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우리 학생들은 북한 국제화 마중물”

이승률 평양과기대 대외담당부총장

  • 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입력2015-05-22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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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개혁개방 현장 본 김정일 “국제대학 세워달라”
    • 北 “우린 어떤 나라 지식도 배울 자세”
    • 北은 한국 교수 허용, 통일부는 방북 불허
    • 보수도 진보도 우리 대학에 편견
    “우리 학생들은 북한 국제화 마중물”
    북한에 한국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대학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양에 있는 국제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가 그것이다. 그나마 그 존재를 아는 사람들도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개 색안경을 끼고 본다. 보수 쪽에선 ‘해커 양성소’라는 의혹을 품고, 진보 쪽에선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이 세운 학교’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한다.

    이들은 왜 북한에 대학을 세운 것일까, 북한은 왜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대학 운영을 허락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이승률(67) 평양과기대 대외부총장을 만났다. 그는 한국 국적자 중에선 이 대학 최고위 인사다.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평양과기대 지원뿐 아니라 동북아 평화와 남북통일을 화두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들려준 평양과기대 이야기는 경색된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실마리를 제공했다.

    건설사(현 반도E·C)를 운영하던 그가 평양과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그야말로 우연이다.

    “1990년, 중국 칭타오에서 골프장 건설사업을 추진하던 중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국 국가주석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날 일이 있었다.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약속이 겹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분이 연변과학기술대와 평양과학기술대를 만든 김진경 총장이다.”

    미국시민권자인 김진경 총장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영국 유학 후 미국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시 중국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그는 독립운동을 한 선친의 발자취를 찾아 지린(吉林)성을 방문했다 낙후한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목도하고, 전 재산을 털어 옌볜(延邊)에 조선족 청년을 가르칠 기술전문대학 설립을 추진 중이었다.



    ‘민족통합 교육캠프’ 연변과기대

    이승률 부총장은 “‘대학 설립이 한중관계와 중미관계, 그리고 중국의 과학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조선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냐’는 김 총장 말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종교인으로 나름 세상의 선(善)을 위해 산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난 돈벌이를 위해 중국에 왔는데 이분은 자기 재산을 털어 동포를 돕겠다고 하니 부끄러웠다. 그 자리에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며 시작한 게 25년이 됐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연변과기대는 1992년 9월 개교했다. 한중수교가 한 달 전인 그해 8월에 이뤄졌으니 한중수교의 교육 분야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원래 2년제 전문대로 개교했다. 그런데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1년 후인 1993년 중국 정부에서 4년제로 격상해줬다. 연변과기대엔 조선족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유학을 오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도 온다. 재일동포, 북한 견습생도 있다. 민족통합 교육캠프 노릇을 하는 셈이다. 한민족 공동체가 실현되는 대학이라 할 수 있다.”

    한 학년에 500명 정도로 전체 재학생은 2000명에 달한다. 한국 유학생도 200명 쯤 된다. 그동안 7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국어로 가르친다.

    “중국의 국제화, 국제 인재 양성의 대표 모델이 된 것은 물론 특히 지역사회 발전 모델로 자리 잡았다. 옌지(延吉)시는 서울을 모델로 도시계획을 수립했는데, 이걸 우리 학교 교수들이 유완 연세대 도시공학과 교수와 함께 만들었다. 훈춘(琿春)에서 나진·선봉으로 이어지는 물류 루트도 우리 학교가 개발했고,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만든 두만강 개발 프로젝트에도 우리 교수들이 참여했다. 세종학당도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연변대와 우리 대학에 만들어지는 등 한중교류와 국제사회 교류협력에 기여하며 중국 개혁개방의 창구 기능을 하고 있다.”

    나진에서 평양으로

    ▼ 평양과학기술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는 1993년 나진에 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남북관계 개선, 민족화해, 민족 동질성 회복,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평양에 대학을 세우는 건 꿈도 못 꾸고 나진을 생각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사랑의교회 옥한음 목사 등이 참여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물밑에서 추진되는 등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를 탈 무렵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도, 북한 정부도 나진에 대학 건립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1994년 공사를 시작하려던 때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모든 게 중단됐다. 게다가 당시 나진선봉개발특구위원장이 비리혐의로 축출됐고, 이와 관련해 김진경 총장도 북한에 40여 일간 구금됐다. 유엔과 미국에서 강력히 항의해 추방 형태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김 총장의 인품을 그때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 곤경을 겪고도 자기로 인해 중국과 북한, 북한과 미국 관계가 악화되는 걸 원치 않는다며 북한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다. 또한 구속될 때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평양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겠다고 썼다. 강제 추방된 후에도 북한 출입이 금지됐지만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을 계속했다. 돈벌이나 정치적, 종교적 목적 없이 순수하게 남북 화해를 바라는 민족애, 인도주의 차원에서 일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게 북한 정부에 신뢰를 줬을 것이다.”

    ▼ 그래도 어떤 계기가 있으니까 북한이 대학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 개혁·개방 현장을 둘러봤다. 그때 중국 지도부가 ‘연변과기대가 중국 사회주의체제 안에서도 국제화 창구이자 조력자 역할을 해 중국에 도움을 주고 있다. 북한도 국제화, 개방화하려면 국제인력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했다. 김 위원장이 곧바로 김 총장을 초청해 나진이 아닌 평양에 국제대학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평양과기대는 평양시내와 대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평양시 낙랑구 언덕에 위치한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에서 학교 전경이 보인다고. 캠퍼스 규모는 가로 세로 1km씩 총 33만 평 부지로 카이스트와 비슷한 같은 규모다. 17동의 건물로 이뤄졌다.

    ▼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나.

    “총 400억 원이 소요됐는데, 소망교회가 중심이 돼 40억 원을 시드머니로 공사를 시작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 해외 교포 사회와 미국 교단 등에서 후원해줬다. 부채도 일부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인 못 가

    2001년 6월 남북한에서 모두 사업 승인이 났지만 개교까지는 8년여가 걸렸다.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던 모양이다.

    ▼ 공사가 늦어진 건 냉각된 남북관계 때문이었나.

    “건설공사는 중국 업체를 활용했다. 공사하면서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공사 기간에 2차례의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남북간 긴장이 높아지고 위기도 많았다. 만약 한국 건설사가 와서 공사를 했다면 중단됐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업체가 하니까 우리가 돈을 제때 못 줘 공사가 멈춘 적은 있어도 남북관계 때문에 중단된 적은 없다. 남북 문제도 양자끼리만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장애가 조금만 불거져도 스톱이 되는데, 중국 카드를 활용하면 남북 갈등을 비켜가면서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09년 9월 1단계 건물 준공식과 개교 행사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이 부총장을 비롯한 한국 측 인사들이 방북해 행사에 참석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2010년 4월 첫 개강(북한은 4월에 신학기 시작) 직전인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결국 개강은 10월로 늦춰졌다. 이후 남북관계가 올스톱되면서 지금까지 한국인은 아무도 못 들어가고 있다.

    “지난해 5월 석사 44명이 첫 졸업했다. 10월엔 학부생 첫 졸업식도 있었다. 그때 두 번 모두 방북 신청을 했는데 결국 못 갔다. 아쉬움이 크다.”

    ▼ 부총장이 학교에 못 들어가면 업무가 제대로 되나.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대외부총장의 주업무가 교수 충원, 후원금 확보, 졸업생들 해외 유학과 인턴 알선 등이다. 물론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김 총장과 교수들이 함께 한다. 평양에 들어가진 못해도 e메일로 업무를 처리하고, 총장이나 교수들이 중국이나 한국으로 올 때 만나곤 해서 학교 상황은 세세히 알고 있다.”

    ▼ 운영비는 얼마나 드나.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연간 최소 30억 원 정도 필요하다. 남북교류 창구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 모두 편견을 갖고 우리를 바라본다.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받는다. 그렇다보니 후원이 많이 줄었다. 솔직히 운영이 힘든 상황이었다.”

    교수들은 모두 무보수로 일한다. 경비도 스스로 해결한다. 자원봉사인 셈이다.

    ▼ 교수들이 모두 외국 국적의 교포이거나 외국인인데,

    “교포가 30여 명이고, 외국인이 40여 명 된다. 원래는 한국인도 가서 가르칠 수 있게 돼 있다. 북한은 지금도 이를 허용한다. 그런데 통일부에서 방북허가가 안 나오고 있다. 통일부의 고충도 이해는 되지만 안타깝다.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 교수들도 가서 가르치면 남북 교류협력이라든지 소통에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여 명 유럽 유학 중

    평양과기대는 현재 컴퓨터전자공학과, 국제금융경영학과, 농생명식품공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석사 150여 명, 학부생 350여 명이 재학 중이다. 지난해 5월엔 의과대학이 신설됐다. 의대 안에 의학, 치의예학, 보건학, 간호학, 약학 등 5개 학과가 들어선다. 치의예와 의학은 올가을부터 개설된다.

    ▼ 학생은 대부분 고위층 자제들인가.

    “그렇지 않다. 김일성대, 김책공대, 원산농대 등에서 2년간 공부한 학생 중에서 시험을 치러 선발한다. 실력으로만 뽑는다. 북한은 어려서부터 영재교육 체계가 잘되어 있다. 그렇게 뽑힌 아이들 중엔 당 간부 자제도 있고 서민층 자제도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나.”

    ▼ 커리큘럼은.

    “학부생은 1년, 석사생은 6개월간 영어만 가르친다. 학부는 2학년부터, 석사는 2학기부터 전공교육을 한다. 커리큘럼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배우는 수준 그대로 한다.”

    ▼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북한 학생들이 국제경제 같은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중국 개혁·개방 영향으로 이미 북한 내부에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을 가르치려니 힘들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배우려는 자세가 돼 있다. 허광일 북한 측 공동총장은 ‘미국이나 어느 나라에서 가르치는 지식도 우리는 배우려는 자세가 돼 있다’고 강조한다. 북한은 지금 국제화에 갈급이 나 있다.”

    ▼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학생들을 해외로 많이 내보내려고 노력한다. 북한이 폐쇄 사회라고 비난만 하면 남북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그들을 국제사회로 끌어냄으로써 사고가 열리고, 스스로 발전의 길을 모색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소통이 되고, 통일이 된다.”

    ▼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나.

    “북한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내 입으로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국인 교수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유학 갔다온 학생들의 말도 듣게 되지 않겠나. 무엇보다 우리 학교는 인터넷이 상대적으로 개방돼 있다. 석사생은 자유롭게, 학부생은 교수 입회하에 공부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다. 김정은 정권 들어서면서 사회도 변하고 있다. 그들은 많이 변하고 있다. 우리가 북한을 보는 시각은 잘 안 변하는 것 같다.”

    ▼ 성과는 어떤가.

    “20여 명이 유럽에 유학 중이다. 2012년에 처음으로 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에 3명이 갔는데, 2년 코스인 석사과정을 1년 만에 끝냈다. 대학에서 깜짝 놀라 5명을 더 보내달라고 해서 현재 4명이 공부하고 있다. 스웨덴 명문대인 웁살라대에도 3명, 영국 케임브리지대에도 2명이 유학 중이다. 유럽 교환학생 제도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16명이 나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졸업생이 북한 교육성 주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7명은 김일성종합대 교수요원으로 임용됐다. 북한 사회에서 우리 학교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우리 학생들은 북한 국제화 마중물”


    ‘평양의 영어선생님’ 논란

    올 초, 재미교포 수키 김이 평양과학기술대에서 두 학기를 가르친 경험을 담은 책 ‘평양의 영어선생님’이 화제가 됐다.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북한 학생들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이 담겨 얘깃거리가 됐다.

    책 이야기를 꺼내자 이 부총장은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내용이 되다 보니까 학교 운영이 상당히 곤란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느냐”는 질문엔 즉답을 피했다. 북한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 듯했다.

    ▼ 그 책을 읽었나.

    “학교를 보는 시각부터 아쉬웠다. 기독교인이 세운 학교인 건 맞다. 교수들이 모두 교인인 것도 맞다. 북한이 그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절대 종교, 민족문제는 표방하지 않는다. 종교 목적으로 설립한 게 아니다. 순수하게 민족 동질성 회복을 기초로 국제화 인력을 육성해 북한의 국제화와 남북한의 소통, 궁극적으로 남북통일과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도록 하는 게 우리 사명이다. 저자가 그걸 잘 알면서도 굳이 선교사가 세운 학교라고 공표했으니 답답한 것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묵인했던 게 공개되니까 북한 측도 난처하게 됐다.”

    ▼ 폐교 이야기도 나왔나.

    “그건 아니다. 북한 정부도 우리 학교가 국제사회 창구 구실을 하고 국제화 인재를 기르는 데 필요하다는 걸, 더구나 북한식 개혁·개방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효용성을 잘 안다. 초기에도 군부에서 체제 위협이 되지 않겠느냐 우려가 있었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미래 사회를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승인했다.”

    ▼ 수키 김이 묘사한 북한은 사실인가.

    “일부는 맞지만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답답한 게, 그 분이 본 것은 초기였다. 우리와 북한 당국이 서로 맞춰가는 중이었다. ‘감시원’이란 표현을 썼던데, 그들도 처음이라 우리의 교육 방식이 체제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서로 잘 적응하고 있다. 처음엔 교수들이 장을 보려면 일주일에 한 번 지정된 백화점에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아무 장마당에나 간다. 안내원이 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북한에서도 우리가 체제를 위협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거다.”

    ▼ 북한 학생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그에 대해 아무 죄책감도 없는 것 같다는 내용도 있다.

    “그건 저자의 시각일 뿐이다.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순 없다. 이질적인 문화가 부딪치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것까지 감안하면서 보듬고 가르치는 게 교육이다. 부정적인 면을 자꾸 노출하고 그게 전체인 것처럼 얘기하면 안 된다.”

    상호 윈-윈 패러다임

    이 부총장은 평양과기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북한이 국제화 흐름을 탈 수 있도록 이끄는 게 우리 대학의 역할이다. 그게 남북 소통뿐 아니라 그들이 실질적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이다. 북한도 국제교류 협력 없이는 경제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런 일을 할 일꾼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학생들이 나중에 남북을 연결하는 통일일꾼이 될 것이다.”

    남북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북한을 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민간교류나 경제협력 인프라 구축은 어차피 통일되면 해야 할 일들이다. 북한의 니즈(needs)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우리의 전략적인 대안을 조화시켜 나갈 때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지, 서로 자기 요구만 고집하면 해결이 안 된다. 물론 퍼주기만 하고 매달리기만 하는 차원은 아니다. 상호 윈윈(win-win)하는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는 남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다자관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을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과 북 당사자끼리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우선 북한을 국제협력을 이끌어내는 파트너로 육성해야 한다. 잘 교육하고 역량을 강화시켜 남북중, 남북러, 남북일, 남북미러 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면 북한도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가는 게 바람직한 한반도 통일 정책이고 동북아국제협력의 길이다. 내가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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