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반, 미국 지식인들은 인상파 이후 현대미술을 ‘미친 짓’ 쯤으로 여겼다.
- 하지만 던컨 필립스는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마크 로스코 등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을 평생에 걸쳐 수집했다.
- 당시로선 유별나다고 했을 법한 필립스 컬렉션의 소장품들은 오늘날 금액으로 따지기 어려울 만큼 세계적인 명화로 칭송된다.
필립스 컬렉션은 미국 워싱턴DC 듀퐁서클 인근에 있다.
필립스 컬렉션은 당대 최고의 미술 비평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던컨 필립스(Duncan Phillips·1886~1966)가 세웠다. 그는 백만장자 집안의 후손이면서도 사업을 이어받는 대신 조상이 번 돈을 지혜롭게 쓰는 일에 매진했다. 그의 외할아버지 제임스 라플린(James H. Laughlin·1806~1882)은 피츠버그에서 철강업과 은행업으로 큰 부(富)를 일군 사업가다. 당시 피츠버그는 철강업의 메카였는데, 라플린은 ‘철강왕’ 카네기 이전에 피츠버그에서 철강산업을 개척했다. 대재벌의 사위가 된 그의 아버지(Major Duncan Clinch Phillips· 1838~1917)도 유리 제조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MoMA보다 8년 앞서
던컨 필립스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1895년 가족과 함께 워싱턴DC로 이주했다. 그는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예일대 시절 학보지 편집장을 지내며 예술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피츠버그보다 워싱턴DC에서 이런 그의 취향을 충족시키기가 더 유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필립스는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형까지 갑자기 사망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필립스 메모리얼 갤러리(Phillips Memorial Gallery)라는 미술관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자택 내 일부 공간에 많지 않은 소장품을 전시했는데, 1921년 화가 마조리 애커(Marjorie Acker)와 결혼하면서 이 갤러리를 일반에게 개방했다. 이것을 필립스 컬렉션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본다. 이때까지 소장품은 200여 점에 불과했지만, 이 미술관은 미국의 첫 번째 현대미술관이 됐다.
마조리는 1923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의 수준급 화가였다. 필립스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가며 작품 수집을 더 활발히 해나갔다. 아내도 미술관의 공동 설립자라고 할 정도로 미술관 운영에 정성을 쏟았다. 작품 수는 계속 늘어나 곧 600점을 넘어섰고, 관람 수요도 급증했다. 이에 1930년 필립스 가족은 살림집을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자택 전부를 미술관으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이후 몇 번의 증축과 개축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1989년 증축할 때는 일본인 사업가 야스히로 고(Goh)가 거금 150만 달러(약 16억 원)를 기증했다. 이때 만들어진 전시관은 고 아넥스(Goh Annex)라고 불린다. 미술관 이름을 ‘필립스 컬렉션’이라고 한 것은 1961년부터다.
세계 미술사는 19세기 후반 인상파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던컨 필립스가 살던 시대는 인상파 이후 아방가르드 그림에 대한 이해가 아주 부족하던 시절이다. 여전히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그림이 주류였고, 부자 수집가들은 이런 전통 그림에 몰두했다. 유럽보다 ‘후진국’이던 미국 역시 아방가르드 현대미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은 과거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필립스는 ‘변화’에 대해 확실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예술 역시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평가받지 못한 현대미술이 훗날 다음 세대의 원조가 될 것이라고, 즉 ‘아름다운 전통’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그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미국 지식인들이 유럽 현대미술을 미치광이들의 덧없는 푸닥거리 정도로 치부하는 와중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현대미술 수집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수집품은 현재 세계 미술사의 주요 작품 반열에 올라 있다.
르누아르가 마흔 살에 그린 ‘뱃놀이 점심(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르누아르 ‘뱃놀이 점심’ 소장
필립스는 꾸준한 미술 후원자이기도 했다. 물론 부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선각자로서의 자질이 없었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잠재력 있고 장래가 기대되는 작가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후원을 받은 작가들 중 많은 이가 미술사에 남은 인물이 됐는데, 대표적인 예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아서 도브(Arthur Dove) 등이다.
필립스 컬렉션에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 한 점 있다. 크고 화려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림 속 인물들이 정말로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상파의 대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가 그린 ‘뱃놀이 점심(Luncheon of the Boating Party)’이다. 르누아르가 마흔 살이던 1881년에 이 그림을 그렸으니, 그야말로 전성기 작품이다. 필자는 이 미술관에 두 번 갔는데, 그때마다 이 그림에 도취해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이 그림은 필립스가 애지중지한 보물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인상파 작가들을 적극 후원하며 미국에 인상파를 소개한 미술상 뒤랑 뤼엘(Paul Durand-Ruel)이 르누아르에게서 직접 구입해 아들에게 물려줬다. 필립스는 1923년 뒤랑 뤼엘의 아들에게 오늘날에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거금인 12만5000달러(약 1억3500만 원)를 주고 그림을 사들였다. 이 돈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메이-모제(Mei-Moses)의 그림가격지수에 의하면 1923~2010년 그림 가격은 500배 올랐다. 여기에 대입하면 ‘뱃놀이 점심’의 현재 가격은 6500만 달러(약 702억 원)가 된다.
1990년 한 일본인 재벌이 뉴욕 경매에서 르누아르의 대표작 ‘물랑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lette)’를 781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만약 ‘뱃놀이 점심’이 시장에 나온다면 그 값은 이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질 게 틀림없다. 최근 세잔의 대작이 2억5000만 달러, 고갱의 대작이 3억 달러에 거래됐는데, 이 그림도 결코 이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은 친구들이 센 강 유람선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오찬을 즐기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기로 포착한 듯 묘사했다. 르누아르 자신과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앨린 채리고(Aline Charigot)도 그림 속에 들어 있다. 유람선 회사 사장의 아들, 딸도 있다.
르누아르는 쉰 살을 갓 넘긴 1892년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았다. 손가락과 손목을 많이 사용하는 화가에겐 커다란 고통이었다. 1907년에는 관절염을 치료할 겸 기후가 온화한 남프랑스 칸쉬르메르(Cagnes-Sur-Mer)의 농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르누아르는 지중해에 가까워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이곳에 아예 눌러앉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머물던 집은 현재 ‘르누아르 박물관(The Renoir Museum)’으로 잘 보존돼 있다. 2008년 봄 필자가 그곳을 찾았을 때도 옛 건물과 고목으로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추상화가’ 거부한 로스코
필립스 컬렉션 2층에 자리한 ‘로스코의 방’ .
1961년 필립스가 없는 사이에 로스코가 이 방을 방문해 몇 가지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필립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놨다고 한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 의자를 하나만 두라는 로스코의 의견만은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재 로스코의 방은 2006년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데, 옛것과 별 차이가 없다. 로스코는 필립스 컬렉션의 이런 방식을 다른 미술관에도 권했다고 한다.
로스코는 독특한 화가다. 작품도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그림 유파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를 대성시켰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이런 평가를 거부하고 추상화가로 분류되는 것 역시 싫어했다. 그의 그림이 추상화가 아니라면 우리 같은 속인으로서는 도대체 어떤 그림을 추상화라고 해야 할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로스코는 약사인 아버지 덕에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졌다. 열 살 무렵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창고에서 날품을 팔고 신문팔이도 하며 예일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분위기가 싫어 2학년 때 자퇴했다. 1968년에는 심각한 심장병 진단을 받았으나 의사의 처방을 무시한 채 음주와 흡연을 계속했다.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1970년 2월 25일, 피에 흥건히 젖은 채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스코를 그의 조수가 발견했다. 동맥을 끊어 자살한 것이다.
로스코의 방에 전시된 4점의 작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아마 수천억 원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난해한 것이 특징이다. 초록색과 밤색으로 칠해진 ‘초록과 밤색(Green and Maroon)’도 작가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다. 서울 리움미술관에도 로스코의 대작이 전시돼 있다.
파울 클레, ‘아라비아의 노래(Arabian Song)’.
필립스 컬렉션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화가는 폴 세잔(Paul C′ezanne)이다. 필립스는 1925년부터 30년에 걸쳐 세잔의 작품 7점을 구매했다. 세잔은 남프랑스에 있는 그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생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oire)을 즐겨 그렸다. 필립스 컬렉션이 소장한 이 산 그림(1887년작)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세잔의 화풍이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근대회화 아버지 세잔 작품도
세잔은 아버지가 은행가인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고 40만 프랑이나 되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당시 예술가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세잔은 1874년과 1877년, 인상파전(展)에 두 번 참가했으나, 이후에는 자신만의 새로운 그림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그는 쇠라, 고흐, 고갱, 로트렉과 더불어 후기 인상파로 분류된다.
세잔은 19세기 인상파와 20세기 입체파(Cubism)를 연결하는 다리 노릇을 한 화가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세잔을 ‘예술의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이 두 거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세잔의 그림에서 입체파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입체파의 선구자 브라크(Braque), 그리(Gris)도 마찬가지다. 마티스가 창시한 야수파(Fauvism) 역시 세잔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따라서 세잔은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필립스 컬렉션을 설립한 던컨 필립스(오른쪽)와 그의 아내이자 화가 마조리 애커.
세잔은 파리보다 남부 프랑스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01년에는 엑상프로방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지었고, 이듬해 그곳으로 아예 이사했다. 이 아틀리에는 지금 그의 기념관으로 만들어져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나는 2008년에 찾아갔는데, 비가 내리는데도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아틀리에에는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사용한 소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세잔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폭풍우를 만나 길에서 쓰러졌다. 집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으나 다음 날에도 작업을 계속하다가 결국 몸져누웠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며칠 후 숨을 거뒀다. 1906년, 세잔은 예순일곱의 나이로 타계했다.
자신의 이론대로 작품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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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는 수집품을 미술관에 전시할 때 작품을 직접 배치하곤 했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간 미술관을 운영하며 늘 자신의 이론과 취향에 맞춰 작품 배치를 계속 바꿔나갔다. 시대별, 유파별로 전시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이런저런 기준에 따라 작가를 그룹별로 묶어 이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66년 사망할 때까지 미술관 관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아내 마조리가 잠시 미술관을 관리했고, 1972년부터는 아들이 관장을 맡아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1992년부터는 외부 전문가가 관장을 맡아 미술관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