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구 낙마에 상실감, 허탈감
- 국비 확보 난망? “비빌 언덕 사라졌다”
- ‘충청 트로이카’ 붕괴…안희정만 웃는다?
- “안희정 道政 평가 ‘글쎄요’ 수준”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안희정 충남지사.
“안 후보가 대권 후보라는 덕담 몇 마디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중앙의 정치 무대에는 대단히 엄격하고 엄중한 검증 과정이 있다. 수많은 검증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 게 대권 후보다.”
한마디로 ‘안희정이 대권 후보라는 게 가당하느냐’는 말이었다. 이 전 총리는 그러나 이 말이 1년도 되지 않아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2012년 10월 병상을 걷어차고 나온 지 2년 4개월 만에 총리에까지 올랐다가 70일 만에 낙마함으로써 중앙 정치 무대의 높고 단단한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증으로 2012년 1월 입원해 투병생활을 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이 전 총리가 4월 21일 급기야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한 충청권은 안타까움과 허탈감, 배신감, 실망감 등 복잡한 반응을 드러냈다.
“충청도 말투가 핑계라니…”
총리 인준 청문회에서 이 전 총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제기됐을 때만 해도 충청도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청 총리를 지키자’는 반응이었다. 당시 충청권에는 ‘이완구 낙마하면 다음 총선, 대선 두고 보자!’는 현수막이 여럿 내걸렸다. 일부 단체가 이런 현수막을 조직적으로 내건 것 같았지만 충청도민의 당시 정서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보는 게 옳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당시 충청지역 여론조사를 했더니 ‘총리로 적합하다’는 응답 비율이 65.2%로 나타나 다른 지역보다 크게 높았다.
하지만 총리 취임 뒤 성 전 회장의 메모와 언론 인터뷰에 이 전 총리가 등장하자 충청도민들의 정서는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대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42) 씨는 “이거, 이 총리는 안 걸리는 데가 없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여전히 아쉬움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전 총리의 고향인 충남 청양의 이모(52) 씨는 “성 전 회장이 이 전 총리에게 줬다는 돈은 금액이 비교적 적을 뿐 아니라 돈의 성격도 후원금 명목인데 가혹하리만치 공격이 집중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전 총리의 지역구(부여-청양)인 충남 부여의 한 노인정에서 만난 한모(70) 씨는 “그래도 이 전 총리만한 인물이 충청도에 어디 있느냐”고 감쌌다.
하지만 이 전 총리의 잦은 말 바꾸기가 지역민에게 실망감을 준 게 사실이다. 충청도 말투를 핑계로 대자 비판적인 여론은 더욱 비등해졌다. 부여군의 공무원은 “이 전 총리가 위기에 몰리자 충청도 말투 운운하면서 고향 사람들을 마치 어눌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처럼 치부한 것은 비겁했다”고 불쾌해했다.
무너진 대망론
이완구 전 총리가 4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총리 이임식에서 인사하고 있다.
지역 발전의 호기를 놓쳤다는 아쉬움도 있다. 김용찬 충남도 기획조정실장은 4월 30일 추경예산안 브리핑에서 “비빌 언덕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전 총리 사퇴로 국비 확보가 다소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육동일 충남대 교수(자치행정학)는 “충청권이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받고 역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해왔다. 이 전 총리가 이런 불균형을 많이 잡아줄 것으로 기대한 게 사실인데 아쉽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충청도민들의 ‘상실감’과 ‘허탈감’은 다른 어떤 정서보다 강하다. 이 전 총리의 퇴진이 단순히 지역 출신 총리의 낙마가 아니라 ‘충청권 대망론의 붕괴’를 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광기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의혹 공방의 주체인 성완종 전 회장이나 이 전 총리 모두 충청도 사람이라 지역민들이 큰 상처를 받았다. 우선 충청권 원로들이 나서 민심을 추스르고 화합을 다져야 한다”며 ‘집단 힐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집단 힐링은 충청권 대망론 붕괴로 인한 충격을 치유하는 데에도 필요해 보인다. 인물 부재의 충청권에서 그나마 대권에 근접한 정치적 리더가 어렵게 나타나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일거에 무너지는 데서 오는 충격이다.
그렇다면 이 전 총리는 과연 충청도민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최연소(31세) 경찰서장(홍성경찰서)과 최연소 충북경찰청장, 2선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원내대표 등을 거친 그는 호기 넘치는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2년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과정에서 2억 원의 ‘이적료’ 파문(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지원금 명목으로 불법 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에 휩싸이자 2004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 그가 충청도민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2006년 충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다. 이후 이 전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충청도민의 관심거리가 됐다.
“이완구 보면 속 후련했는데…”
충남도지사 시절에 그가 내건 구호는 ‘강한 충남’이었다. 충청도민들은 ‘핫바지’ 같은 극단적 비하와 노골적인 홀대 발언이 나와야 비로소 분개할 정도로 자기 감정 표출을 억제하는 성향을 지녔다. 더구나 오랜 영호남 대권 패권사(史)에서 늘 정치적 아웃사이더였다. 이 전 총리는 당시 충청권 리더이던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전 충남도지사)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보여줬다. 신중하고 기다리는 심 위원장과는 달리 표출(表出)하고 투쟁적이었다.
충남도지사 시절 수도권 규제완화를 둘러싸고 그가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서 설전을 벌이던 광경을 충남도민들은 아주 인상 깊게 바라봤다. 그 무렵 택시를 타면 “지역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지역과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는 이완구 지사를 보면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곤 했다. 가장 충청도답지 않은 방식으로 충청도를 대변해 응어리진 마음을 잘 어루만져 줬다고나 할까.
2008년 세종시 원안(源案) 관철을 요구하며 도지사 자리를 집어던지면서 그의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이 전 총리는 도지사를 그만두면서 2010년 충남도지사 불출마도 선언했지만, 지역 언론은 그를 변함없이 예상 후보에 포함시켰고 그때마다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단연 선두였다. 2013년 4·24 보궐선거에서 이 전 총리는 이 지역에서 김종필(JP) 전 총리나 기록할 법한 80% 가까운 득표율로 당선돼 ‘포스트 JP’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다.
올해 초만 해도 충청권 언론의 지면에는 ‘이완구 대 안희정’이라는 식의 충청 대망론 분석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통(嫡統)을 자임하는 안 지사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대권주자로 분류돼왔다. 여기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여론조사 1위를 차지하면서 세 사람은 충청권 대망론의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이 전 총리가 충청권 지도자의 리더십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일부 언론에서는 이 전 총리를 과거의 정치인으로 분류하듯 ‘포스트 이완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육동일 교수는 “이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새로운 인물을 발굴해야 할 때이며 지역민들도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엄태석 서원대 교수(정치학)는 구체적으로 차세대 인물들을 지목했다. “이번 문제는 이완구 개인의 문제이지 충청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앞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대권주자로 상징성을 유지해 나가느냐가 여부가 관심거리”라는 것.
반기문도 상처
충청권 리더 가운데 성완종 게이트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그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하고도 이 전 총리를 제치고 충청권 맹주라고 불리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반기문 총장도 이번 사태로 커다란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반 총장은 성 전 회장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동생이 경남기업 임원이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대전의 한 인터넷 신문은 이처럼 미묘한 상황에 대해 “지역 정치권 인사들 사이에는 ‘안 지사는 가만히 있는데 자동으로 교통정리가 이뤄진 모양새’라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여기에다 강창희 전 국회의장도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에 들어가면서 세대교체의 불씨를 당겨 이래저래 안 지사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안 지사와 이 전 총리는 정치 경력과 스타일 등에서 사뭇 다르다. 안 지사는 민주화 투쟁 경력을 바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캠프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 전 총리는 행정고시를 거쳐 경제기획원 관료를 지내다 경찰로 전직했고, 치안감(충남지방경찰청장)을 마지막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안 지사는 2010년부터 맡은 충남도지사직이 공적 조직을 지휘하는 리더로서 맡은 첫 공직이다.
보수 텃밭 뚫은 안희정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동생이 경남기업 고문이던 사실이 드러나 '성완종 리스트'의 유탄을 맞았다.
2014년 선거도 여당의 전략 실패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다. 안 지사의 최대 약점 가운데 하나는 자치행정에 서툴다는 점이었는데, 당시 여당은 행정 경험이 없는 정진석 전 국회사무총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은 선거 내내 ‘충남도 청렴도 평가 꼴찌’ 이슈 하나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안 지사 캠프에서는 정 전 총장을 가장 손쉬운 상대, 행정에 정통한 이명수 의원을 가장 버거운 상대로 공공연히 꼽아왔다.
그러나 안 지사의 두 차례 당선이 온전히 상대방의 실수 덕분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너무도 값진 승리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는 2006년 첫 충남도지사 선거 때 1년 전부터 충남의 시군 곳곳을 돌며 차분히 표밭을 다졌다. ‘충남은 보수세력의 텃밭’이라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오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치밀함과 성실함 덕분이었다.
또한 안 지사는 2012년 총선 때 자신의 선거 캠프에 있던 4명을 출마케 해 그중 2명을 당선시킴으로써 보수 텃밭에 야당 깃발을 세웠다. 그는 지난해 6·4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면서 대권의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안 지사는 선거 당시 “지방정부 운영을 통해 나름의 확신이 생긴다면 대한민국 지도자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겠다”며 ‘대망론’에 한발 더 다가섰다.
극단의 평가
그는 젊고 호감 가는 이미지에다 충청권 차세대 정치 리더라는 평가를 이용해 충청 민심을 파고들고 있다. 그는 누군가 충청권 리더의 맥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충청도민의 여망과 기대를 잘 포착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안 지사 측이 가장 주력한 것은 차세대 리더 이미지 부각. 다음은 당시 표심의 포인트를 놓고 고민하던 안 지사 캠프 관계자의 말이다.
“선거를 앞두고 현장 민심을 조사했다. 선술집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살펴 민심의 흐름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어느 술집에서 안 지사에 대한 이야기가 무르익었다.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팽팽했다. 하지만 무리 중 한 사람이 ‘어쨌든 충청도에 차세대 정치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으냐. 안희정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너나없이 동의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안 지사에 대한 평가는 중앙 정치권과 언론에서 훨씬 더 좋은 편이다. ‘동아일보’ 정치부의 한 중견 기자는 “서울에서는 안 지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방 인사들을 만나보면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고 말했다.
안 지사는 도정 운영에서 전폭적인 지지는 받지 못하는 듯하다. 일각에선안 지사가 정치에 매몰된 나머지 지방 행정을 챙기기보다 이미지와 인기 관리에 여념 없다고 비판한다. 안 지사는 2010년 취임 이후부터 2013년 6월까지 외부 특강을 62회 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근무시간에 도정 질의나 국정감사에서 포화를 맞기도 했다. 같은 당의 문희상 의원도 2013년 10월 충남도 국감에서 “특강이 도정 홍보와 주민 소통, 비전 제시 등을 위해 의미가 있지만, 가능한 한 행정수반 역할에 충실해달라”고 주문했다.
안 지사가 외부 특강에 나서기보다 도의회와 관계 개선부터 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새누리당이 다수를 점한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안 지사가 도의회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풀어냈다는 말은 들어보기 어렵다.
“‘훈수 정치’밖에 더해봤나”
안 지사가 추진하는 삼농(三農)혁신과 행정혁신 지방분권 등의 도정 목표와 과제가 다소 추상적인 데다 너무 광범위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보니 “안 지사 덕분에 충남도 공무원들은 편안하다. 명확하게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잘못한다 해도 책임지지 않는 분위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평가를 의식한 듯 이 전 총리는 지난해 4월 정진석 전 사무총장 지원 유세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안 지사가 자신 있게 1등 했다고 한 것이 있느냐. 있으면 내놓아보라고 해라. 지금까지 후배 도지사라서 말을 아꼈는데 이대로 가서는 충청도가 후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 지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전통적 인식 때문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년 후면 필요 없게 되거나 문제점이 드러날 많은 일을 단기 성과만을 노리고 전시적으로 시행해 세금을 낭비하는 경우가 그간 비일비재했기 때문. 충남도의 한 관계자는 “안 지사 시절에는 적어도 그처럼 성과 자체만을 위한 일들은 없을 것”이라며 “그의 도정 목표는 당장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누군가 추진해야 하는 일들”이라고 설명했다.
충남도의 외자 유치 사례를 보면 내실을 위해 고민하는 안 지사의 스타일이 보인다. 충남도 관계자는 “이 전 총리의 지사 시절보다 외형적인 외자 유치 성과는 다소 떨어지지만, 투자 유치가 중도에 무산되는 사례도 적고, 고용 창출과 고도기술 유치 등을 통해 내실을 기한다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 지사는 적절한 시점마다 국가적 화두와 국정운영 철학을 드러내며 전략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줬다. 하지만 공적 조직을 지휘한 경험이 많지 않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1차적 평가는 ‘작은 정부’인 도정 운영 성적에서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성공적인 도정은 그만큼 중요하다.
대권으로 바로 가기에는 정치적인 경력이 일천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안 지사가 외곽에 있는 광역단체장으로서 ‘훈수 정치’를 하고 있지만, 장관 등 직접적인 정책 담당자나 당직을 맡은 국회의원으로서 정치 이슈를 이끌어본 경험은 전무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안 지사가 충청권을 대표하는 리더로 부상할 수 있을지는 향후 정치 리더로서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