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와 오바마가 손을 굳게 잡았다. 김정은과 푸틴도 밀월관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G2 중국은 한국에 노골적으로 중립을 요구한다. 동아시아 세력 구도는 새롭게 재편되는가. 한국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가.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에서 다시 거대한 도박판이 벌어질 모양새다. 이 지역에선 어마어마한 양의 자본, 자원, 물류가 유통된다. 어느 나라가 우위에 서느냐에 따라 세계 질서의 판도가 바뀐다.
신형대국론 vs 중국위협론
이런 가운데 최근 뚜렷한 변화가 감지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사상 유례없는 우호관계로 접어들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러관계 회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과거사 문제로 사실상 대화가 끊긴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과도 냉랭하다. 또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으로 비친다.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미·일·러·북 각자의 베팅 전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의료보험 개혁 같은 복잡한 내정을 어느 정도 수습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동북아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는 이미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이 아니다.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주장한다. 미일동맹 체제가 가동되고 있지만 일본은 과거사 부정, 경제적 영향력 약화로 인해 미국의 파트너 국가로 부족한 처지가 됐다. 한미동맹 체제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강화로 한국의 신뢰도가 약화하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에선 민족주의자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운다. 북한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할 수 없게 됐다.
2011년 미국은 중동에 집중해온 외교·군사정책을 아시아로도 이동시키겠다는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 전략을 채택했다. 동북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게 궁극적 목표다. 중국이 동북아의 패권국가가 되면 미국의 국익을 크게 위협한다고 내다본다. 미국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중국은 ‘신형대국론’을 내세운다. 중국과 미국이 상호 이익을 존중하면서 대결을 극복하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논리다. 중국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중국위협론’을 약화시키려 한다. 세력균형 이론의 대가 케네츠 왈츠는 “양극체제 아래서 세력균형이 이뤄졌을 때 평화가 유지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중국식으로 표현한 셈이다.
문제는 중국과 미국의 ‘핵심 이익’이 공존 가능하냐는 것이다. 중국의 당면한 핵심 이익은 대만, 티베트,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남중국해에 대한 지배권이다. 미국은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도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고 일본, 베트남, 필리핀을 편드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두 나라의 핵심 이익은 양립하기 힘들다.
‘밀당’에 지친 미국
미국과 중국은 각자 한계를 갖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 국가가 아니다. 미국은 이런 지리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도덕적 정당성을 결여한 일본을 적극 활용해 중국에 대한 견제 고삐를 바짝 죄려 한다. 나아가 ‘한미일 동맹’으로 강력한 대중 방어막을 구축하려고 한다. 그런데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어 골머리를 앓는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과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중국은 시장과 자원에서 한계를 갖고 있다. 중국은 수출을 미국 시장에 크게 의존한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중국의 현재 국력으로는 미국과의 전면적 대결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강력한 봉쇄정책을 펼치더라도 중국이 적극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여전히 중동으로부터 상당량의 에너지를 수입한다. 그러려면 미국의 해상 영향권이 작용하는 인도양과 남지나해를 거쳐야 한다. 중국은 이 길을 피하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로부터 육로로 가스를 수입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시진핑 주석은 5월 8일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향후 30년간 러시아로부터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가스를 수입하기로 했다.
정리하면, 미국-일본, 중국-러시아가 각각 편을 먹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한국과 북한도 관여한다. 한국은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이다. 그러나 2008년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맺으면서 북방외교를 강화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 긴밀한 경제협력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친중 정부’라는 의심도 받는다. 북한은 중국과 한국이 가까워지자 러시아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을 원조하는 한편 한국과의 경제협력도 강화하려 한다.
따라서 지금 동북아의 큰 도박판에선 미-일과 중-러가 각각 공고한 팀을 형성한 가운데 한국과 북한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각 팀에 발을 들여놓은 형세다. 이들 6개국은 최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뤘다. 박 대통령은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느니 안 하느니 하며 ‘밀당’을 했다. 여섯 나라는 앞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속개, 9월 중국 전승절 참여, 사드(THAAD) 한국 배치를 놓고도 치열한 외교전을 펼쳐야 한다.
지금까지 동북아의 큰 도박판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는 일본이다. 아베는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있다. 그는 4월 22일 반둥회의 6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2차대전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그는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AIIB 같은 현안을 논의했다. 그동안 일본과의 단독 정상회담을 허용하지 않은 중국의 관례를 끊었다는 점에서 아베 외교의 승리로 평가할 만했다.
엄청난 수익 올린 아베
아베는 4월 28일 미국에 가서도 똑같은 전략을 썼다. 2차대전에서 희생된 미군을 추모했다. 워싱턴DC의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찾아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렸다. 이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 미일 정상회담 개최, 사상 첫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같은 거침 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은 “이 새로운 가이드라인은 미일동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미일동맹을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글로벌 동맹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미다. 구체적으로 일본 자위대는 미군이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됐다. 자위대가 한반도에도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아베는 이어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마저 성사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미국이 마음먹고 밀어주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외교는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다. 아베는 일본을 ‘정상 국가’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첫 단추로 미국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아베는 미국의 힘이 빠지고 중국이 부상하는 동북아의 정세를 읽고 미국의 양보를 받아낼 기회를 포착했다. 심지어 아베는 지난 3월까지도 러시아의 전승절 초청을 수락하는 척하면서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아베는 외교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도 되살리고 있다. 2012년 집권 후 아베는 20년 가까이 이어진 디플레이션과 엔고(円高)에서 탈출하겠다며 ‘아베노믹스’를 발표했다. 최근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의 실질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015년 1.0%, 2016년 1.2%로 상향 조정했다. 일본 주식시장은 고공행진 중이다.
러시아는 전승절 70주년 행사를 앞두고 많은 외국 정상을 초빙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였다. 푸틴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정상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에 등장했다면 러시아의 국가 이미지가 크게 개선됐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정상은 모스크바에 가지 않았다.
푸틴은 대신 중국과의 전면적 경제협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푸틴은 앞으로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푸틴에게 축전을 보냈고 푸틴은 김정은에게 기념 메달을 전했다. 푸틴은 극동 개발 및 한국과의 가스관 연결을 원하는데, 이를 위해선 북한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만약 김정은 위원장이 9월 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한다면 그전에 북러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
김정은 돌파구는 사할린 가스?
동북아에서 북한이 차지하는 전략적 비중은 실로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외부에 의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 절대빈곤 속에서도 개방정책을 택하지 않았다. 그나마 북한의 변화를 이끌 유일한 인물은 김정은 위원장밖에 없다. 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제다.
김정은의 경제개발 및 투자유치 정책은 대부분 실패했다. 2013년 북한은 13개 경제개발구를 지정했다. 세금, 토지에 관한 여러 혜택을 제시했다. 그러나 한 건의 투자도 받지 못했다. 전력, 도로, 철도, 항만, 통신 같은 인프라 부족도 원인이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신이다. 핵실험 등으로 미국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북한에 투자하려는 기업은 앞으로도 잘 나오지 않을 것이다.
2013년부터 북한 경제는 최악의 국면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다만 이것이 지속적인 성장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북한 경제가 성장하는 주된 이유는 분조제(수확량의 일정 부분을 경작자가 가져가게 하는 일종의 가족농 제도)를 통한 농업 생산성 향상, 독립채산제를 통한 기업 생산성 향상,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송금경제 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자본이 절대 부족하다. 경제특구를 통한 외국 투자 유치가 실패한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카드는 국제협력을 통한 간접투자다.
북한은 다시 핵 카드나 무력도발로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도 북한을 궁지에 몰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화를 사실상 용인했는데, 북한의 핵 무장을 그 명분으로 삼고 있다. 북한이 문제국가가 될수록 미국은 동북아 개입의 명분을 찾는다. 또한 일본에 이어 한국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고립시키기 용이해진다.
북한은 미국 이외 나라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중국과의 협력을 꺼림칙하게 여긴다. 장성택이 처형된 이유를 밝힌 북한 ‘노동신문’ 기사에선 김정은이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충분히 읽힌다. 한국과의 협력도 만만치 않다. 천안함 사건,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등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이 향할 곳은 단 한 곳, 러시아뿐이다.
4월 17일 러시아 하원은 북한이 러시아에 진 외채 11억 달러를 가스관 건설사업에 투자하는 정부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르게이 스토르차크 러시아 재무차관도 북한의 채무가 가스관과 철도사업에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사할린의 천연가스가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산을 거쳐 북한으로 공급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할린 가스는 김정은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러시아가 북한에 가스관을 깔려는 것은 북한을 인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에너지 소비대국인 한국으로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한국도 청정에너지인 가스가 필요하다. 러시아 가스가 한국으로 들어오려면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공급망의 안전성, 미국 셰일가스의 견제, 북한 인프라 투자, 러시아와의 가스 가격 협상 등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현실화하면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다. 북한에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남북은 상호 신뢰를 쌓을 수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다. 가스관을 깔려면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데, 이 도로는 북한의 천연자원과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인프라로 활용될 수 있다.
‘청구서’만 받아 든 한국
남미 순방 후 박근혜 대통령은 돌변한 동북아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외교 실패를 비로소 깨닫고 당황하는 것으로 비친다. 미국이 아베의 손을 들어주며 한국에 싸늘하게 등을 돌린 듯한 양상이다. 미국 조야에선 아베 총리의 과거사 인식과는 별개로 “아베는 미래 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반면 박근혜는 한일관계를 국가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적 이슈로 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베 총리는 한국을 ‘미일동맹이라는 중심 기둥의 추가적 파트너’로 언급했다. 전문가들 사이엔 ‘한국 외교의 굴욕’이라는 극단적 평가도 나온다. 이러다간 외교가 박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 아니라 최대 과오로 인식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창하며 동북아 외교 전선에 선명한 깃발을 꽂았다. 중국은 이에 자극받아 AIIB를 전면적으로 들고 나왔다. 러시아도 유라시아경제연합(EEU)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선언만 있고 실체가 없다. 러시아가 추진하는 북한 나진항 개발에 간접 참여하겠다는 것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유라시아 철도 연결에도 참여하겠다고 하는데, 실제 투자 계획은 알려진 바 없다.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지 설명이 없다. 실행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적 발언은 주변국의 비웃음만 살 뿐이다.
한국은 미국에 뭐 하나 속 시원히 해준 것도 없으니 아베처럼 미국으로부터 통 큰 양보도 못 얻어내고 있다. 외교는 현실인데, 사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자체가 한미동맹 현실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라시아로 진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미국을 자극하는 요란한 말잔치를 앞세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는 사이 북한의 안보 위협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무시하려 든다. 중국은 이 참에 한미동맹을 시험하려 한다.
중국은 AIIB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 일본은 가이드라인 개정이라는 숙원을 풀었다. TPP와 유엔 안보리 진출로 나아간다. 반면 한국은 주변국으로부터 ‘이거 하라’ ‘저거 하지 말라’라는 청구서만 잔뜩 받고 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관철하지 못하면서.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의 전통적 우호를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해야 한다. 박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전략적 모호성’에 미국뿐 아니라 우리 내부도 지쳐가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그간 무엇을 했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참모는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국내 정치에 활용하지 말고 북한과의 협력도 모색해야 한다. 행동으로, 실질적 결과물로 말해야 한다. 지금처럼 남북이 단절된 마당에 북한이 돌연 도박판의 ‘선수’에서 ‘전리품’으로 전락하면 주변 강국들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개입한다. 그런 상황이 결코 한국에 유리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