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br>정혜신 · 진은영 지음, 창비
그녀의 딸을 그날 처음 만났는데, 총명하고 사랑스럽게 잘 자란 아이를 보니 내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 친구가 세월호 이야기를 하면서 뜻밖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애들 키우느라 내 살림 챙기느라 내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이런 일이 일어나니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나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생각한 마음들이 모여서,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어.”
친구의 고백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커다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 또한 남몰래 그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지만 멀리서, 그리고 혼자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자신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어도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존재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녀린 희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는 바로 그렇게 멀리서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책이다. ‘거리의 의사’ 정혜신과 ‘문학과 정치를 사유하는 시인’ 진은영이 만나 함께 한 대담집 속에는 세월호 유족들 이야기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트라우마 이후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가 담겼다.
치유 공동체, ‘이웃’의 발견
이 책은 아직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뼈아픈 분노와 죄책감을 잠시만이라도 내려놓고, ‘지성’과 ‘성찰’이라는 차분한 프리즘으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이 내게 준 커다란 인식의 전환 중 하나는 ‘세월호 피로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세월호 인양을 반대하거나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강한 반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아님을 깨우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그들이 너무도 ‘야박하고 무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월호 피로도를 내세우며 그 이야기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 또한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이야기 자체를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 또한 더는 상처 받기 싫은 마음 때문에 일종의 방어기제를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정혜신 박사와 진은영 시인이 가장 우려하는 것 중 하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싸움이 아니라 피해자 내부의 분열이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눈도 꿈쩍 안 하는데, 사건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면, 이 싸움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정혜신 박사는 세월호 사건 이후 안산으로 이주해 ‘이웃’이라는 치유 공동체를 마련하고 우선 유족들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사고로 떠나간 자식들 생각에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넘기던 유족들은 이곳에 와서 바깥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한다. 정혜신 박사가 마련한 치유 공동체 ‘이웃’에는 국민 성금으로 지원되는 소박한 집밥의 따스함, 세월호 사고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함께 뜨개질하며 서로 위로하는 모습,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된 아이들을 위한 생일잔치를 열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다.
사회적 치유가 먼저다
재난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한국 사회가 보여온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재난의 아픔을 결국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린다는 점이다. 분명히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책임이 필요한 일임에도 지배계층은 결국 ‘당신의 상처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대처해왔다.
정혜신 박사는 9·11테러나 동일본 대지진, 스웨덴 대형 여객선 침몰 같은 사례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 ‘사회적 치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제주 4·3 피해자들, 광주 5·18 피해자들, 그리고 쌍용차, 용산, 밀양, 강정, 씨랜드, 천안함 등 셀 수 없이 많은 피해자가 ‘사회적 치유’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재앙의 진상 규명이 선행돼야 하고, 이를 통해 사회가 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아 돕는 것이 그다음이고, 그래도 평생 씻을 수 없는 개인의 상처를 함께 치유하는 것이 맨 나중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늘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첫 단추가 끼워지지 않으니 사회적 치유도, 개인적 치유도 제대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이 바로 ‘이웃’의 공감과 연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굴 한번 본 적 없어도 ‘그날 그 충격’을 함께 기억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며 사회적 치유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선 유족이 2차, 3차의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더 이상의 자극적인 행동을 피해야 한다. 정혜신 박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소박한 일들’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어떤 학위 없이도 훌륭한 ‘이웃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어떤 자원봉사자는 ‘이웃’에 찾아와 하루 종일 청소만 하다가 간다고 한다. 그녀가 치유의 공간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어떤 의술이나 예술 작품보다도 더 훌륭한 ‘이웃 치유자’의 역할이다. 학위가 없어도 좋다. 대단한 이론이나 약물치료 같은 것이 없어도 좋다. 그저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보살피는 따스한 마음과 작은 배려만으로도 상처 받은 사람들의 가슴은 ‘기우뚱’한다.
진은영 시인은 정혜신 박사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정혜신 박사는 매우 명쾌하게 대답한다. 흔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할 때 그 아픔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트라우마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파괴되는 것이라고.
스트레스가 고부간의 갈등이나 시험 직전의 긴장감처럼 삶의 ‘부분적인 문제’라면, 트라우마는 다시는 그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총체적인 재앙이다.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우리는 다른 일에 몰두하거나 그 사람을 안 보면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지만, 트라우마는 그렇지 않다. 창졸지간에 자식을 잃은 슬픔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다른 엄마들을 볼 때마다, 새록새록 더 아프게 스며든다. 트라우마는 ‘그날 이전’의 삶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깊은 상처다.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스무 살 때 성폭행을 당한 한 여성이 20년이 지나 그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왜 20년이나 지나서 그랬냐’고 수군거렸지만, 그녀에게는 그 끔찍한 성폭행의 트라우마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로 어제 일어난 것처럼 또렷하고, 무섭고, 아픈 것. 유족들의 달력은 여전히 4월 16일에 멈춰 있다. 365번째 4월 16일이 지났어도 여전히 꿈쩍 않는 세상에서 오직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함께 보듬는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다.
‘세월호 피로도’를 이야기하며 더 이상 세월호 이야기를 안 하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세월호 인양을 경제논리 또는 정치논리로 반대하시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문을 트고 싶다. 당신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날 이후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같이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거부감은 당신이 상처 받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순 없을까요.
자원봉사자들이 뜨개질을 해서 유가족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이 직접 뜨개질을 하는 거예요. 유가족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꾸만 아이 생각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뜨개질을 하다보면 집중하느라고 아이 생각이 덜 난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진통제와 같은 거죠. 약은 효과가 있으면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기 마련인데, 이건 부작용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진통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들이 무척 전투적으로 뜨개질을 해요. (…) 아이에게 잘해주었던 교회 선생님에게 떠주기도 하고, 아이 친구에게 떠주기도 하고요. 아이를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유가족이 목도리를 떠주는데 세상에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선물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뜨개질을 매개로 해서 치유적인 관계가 자연발생적으로 이어지는 거지요.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