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엔당 890~910원 오르락내리락
- “1달러당 120엔은 너무해”…아베 정권도 걱정
- 美 금리인상→신흥국 금융불안→엔고원저?
- 엔저 힘입은 日 기업 “글로벌 체력 강화 중”
원/엔 환율 장중 900원 선이 붕괴된 4월 28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일본 엔화의 약세는 2012년 말 아베 신조 정권 출범에 이어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해 대폭적인 양적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가속화했다. 다만 금융완화에 의한 엔저는 다소 주춤해진 양상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12월 5일 1달러당 121엔을 기록한 후 118~121엔의 박스권을 못 벗어나고 있다. 미국이 곧 금리를 인상하고 일본은 금융완화 정책을 추가 단행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달러당 120엔을 넘은 데 대한 경계심리가 강한 것이다.
日 경제성장률 0%
사실 미국의 금리인상 기대가 다소 식은 건 분명하다.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은 0.2%에 그쳤다. 연초의 한파, 서해안 부두의 파업, 셰일가스 및 오일산업의 위축 등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달러화 강세에 따른 무역수지 적자 급증으로 1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수정될 것이란 예측도 있다. 게다가 미국 경제의 성장세 둔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견해가 스멀스멀 나오고 있다. 2분기 성장률마저 0%대에 그친다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금리인상은 지연될 수 있다.
반면 연초 우려되던 신흥국 금융불안은 아직 가시화하지 않아 달러화 강세 현상이 주춤한 상태다. 그리고 엔화에 비해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최근의 경향 때문에 엔/달러로 본 엔저 횡보 속에서 엔저원고 현상이 나타난다고도 할 수 있다.
올 하반기 엔화 환율은 어디까지 추락할까.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아베 정권’이라는 엔저 요인과, ‘달러 강세’라는 엔고 전환 요인이 혼재한 탓이다. 눈앞이 흐릿할수록 ‘맞는’ 지표(指標)를 골라야 한다. 우리가 유념할 지표는 일본은행의 추가 금융완화 가능성,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 등이다.
구로다 총재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 2년간 금융완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물가 상승세가 주춤하고 있어 추가 금융완화에 대한 기대가 줄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금융시장은 일본은행이 아예 기존 목표를 수정할 가능성을 점쳐왔다. ‘물가상승률 2%대’에서 후퇴한다면, 추가 금융완화 필요성이 줄면서 엔저에서 엔고로 전환할 수 있다.
양적금융완화란 일본은행이 시중은행으로부터 일본 국채 등을 매입하고, 현금과 시중은행의 중앙은행 당좌예금으로 구성되는 본원통화를 확대하는 정책이다. 본원통화를 늘리면 일본의 은행들이 융자를 늘려 총통화가 확대되고 경제가 활성화해 자연스럽게 물가도 오를 것으로 기대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엔저 현상이 나타나 수출이 늘고 수입 물가는 올라가기 때문에 물가가 더 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엔저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가 물량 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0% 수준에 그쳤다. 본원통화를 확대했는데도 대출이 크게 늘지 않아 내수가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은행의 물가 상승 유도와 소비세 인상에 따른 물가 상승효과로 2014년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수치상으로는 2%를 넘었지만, 소비세 인상이 실질임금의 감소로 이어져 오히려 소비부진 요인으로 작용했다.
美 금리인상의 양면
일본 정부도 이러한 금융완화 및 엔저 유도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최근 아베 내각의 핵심 참모인 하마다 고이치 전 예일대 교수는 “1달러당 120엔은 구매력평가환율(미일 양국의 물가 수준을 감안한 균형 환율) 측면에서 지나치며, 105엔 수준이 타당하다”고 주장해 주목받았다. 그는 아베 내각 초기부터 엔저 유도 발언을 한 인물이다. 중소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들이 임금을 매년 2% 넘게 인상 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2%대 물가상승률을 계속 유도하는 것은 실질임금의 지속적인 마이너스를 가져오기에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행은 지난 4월 30일 소비자물가 상승률(소비세 효과 제외) 2% 달성 시기를 2015 회계연도에서 2016 회계연도 전반기로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일본은행이 당장 추가 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할 가능성은 낮아졌다. 다만 ‘2% 물가상승률’을 위해 언제든 금융완화에 나설 수 있다는 일본은행의 의지는 여전하다고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미·일 간 금리차를 확대해 단기적으로는 엔저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성장세 둔화로 미국 금리인상 시기는 늦춰졌지만, 하반기에 미 연준이 금리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5월 6일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주가 버블 가능성과 채권 금리 급상승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 경기 둔화로 저금리가 장기화할 것이라고 기대해 채권시장에 자금이 몰린 상황에서 그의 발언에 시장은 충격을 받고 금리가 급상승했다. 하지만 최근 고용 회복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의 성장세 부진이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올해 중 금리인상이 보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국 금리가 인상된다면 미·일 금리차가 확대되고 일본 보험사 등이 미국 채권투자를 확대해 엔저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 금리인상이 신흥국의 금융불안을 야기한다면 오히려 엔고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이다. 즉, 일본은 세계로 자금을 순공급한다. 따라서 신흥국 금융불안이 심화할 경우 엔화는 미 달러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미 달러화는 신흥국 통화에 강세를 보이는 구조다. 미국의 금리인상 시기와 함께 세계 경제 환경 또한 유념해 살펴야 하는 이유다.
저유가 지속되면 엔고 효과
한국 원화는 경상수지 흑자가 누적되면서 채권국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불안이 심화하면 자금 유출과 함께 원화 약세 압력이 발생할 위험성이 여전하다. 따라서 올 하반기 미국 경제 및 세계경제의 호조 속에서 미국 금리인상이 이뤄질 경우 소폭의 ‘엔저원고’ 요인으로 작용하겠지만, 미국 금리인상이 세계경제의 극심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오히려 ‘엔고원저’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2012년 이후 계속되는 엔저 현상을 엔고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요인도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우선 엔저와 함께 국제유가가 급락해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가 축소될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는 지난해 120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적자 규모가 눈에 띄게 감소해 지난 3월에는 19억 달러의 소폭 흑자를 기록했다. 무려 2년 9개월 만의 흑자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막대한 규모로 확대되는 상황에선 이것이 어느 정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올해 일본 무역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내진 않을 것이기에 이것이 엔화 환율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일본 무역수지 적자의 팽창세에 제동이 걸린 점은, 지속적인 엔저 진행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엔화 ‘실수요’ 측면에서 무역수지 적자 감소가 엔화 매입 압력을 팽창시키기 때문이다. 신흥국 금융불안이 발생하면 경제 주체들이 실수요 측면에서 엔화를 선호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제유가 향방이 엔화 환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올 초 1배럴당 40달러대로 떨어진 국제유가는 하반기 이후 회복세를 보이겠지만, 지난해 상반기의 100달러 수준으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저유가는 올 하반기에도 일본 무역수지 적자 개선과 엔고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하락도 엔저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정책 측면에서는 물가 상승률 하락이 추가적인 금융완화를 촉진하는 엔저 요인이지만, 물가 상승률 하락 자체는 실질금리(명목금리-기대물가상승률)를 높이는 효과가 있어 미·일 간 실질금리 차이를 축소해(일본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아짐) 엔고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 경제는 지난해 소비세 인상 충격을 극복하고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 1분기에도 플러스 성장을 해 올 한 해 1% 성장률을 나타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경기의 둔화 속에서도 플러스 성장세를 이어가는 것은 엔저 가속화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엔고 리스크도 고려해야
이처럼 불확실한 여러 변수 때문에 엔화 환율의 추이를 전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엔저 현상이 이미 2년 이상 지속됐고 일본 경기의 회복세, 미국의 예상외 성장 부진, 저유가 지속, 신흥국 금융불안 등을 고려할 때 엔저 가속화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구매력평가환율로 본 엔화가 달러당 95~100엔임을 감안해도 지나친 수준의 엔저가 장기화하고 있어 어느 시점에는 급격한 엔고가 발생할 리스크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금융정책이 엔저를 부채질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어 엔고 진행에도 어려움이 있다. 결국 극단적인 요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엔저 요인과 엔고 전환 요인이 서로 견제하며 당분간 엔화 환율은 1달러당 120엔 전후의 좁은 박스권에서 등락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일본 경기 회복세가 이어지고 무역수지 적자가 감소하면서 엔저에 제동이 걸리는 한편, 미국 금리인상이 신중하게 이뤄져 미·일 간 실질금리차를 크게 변동시키지 않고, 신흥국 금융불안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리스크 회피 성향이 한정적으로 강화돼 오히려 엔고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을 고려해 일본은행이 하반기에 추가 금융완화에 나서 엔고 진행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일본은행은 하반기에 ‘2016년 초반 2% 소비자물가 상승’ 목표 달성을 위해 추가 금융완화를 단행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엔저 효과는 지난해 가을 추가 금융완화에 비해 낮을 것이다.
엔저 가속화에는 서서히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분간 엔저 기조는 이어질 것이기에 일본 기업과 경합하는 우리 산업은 엔저 장기화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일본 기업의 수출 단가와 물량 추이를 보면 과거 엔저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자동차 등 수송기계의 수출물가가 엔화가 떨어진 만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기준 수출물가지수(계약통화 기준)는 2012년 12월과 대비해 수송기계는 3.1%, 전기기계는 4% 하락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에 엔화 가치가 44%나 하락한 점과 비교하면 일본 기업이 가격 인하에 소극적임을 알 수 있다. 수출물량지수도 3월 기준 98.9에 그쳐 리먼 브라더스 쇼크 이전인 2008년 상반기 113.7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일본 기업의 차별화 전략
이번 엔저 환경에서 일본 기업들은 과거처럼 저가격 경쟁에 나서기보다 수출물가를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하며 수익성 확대에 주력, 차세대 분야를 개척하거나 글로벌 생산체계 확충에 매진하고 있다.
일본 전자산업의 경우 인프라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 기업들과 차별화한 전략을 강화하는 추세다. 재생의료, 로봇산업, 우주 관련 비즈니스, 에너지 솔루션 등 차세대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2013년 이후 중단한 공장 신설을 재개, 멕시코와 중국에 새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 여파로 세계시장에서 한일 제품 간 경합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엔저 장기화로 우리의 대일 수출 부진이나 일본인 관광객 감소 현상이 당분간 크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