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광주항쟁 기록의 진실과 논란

  • 소준섭 |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입력2015-05-21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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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백서’ 베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항쟁 기록들이 ‘북한 책’ 베꼈다고?
    • 극우파 공격받는 ‘찢어진 깃폭’ 원작자 따로 있다
    • 사실 기록한 이들을 ‘간첩’ ‘반역자’로 몰아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시민군이 계엄군에 진압된 뒤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오고 있다

    2011년 ‘신동아’ 1월호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필자가 쓴 ‘광주백서’를 윤문하고 가필하고 베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 보도는 ‘광주백서’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문장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반부는 ‘광주백서’에 전적으로 기댔다. 골간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전개 순서, 디테일이 같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엔 ‘광주백서’ 출간 이후 수집한 내용도 섞여 들어가 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후반부에도 ‘광주백서’ 내용이 그대로 담겼으나 전체 내용의 일부일 뿐이다”(신동아 2011년 1월호)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동아의 ‘광주항쟁 기록’ 보도

    신동아의 치밀한 분석 보도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를 떠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광주백서’를 토대로 해 씌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필자가 1981년 초에 쓰고 이듬해 전국에 배포한 ‘광주백서’는 1985년 전남대 복적생으로서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이재의 씨가 정상용 전 의원 등 광주 운동권의 요청으로 항쟁 기록을 정리할 때 “(‘광주백서’가) 여러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된 기록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집필을 담당한 이재의 씨 증언).” 이재의 씨가 재구성한 그 기록은 광주백서와 글의 전반적인 틀과 구성이 거의 일치했고, 다만 시민군의 광주시내 장악 이후의 내용이 더욱 충실히 보강됐다. 신동아가 분석한 그대로다.



    이렇게 정리된 기록은 이후 풀빛출판사에 넘겨졌고 대중적 명성이나 책의 상업성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황석영의 이름으로 출간하기로 결정됐으며 내용은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서문과 광주 문화운동 그룹의 활동 내용 등이 보강돼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제작됐다.

    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나간채 교수도 그의 저서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중 ‘5·18 기록 출판운동’ 부분에서 ‘광주백서’부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했다.

    필자는 1980년 서울 학원사태 배후조종자로 전국에 지명 수배돼 그해 겨울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1979년 학생시위 사건으로 성동구치소에서 복역할 때 알고 지내던 조봉훈 선배를 만나 함께 살았는데, 그는 광주에서 항쟁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필자가 집필을 담당해 조봉훈이 수집한 관련 자료를 정독했으며 많은 증언을 들었다. 신영일,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등 10여 명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필자에게 증언했다.

    특히 항쟁의 발단이 된 전남대 정문 앞 계엄군과의 충돌은 당시 현장에 있던 박몽구 씨의 자세한 증언을 청취했고, 시민들의 무장 및 이후 중요 과정에 대한 집필 때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접촉해 증언을 들으려 노력했다.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최대한 배제했다. ‘최대한으로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상황을 취재 보도한 동아일보 등 각 신문 기사도 정독해 참조했다. 당시 필자는 복막염을 앓는 등 몸이 쇠약한 상태였지만 막중한 임무임을 깨닫고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광주시내 곳곳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착검한 총을 든 공수부대원을 가득 태운 군 차량이 질주했다. 한마디로 살풍경이었다.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어서 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했다. 그날의 참상이 꿈에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적지 않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하루에 몇 장씩 조금씩 손으로 써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주백서’의 집필을 완료했다.

    바람 새는 골방에 숨어 읽은 책

    ⓛ발단(학생시위 : 5월 18일) ②민중봉기로 발전(시민합세 : 5월 19일) ③ 무장봉기로의 전환(5월 21일) ④전남 민중봉기(시외로 확산 : 5월 21일) ⑤시내 장악 및 자체 조직 과정(5월 22 ~26일) ⑥계엄군 무력진입(5월 27일)으로 주요 내용을 구성했고,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찢어진 깃폭’을 발췌해 실었다.

    ‘광주백서’를 기록할 당시 입수된 자료 가운데 ‘찢어진 깃폭’은 일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비교적 실감 나게 묘사했다고 판단해 4쪽 분량으로 발췌, 백서의 본문 내용과 구분되도록 별도의 부록 형태로 간략히 덧붙였다. 당시에는 아직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민주주의의 횃불은 반드시 ‘광주’로부터 들어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것으로 출발해야 했다.

    ‘광주백서’를 몸에 지니고 서울로 올라온 필자는 1982년 1월 항쟁 기록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수기로 쓴 ‘광주백서’의 원본은 유인물로 제작, 배포된 후에 필자가 지니고 다니다 수배자 신분으로서 너무나 위험해 결국 태워 없애고 말았다). 인천 구월동 고(故) 김근태 선배 아파트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면서 함께 기거하던 박우섭(인천 남구청장), 민종덕(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고(故) 이범영(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박승옥 등 수배자들과 함께 ‘광주백서’를 타이핑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작업하는 등사기는 남대문시장에서 박우섭 선배가 구입했고, 타자기는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필자가 구해왔다. 서울 중구 인쇄골목 지물포에서 종이를 구입, 재단한 후 인천 구월동까지 아픈 몸에도 지하철을 타고 무거운 종이를 운반한 기억이 생생하다. 타자 작업은 민종덕 형이 맡았다.

    추운 겨울 구월동 방에서 재단해 온 종이에 등사기로 일일이 한 장씩 42쪽 팸플릿을 약 120부 인쇄했다. ‘광주백서’ 팸플릿을 완성한 후 필자는 광주에서 제작된 것처럼 꾸미고자 일부러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 현지 우체국에서 원주의 이창복(재야인사) 전 의원 등 20여 명 앞으로 익명을 써서 등기로 발송했다. 뒤이어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서울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들키지 않으면서도 용이하게 배포될 수 있는 장소에 3~5부씩 놓아두었다.

    이 ‘광주백서’ 팸플릿은 배포되자마자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바람 새는 골방에서 비밀리에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광주백서’는 본래 제목도 붙이지 않은 팸플릿이었지만, 사람들에 의해 ‘광주백서’라고 칭해진 것이다. 광주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히 담은 이 팸플릿은 그간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광주의 진실을 복원해 1980년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노도와 같이 타오르게 했다.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얘기

    최근 일부 극우 논객들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특수군 600명이 잠입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일베’라는 얼치기 집단도 헛소리를 하며 젊은 층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극우 논객들은 당시 광주 시가지에서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총을 들고 있던 시민군 사진을 지목하면서 ‘특수하게 훈련 받은 북한 특수군의 체형’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한다.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얘기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1980년 광주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잠입해 활개를 쳤다면 국가 방위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서 당시 최고권력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책임져야 하고, 국방부의 주요 장성 모두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구속돼야 마땅한 일이다. 또한 북한 특수요원 600명이 광주에 침투해 폭동을 조장했다고 주장하려면 주관적 추정과 간접적 개연성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이 요원들의 지휘체계와 내적 구성, 접근방법, 접근로, 광주에서의 활동 내용, 광주시민에게 미친 영향과 효과 등에 대한 사실적 자료를 구체적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참고로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샤록이 1995년 입수한 미국 국무성의 광주항쟁 당시 비밀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광주항쟁에 북한이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염려했고 그것을 방증할 만할 증거와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모니터했는데, ‘개입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광주항쟁 관련 국방성과 군부의 자료를 아직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 자료가 공개되면 북한 개입설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를 공개하기 위한 정부와 민간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한편 앞에 언급한 보수 논객들은 1985년 황석영의 이름으로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북한 책 두 권을 각색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수인이 기록할 경우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중복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작성한 자료와 위의 책 내용에서 동일한 서술 부분이 일부 발견됐다고 해서 북한 책을 각색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필자가 1981년 초 광주에서 기록하고 1982년에 팸플릿으로 제작 배포한 ‘광주백서’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북한의 책들은 1985년이 돼서야 출판된 것이다. 훨씬 뒤에 출판된,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책들을 필자가 베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찢어진 깃폭’ 문건이 북한에서 만들어졌다며 이를 근거로 필자의 ‘광주백서’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북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찢어진 깃폭’ 문건을 쓴 인물은 이미 고인이 된 김건남이라는 광주 출신의 시인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1980년 5월 자신이 당시 광주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광경을 기록해 가톨릭 단체에서 증언했고, 그 제목이 바로 ‘찢어진 깃폭’이었다. 김건남은 1989년 남풍이라는 출판사에서 동명의 책을 ‘김문이’라는 필명으로 공개 출판하기도 했다.

    일부 논객들은 당시 필자가 스물두 살의 애송이였다면서 어떻게 항쟁 기록을 남길 수 있었겠느냐며 반드시 북한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젊은이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에너지야말로 우리 인류를 이끌어온 핵심적인 동력이었다. 필자를 민족시인 김소월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김소월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진달래’를 스물한 살에 썼다.

    역사 왜곡이 현실 왜곡으로

    거듭 밝히지만, ‘광주백서’를 기록하던 당시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과장됐다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긴 내용은 최대한 배제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발행한 ‘투사회보’나 각종 선언문, 재판 기록 등을 꼼꼼하게 정리했고, 이와 동시에 항쟁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다양하게 들었다. 과장된 표현이나 증명되지 않은 소문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은 기록의 가치와 신뢰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결국 군부정권에 이용만 될 뿐이므로 가능한 한 정확성을 기하려 노력했다.

    일부 논객들은 지금도 필자를 비롯해 광주항쟁 기록 관련자들을 ‘남한의 반역자’라든지 심지어 ‘간첩’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필자는 1970년대부터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면서 남한 중심의 통일운동을 주장했다.

    필자는 김범우라는 필명으로 1989년 쓴 ‘실천적 대중운동론’(도서출판 아침)에서 “통일운동은 남한 대중의 의식 및 역량에 기초해야만 하며 아울러 남한 대중의 이익에 봉사해야만 한다. 북한 측 입장을 반영하는 측면이 아무런 매개 없이 노정될 경우, 일반 대중과 심각하게 유리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남한 대중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북한 측 입장을 배제하는 또 하나의 분열적 사고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한 대중을 위한 길은 반드시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통일운동은 오로지 대중적 결집에 의존할 때만이 발전할 수 있다(189~191쪽)”라고 기술한 바 있다.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소준섭

    1959년 전북 출생.

    전주고,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중국 푸단대 대학원 박사(국제관계학)

    현 국회도서관 조사관

    저서 : ‘사기’ ‘제국의 부활- 슈퍼파워 중국과 21세기 패권’ ‘왕의 서재’ ‘소준섭의 정명론’ 등 다수.


    필자는 중국 유학을 했지만 북한과 가까이 위치한 동북 지방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북한 사람들과 만나지도, 대화 한 마디 하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돼온 ‘종북몰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유신 시절부터 체득한 몸가짐이기도 하다.

    역사의 왜곡은 현실의 왜곡을 낳는다. 역사는 주관이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동요돼서는 안 되며, 반드시 진실의 기록으로 구성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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