 시장 확대 등의 여파로 인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뉴욕, 홍콩으로 금융시장의 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경제권이 G5, G7에 이어 G20으로 더 다각화하면서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걸쳐 전 방위적인 통치 및 외교 경험과 정보, 네트워크를 축적해온 런던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1986년부터 영국은행협회에서 매일 공시하는 리보(Libor · 런던은행 간 제공금리) 역시 2012년 은행 간 담합 이슈가 불거지며 위상이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대체재가 마땅치 않은 까닭에 여전히 수백조 달러 규모의 전 세계 파생상품 및 은행 간 대출금리를 결정해주는 기준금리 노릇을 하고 있다.
‘강대국의 자유’
한국도 이명박 정부 때 서울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나온 바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금융산업은 휴대전화나 자동차산업처럼 땀과 의지만 가지고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기 어려운 분야다. 글로벌 시장에서 어느 정도 ‘편하고 신뢰할 만한 시장’으로 체급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현재 세계 18위 수준인 원화의 통화 거래량, 남북한 대치 상태, 소통 언어, 이슈 등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영국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팍스 브리태니카(영국에 의한 평화 시대)’의 패권을 통해 무역과 금융에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규정이나 이론을 구축해온 선두주자였다. 일찍이 17세기 청교도혁명, 명예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배경을 마련한 뒤 18세기부터는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을 급증시켜 국력을 키웠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상품 운송에 적합한 안전한 무역 거래의 장을 마련해준 것도 영국이다.
당시 영국은 ‘강대국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며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문명사회라고 판단한 국가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시장을 개척했고, 아시아와 같은 ‘전근대적’ 국가들에 대해서는 식민지 제국주의를 앞세우는 등 제 입맛에 맞는 공략법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適者) 생존’이라는, ‘강자로의 흡수 진화’ 논리를 뒷받침했고,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체제를 유지해준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유방임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식량 증산을 순탄하게 하려면 농지를 제공해주는 지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영국 위정자들의 통치철학을 견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으로 유명한 미시경제학, 정부의 ‘유효수요 창출’을 통해 불황을 타개하는 메커니즘을 소개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케인스의 거시경제학도 영국의 패권 시대와 함께 주목받은 경제이론이다.
중세부터 꽃피운 모직물산업에 이어, 18세기에는 인구 증가에 맞물려 병행된 농업혁명으로 각종 식 · 음료 제품의 증산이 이뤄졌다. 영국은 또 아메리카 대륙에 필요한 노동력을 아프리카에서 착취, 흑인노예 거래의 무대를 만들어주며 중개무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자본의 축적’도 생겨났다.
‘젠틀맨 자본주의’
모직물 제작 · 가공 등 경공업의 기술혁신을 골자로 한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영국은 자체 생산한 모직물을 수출해 점차 국부를 늘려갔다. 인구, 경지 면적, 생산량(GDP), 세수(稅收), 무역수지, 군사비의 계량화도 이 시기 영국을 기점으로 체계화했다. 19세기 후반 화학과 석유, 전기 등 중공업이 부상한 2차 산업혁명은 미국과 독일이 중심이 됐다. 토머스 에디슨의 백열전구(1880) 발명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영국은 이미 산업이 고도화하면서 2차산업(공업) 중심에서 은행업, 증권업, 보험업, 해운업 등 유관 3차 금융서비스업으로 진화해나갔다. 모두 지금껏 영국의 기간산업이라 할 수 있는 업종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왕족과 귀족에 이은 하급 귀족이자 중산층인 젠트리(Gentry), 혹은 젠틀맨(Gentleman) 계층이 활발히 부를 축적했다. 생산력 향상과 무역 노하우를 먼저 접한 계층이라 선험(先驗) 지식을 다른 나라에 적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젠틀맨들은 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가 ‘시티’를 시작으로, 미국과 독일 등 2차 산업혁명 선도 국가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세계의 공장이 바야흐로 ‘세계의 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젠틀맨 자본주의’라 하기도 하는데, 특히 유대인 자본으로 각광받은 젠틀맨 가문 ‘로스차일드’는 미국 월스트리트에 대한 선제적 투자로 명성을 얻는다. 그들의 막대한 자금력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더욱더 왕성해져 1920년대 미국 번영을 이끄는 마중물이 된 것과 동시에,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을 맞이하는 거품경제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환전상이었다. 유럽 각국의 귀족에게 융자를 해주며 수수료와 이자를 챙겼는데, 초대 창업주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자녀들을 런던, 파리, 나폴리, 빈 등의 지점 대표로 내보내 세계화를 꿈꿨다. 런던을 맡은 3남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세기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의 패배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한 뒤 런던 금융시장에 역정보를 흘려 영국 채권 가격을 폭락시키고 낮은 가격에 매수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당시엔 구전(口傳) 말고는 효율적인 통신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인적 네트워크, 날씨에 관계없이 항해를 강행하는 선박 등을 적절히 활용해 정보전(情報戰)에서 승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DNA의 유산이 훗날 런던의 독보적 금융시장 구축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파운드화, 아직 ‘빅3’
국제 외환시장에서 ‘빅3’의 위상을 유지하는 영국 ‘파운드’화.
영란은행은 초기에 국채 인수를 통해 사실상 나라의 빚을 떠안는 기능을 했다. 이후 1844년부터는 지폐를 발권하는 독점적 기능을 갖게 됐는데, 이것이 현재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 모태가 됐다. 원래 민간 은행으로 설립됐지만 재정 규율을 감독하기 위해 2차대전 이후인 1946년부터 국유화했다.
GDP 순위는 프랑스에 밀려 6위까지 떨어졌지만, 영국 통화 파운드는 아직 ‘빅 3’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달러는 국제 결제 시장에서 44.64%로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고, 유로가 28.3%, 파운드가 7.92%, 엔이 2.69%를 기록했다. 위안화가 2.17% 점유율로 급부상해 캐나다 달러를 제치고 5위에 합류한 것도 유의미한 변화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달러 시대 이전에는 영국 파운드화가 금 본위제에 근거한 1강(强)의 기축통화였다. 여러 대륙에 걸쳐 세계무역을 하는 동안 뿌려놓은 파운드의 씨앗이 워낙 강렬하게 발아(發芽)한 덕에, 비록 패권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경제에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사 이래 금과 은은 희소성 있는 귀금속이라는 인식에 따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화로 인정받았다. 금광과 은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한 중국에서만 청동이나 동전화폐가 오래전부터 통용됐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쳐 스페인이 아메리카 신대륙의 은산 개발에 나서면서 대량의 은화가 세계 각국에 유통됐다. 그러다 멕시코 등지에서 은화 발행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자연히 국제통화로서 은의 가치는 떨어졌다. 그때 마침 등장한 것이 영국의 금본위제다.
金 이상의 신용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무역대금으로 받은 막대한 금을 축적했으며, 시간이 흘러 축적된 금에 연동시킨 파운드화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유럽 각국 및 식민지 무역 상대국들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19세기 후반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고 이에 따라 세계적인 금 유통량(유동성)이 늘어나자 금본위제 이행을 서두르게 된다.
영국 화폐인 파운드화가 금 이상의 신용을 얻으며 통용된 데에는 당시 최대 교역국이자 해외자본 수출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다. 186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1840년대부터 개발된 세계 최장(전장 10만km 이상)의 인도 철도망, 중국 상하이 고층빌딩가 등이 당시 파운드화로 투자된 대표적 인프라다.
인프라 투자 100년 노하우
AIIB 발족과 맞물려 관심을 끄는 대목은 AIIB가 앞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기간시설 투자에 많은 신경을 쓸 것이라는 부분이다. 원자재를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아프리카에 많은 호의를 베푸는 현실을 감안할 때 아프리카 개발이 조금 더 밀도 있게 진척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영국이 오늘날 중국에 비해 아프리카 인프라 투자에서 100년 앞선 선배라는 점은 향후 영국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을 통해 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식민지 건설에 공을 들였다. 콜카타(인도)-카이로(이집트)-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의 머리글자 ‘C’를 따 붙인 이름이다. 원자재와 천연자원의 원활한 공급을 노렸다는 측면에서 오늘의 중국과 비슷하다. 또한 당시 영국은 식민지가 값싼 노동력을 공급해주고, 필요할 때는 자국의 상품을 비싼 가격에 구매해주는 역할까지 해주기를 바랐다.
개발과 착취를 위해 전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1899~1902년의 보어(Boer) 전쟁이 대표적이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케이프타운은 본래 네덜란드인들이 이주해 식민지를 세운 곳인데, 1814년 무렵 영국이 재차 점령했다. 이미 아프리카인이 된 네덜란드인들(혹은 ‘보어인’으로 불림)은 어쩔 수 없이 케이프타운 동북쪽으로 이주해 그 지역에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워 정착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와 보어인들의 오렌지 공화국 사이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광과 다이아몬드를 보고 보어인 침략 전쟁을 벌였다. 금 본위제 경제체제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는 계산에 따라 그야말로 ‘금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남아프리카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은 50만 명이 넘었으나, 9만 명에 불과한 보어인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 규모와 전비(戰費)에서 영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