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한국 여자골프가 세계 최강인 이유

  • 이강래 | 헤럴드스포츠 대표 altimus@naver.com

    입력2015-05-20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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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언론은 요즘 경외심을 갖고 한국 여자골프를 지켜본다.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11개 대회 중 9개 대회에서 한국 또는 한국계 선수들이 우승했다. 특정 국가 선수들이 이처럼 투어를 ‘장악’한 것은 처음이다. 한국 여자골프는 왜 이렇게 강한가.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박인비가 5월 LPGA투어 노스 텍사스 슛아웃에서 아이언 샷을 하고 있다. 그는 이대회에서 우승했다.

    박인비(27·KB금융그룹)는 5월 4일 미국 텍사스 주 어빙에서 열린 LPGA 투어 노스 텍사스 슛아웃에서 15언더파 269타로 박희영(28·하나금융그룹), 크리스티 커(미국)를 3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올 시즌 LPGA 투어에서 박인비·김세영(22·미래에셋), 그리고 세계랭킹 1위인 한국계 리디아 고(18·뉴질랜드)가 각각 2승을 올렸다. 최나연(28·SK텔레콤), 양희영(26), 김효주(20·롯데)도 한 차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지난해에도 한국(계) 선수는 LPGA에서 16승을 거뒀다. 올 시즌엔 LPGA 대회가 22개 남아 있어 한국(계) 역대 최다 우승이 점쳐진다.

    ‘코리안 런(Korean Run)’

    매주 발표되는 롤렉스 월드랭킹 100위 안에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국가 역시 단연 한국이다. 무려 34명. 500위 안에도 147명으로 가장 많다. 5월 현재 세계랭킹 10걸엔 한국 국적 선수가 3명 포진해 있다. 2위 박인비와 4위 김효주, 8위 유소연(24·하나금융그룹)이다. 20걸엔 8명이 있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코리안 런(Korean Run)’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투어를 뛰는 한국 선수들도 신바람이 난다. 김효주는 3월 JTBC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했다. 올해 미국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고 있는 김세영, 장하나(23·비씨카드), 백규정(20·CJ오쇼핑)도 부친과 함께 투어생활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말 박세리와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같은 ‘LPGA 투어 1세대’가 미국 프로골프에 처음 도전했다. 그때와 지금 상황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1세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여자 프로골퍼들에게선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난다.



    이들은 세계의 벽이 높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이들은 1세대 선배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축적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미국 진출 전략을 수립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꺾기 위해 체계적으로 훈련했고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또한 영어, 외국 음식, 미국 문화에 대한 적응까지 마쳐 경기 외적인 스트레스를 원천봉쇄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효주, 김세영, 장하나다.

    김효주는 지난해 9월 프랑스에서 열린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베테랑 캐리 웹(호주)을 상대로 역전우승을 거뒀다. 마지막 18번홀에서 4.5m 거리의 만만찮은 버디 퍼트를 넣어 승리했다. 웹이 해야 할 플레이를 19세 소녀가 해낸 것이다. 웹의 낙승을 점치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깬 이변이었다. 웹은 1995년생인 김효주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1990년대 말 아니카 소렌스탐, 박세리와 함께 LPGA투어에서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통산 41승을 거뒀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김효주의 대담함에 흔들리며 마지막 홀에서 치명적인 칩샷 실수를 범했다.

    웹은 3월 JTBC 파운더스컵 때 기자에게 “김효주는 완벽하게 게임을 지배했다.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은 결코 요행이 아니다”고 털어놨다. 김효주가 미국을 대표하는 강호 스테이시 루이스와 우승 경쟁을 펼치기 직전에 한 말이다. 웹은 루이스가 아닌 김효주의 우세를 점쳤다. 그 예상대로 김효주는 미국 본토 첫 경기에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김세영도 미국에서 멋진 스토리를 쓰고 있다. 김세영은 자신의 데뷔전이자 시즌 개막전인 1월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예선탈락한 뒤 다음 주 퓨어실크 바하마 LPGA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유선영, 아리야 주타누간(태국)과의 연장전에서 거둔 승리다. 하루하루 다른 게 골프라지만 일주일 새 ‘컷오프’와 ‘우승’이라는 극과 극의 결과물을 내놓은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김세영은 4월 하와이에서 열린 롯데 LPGA 챔피언십에서도 ‘거함’ 박인비를 상대로 극적인 연장전 승리를 거뒀다. 연거푸 나온 ‘칩인 파’와 ‘샷 이글’은 실력이 뒷받침된 행운이었다.

    어머니 사망보상금으로 골프

    많은 골프 전문가는 ‘코리안 런’의 비결로 가족의 헌신, 대기업의 후원, 산악지형인 한국 골프장에서의 단련을 꼽는다.

    이와 관련해 한국 여자골프, 그 도도한 흐름의 발원지인 박세리 신화를 먼저 살펴보자. 1997년 외환위기 때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지켜본 한국인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또한 골프채 하나로 큰돈을 벌고 스타덤에 오르는 신세계가 열린 것에 고무됐다. 내 딸을 ‘제2의 박세리’로 만들려는 현대판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여기엔 가족의 헌신이 필연적으로 뒤따랐다. 박세리의 성공 뒤에도 가족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세리는 아버지 박준철 씨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린다.

    신지애, 박인비, 최나연, 김세영, 장하나, 김효주도 그 길을 따라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프로선수가 되기까지 선수당 보통 8억~10억 원이 투자된다. 이 정도 돈은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라도 딸의 골프에 ‘올인’ 해야 쏟아부을 수 있는 금액이다. 없는 집안에서 이렇게 뒷받침한 사례도 많다. 큰 빚을 지기도 한다. 신지애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보상금으로 골프를 했다.

    돈도 돈이지만 부모는 자신의 시간도 딸에게 바쳐야 한다. 자신의 삶이 희생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성공한 여자 골퍼 중 부유층 출신은 박지은과 한희원 정도다. 이렇게 집안의 모든 게 투자되다보니 ‘내가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다짐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연습벌레가 되고 독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많은 한국 여자 골퍼에겐 ‘병참’ 개념으로 아버지가 투어에 따라붙는다. 김효주는 부친, 한국인 캐디, 로드 매니저를 대동한 채 LPGA 대회를 누빈다. 딸은 훈련과 경기에 집중하고 나머지 일은 아버지가 해결하는 분업 시스템이다. 가족이 함께 다니면 경비가 많이 든다. 그럼에도 ‘골프 대디’가 유행하는 것은 ‘상금을 더 따면 된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김세영이 4월 LPGA 투어 롯데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요즘 LPGA 투어에선 한국 기업 이름을 내건 대회가 자주 열린다.

    가족에 대한 고마움, 성공에 대한 의지는 골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강한 정신력’으로 이어진다. 한국 여성 골퍼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놀라운 집중력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좀처럼 스코어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좋은 성적으로 직결된다.

    여성 골퍼의 부모와 코치도 평소 정신교육을 중시한다. 이를 가리켜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그릇된 풍조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이런 트레이닝에 힘입어 LPGA 챔피언 조에서 세계적인 강호들과 붙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다. 올 시즌 몇 차례 한국 선수들과 벌인 우승 경쟁에서 패한 미국의 스테이시 루이스는 “한국 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나고 정신력이 강하다. 기복 없이 치는 모습에 놀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다시 박세리로 돌아가보자. 그의 성공 뒤엔 대기업의 후원이 있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성공 포인트다. 오직 부모의 재력으로만 이뤄지던 골프선수 육성에 기업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훨씬 호전됐다. 주니어 시절 대회에서 6승을 거둔 박세리는 급(級)이 다른 자원이었다. 이를 눈여겨본 삼성은 박세리를 전폭 지원했다. 전담 팀을 만들었고 박세리의 부모와 언니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삼성은 ‘피겨 여왕’ 김연아를 키운 것처럼 ‘골프 여왕’ 박세리를 탄생시킨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정환식 당시 삼성물산 세리팀 팀장은 “국내 말고 세계에 내세울 대형 선수를 발굴하라는 윗분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공주 금성여고 3학년이던 박세리는 프로 전향과 함께 일본에 진출하려 했다. 부친 박씨는 처음엔 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일본 진출 후원사까지 나선 마당이라 이를 번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삼성 ‘윗분’의 지시

    1996년 삼성 로고를 단 박세리는 하반기에만 4승을 거두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평정했다. 그는 이듬해 일본이 아닌 미국으로 갔다. 그해 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공동수석으로 통과했다. 그러나 신인 시즌인 1998년 초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언론은 삼성에 대해 ‘무모한 투자’라고 비판했다. 삼성 내부에서도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메이저 대회인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까지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잠정 철수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코너에 몰린 박세리는 신들린 듯 괴력을 발휘하며 골프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메이저 대회인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연속 석권하며 세계 골프계에 충격을 줬다. 이후 제이미 파 크로거 클래식과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에서 우승을 추가했다. 시즌 4승을 거둬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LPGA 투어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박세리가 유일했다. 나이도 20세에 불과했다. 올 시즌 17세의 나이에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를 능가하는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10년 뒤 LPGA 투어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45명으로 늘었다. 2008년 미국 골프전문지 ‘골프월드’의 에릭 아델손 기자는 박세리를 ‘개척자’로 부르며 “타이거 우즈 못지않게 골프의 얼굴을 바꾼 인물”로 기록했다.

    삼성의 박세리 후원은 선수에게도, 기업에도 대성공이었다. 이후 대기업의 여성 골퍼 후원은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올해 LPGA에서 뛰는 한국 여성 골퍼 중 상당수는 하나금융그룹, 미래에셋, SK텔레콤, 롯데, CJ오쇼핑, 비씨카드, KB금융그룹 같은 대기업 후원사의 로고가 새겨진 골프복이나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이러한 재정적 지원이 선수의 기량 향상과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국 여성 골퍼가 세계 무대에서 맹활약하면서 이들은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광고효과가 높아지니 이들에게 대기업 후원이 쉽게 붙는다. 이러한 후원으로 이들의 경기력이 유지되고 있다. 일종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대기업은 특정 선수 후원과 별도로 자사 이름을 내건 LPGA 대회에도 적극적으로 돈을 썼다. 삼성은 LPGA투어의 프리미엄 이벤트인 삼성월드챔피언십을 오랜 기간 개최했다. 올해 LPGA 투어를 후원하는 한국 기업은 4개다. KIA 클래식, 롯데 챔피언십, JTBC 파운더스컵, 하나외환 챔피언십이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대회다. 국산 골프공 업체인 볼빅은 2부 투어인 시메트라투어 볼빅 챔피언십의 타이틀 스폰서다.

    이런 점은 한국 선수들의 자신감 고취에 직결된다. 한국 기업들의 후원은 한국 선수들을 투어 내에서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 격상시켰다. 정신력 게임인 골프에서 이런 뒷받침은 경쟁 상대인 외국 선수들에게 ‘한국 선수들을 괄시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도 전달한다. “한국 선수들은 골프 기계이며 돈만 벌어간다”는 조롱은 더 이상 LPGA 투어에서 들을 수 없다.

    한국의 자연환경과 기후도 한국 여자 골퍼의 경쟁력을 높였다.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엔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난코스 골프장이 많다. 페어웨이의 폭이 대체로 좁다. 티샷이 조금만 빗나가면 아웃 오브 바운스(OB) 구역에 떨어져 그날 게임을 망친다. 두 번째 샷이 OB 구역으로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다보니 우리 선수들은 ‘똑바로 멀리 치기’에 능하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신지애는 ‘분필선(Chalk line)’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올해 우승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박인비, 김효주, 김세영 같은 주요 선수들의 페어웨이 적중률은 75%를 상회한다.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올해 LPGA 투어 1승을 올린 최나연(왼쪽)과 LPGA에서 신인으로 뛰는 장하나.



    산악지형 코스 많다보니…

    사계절이 뚜렷한 것도 약점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린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는 훈련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대부분의 선수가 따뜻한 나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이때 집중적으로 레슨을 받는다. 이런 점은 스코어를 줄이는 데에 유리한 한국 특유의 맞춤형 훈련과 이어진다. 겨울 전지훈련 때 보통 코치 2~3명에 선수 15명 정도가 한 팀을 이룬다. 개인 특성에 맞는 일대 일 훈련이 가능하다.

    한희원의 부친 한영관 리틀야구연맹 회장은 “한국 골프 지도자들은 스윙 연습과는 별도로 근력운동이나 체력훈련을 많이 시킨다. 덕분에 선수들이 어린 나이에도 골프에 필요한 근육이 만들어진다. 외국 선수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한다”고 말했다.

    박세리는 세계적인 교습가인 데이비드 리드베터와 함께 1년간 치열하게 LPGA 투어를 준비했다. 박세리는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리드베터 아카데미에서 사흘간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어니 엘스 같은 유명 남자 선수들만 봐주던 리드베터는 “박세리는 스윙과 체격이 남자 같다”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1년만 가르치면 LPGA 투어에서 5승은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대신 단서를 달았다. 훈련받는 1년 동안은 절대로 대회에 나가지 말라는 것.

    15만 달러에 리드베터와 코치 계약을 한 박세리는 지옥훈련에 돌입했다. 오전 6시 기상해 오후 11시 취침 전까지 시곗바늘처럼 움직였다. 훈련, 라운드, 그리고 영어 공부가 생활의 전부였다. 식이요법도 병행했다. 체지방을 빼기 위해 밥은 먹을 수 없었고 닭가슴살 위주로 식단을 짰다. 탄산음료도 금지됐다. 고깃집에 가면 3~4인분을 해치우는 대식가이던 박세리는 6개월 만에 8kg을 뺐다. 대단한 절제력이자 집념이었다. 리드베터의 예언은 적중했고 박세리는 1998~99년 2년 연속 4승씩을 올렸다. 2001년과 2002년엔 각각 5승씩을 거뒀다.

    ‘힘이 아니라 타이밍’ 자각

    골프계엔 “연습을 당할 장사는 없다”는 말이 있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도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를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선수들의 성공은 엄청난 연습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인도어 연습장엔 밤늦도록 공을 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자동 티업기 덕분에 반복적인 스윙 훈련이 가능하다. 한국 선수들의 스윙 메커니즘은 어느 나라 선수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편인데 이런 연습 환경과 무관치 않다. JTBC골프 박원 해설위원은 “아이가 처음 골프에 입문하면 힘으로 친다. 그러다 이런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훈련하면 ‘스윙은 힘이 아니라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좋은 지도자들, 국가대표 육성 시스템, 인기 높은 KLPGA 투어, 두터워지는 선수층도 강점이다.

    기성세대 골프 지도자는 주로 경험에 기초해 도제식으로 교육했다. 반면 요즘 젊은 지도자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한다. 지도자 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도자만 살아남는다. 아이들은 골프에 입문해 스윙 자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런 경쟁력 있는 지도자를 만나게 된다. 서양인은 골프를 레저로 여긴 나머지 필드에서 대충 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인은 연습장에서 레슨부터 받는다. 즐기는 것보다 잘하는 쪽에 집중하는 것이다. 요즘엔 체력훈련부터 정신교육까지 코칭이 분화했다.

    상당수 한국 지도자는 이제 해외 유명 지도자에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은 면도 있다. 해외 지도자의 경우 레슨비가 비싸고 지리적 접근성이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 스윙에 관한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는 통역으론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중국은 한국 골프 지도자들의 경쟁력을 높이 사 꾸준히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 한연희 전 한국 골프 국가대표 감독은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 싹쓸이 신화를 일궜다. 김효주라는 걸출한 스타도 육성했다. 중국골프협회는 한 전 감독에게 중국 국가대표팀을 맡기려 했으나 대우 문제로 의견이 갈려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 골프 지도자가 영어나 중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한다면 골프 티칭도 ‘한류산업’이 될 수 있다.

    대한골프협회의 국가대표 육성 시스템은 한국여자골프의 기틀이다. 이 시스템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주니어 상비군과 국가 상비군, 국가대표 등을 연령대별로 따로 둬 어려서부터 ‘이기는 골프’에 익숙하게 했다. 주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을 모아 합동훈련을 시키고 승강(昇降)제를 통해 치열한 경쟁을 유도한다.

    국가대표에 발탁되면 매년 국제대회에 보내 세계무대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게 한다. 거의 모든 주니어 골퍼는 태극 마크를 선망한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긍심도 크지만 성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돈도 덜 든다. 협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훈련 및 프로그램 비용이 선수에겐 무료다. 유니폼과 장비도 지원받는다.

    한국 남자골프가 부진한 이유

    쇼트게임에서 세계 정상급에 밀려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2015 프레지던츠컵이 열리는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

    한국 남자프로골프는 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같은 세계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할까. 몇 가지 원인이 지적된다. 무엇보다 미국과 비교하면 선수 층이 얇다. 심지어 한국프로골프(KPGA)는 한국여자프로골프에 비해서도 흥행에 뒤처진다.

    그리고 우리 남자 선수들은 미국·유럽 남자 선수들에 비해 아직 체력적 열세에 있는 것으로 비친다. 체력은 집중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초체력의 열세는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자연히 드라이버나 아이언, 퍼팅에서 자잘한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우리 여자 선수들은 서양 여자 선수들과 체격이나 체력에서 대등하다.

    골프 환경도 우리 남자 선수들에게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천연 잔디 위에서 놀면서 골프를 배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천연 잔디가 깔린 구장은 찾기 어렵다. 한국인은 플라스틱 매트 위에서나 기량을 쌓아야 한다. 오랜 기간 체득된 것과 속성으로 배워서 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결정적으로 쇼트게임의 열세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드라이버 비거리 같은 롱게임에서 우리 남자 선수들이 서양 선수들에게 뒤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롱게임에서 우리 남자 선수들은 서양 선수들과 기량이 대등한 편이라고 한다. 세계 정상으로 가는 길에 놓인 가장 큰 문제는 오히려 짧은 거리의 아이언 샷이나 어프로치 샷, 퍼팅 같은 그린 주변에서 벌이는 쇼트게임이라고 한다.

    아시아인으로서 유일한 메이저 대회 챔피언인 양용은은 “한국 선수들이 쇼트게임에서 서양 선수들에게 크게 뒤지진 않는다. 하지만 1, 2타 차이로 우승자가 결정되는 게 PGA 투어다. 미국의 버바 왓슨은 장타자이면서 쇼트게임도 잘한다. 놀이 삼아 골프를 하면서 본능적으로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한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김형성이다. 2014년 1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PGA 투어 소니 오픈 때 김형성은 최종 라운드에서 미국의 매트 쿠차와 맞붙었다. 김형성은 18홀 동안 쿠차에 8타나 뒤졌다. 쿠차가 4언더파, 김형성이 4오버파였다. 김형성은 “롱게임에선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쇼트게임에서 큰 격차가 있었다. 나는 그린을 놓치면 보기를 범했지만 쿠차는 어떻게 해서든 파 세이브를 했다”고 말했다.

    “골프장 회원 반발 때문에…”

    특히 PGA 투어는 페어웨이나 그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긴 풀에 공이 잠겨버리는 깊은 러프로 유명하다. 반면 LPGA 투어에선 메이저 대회를 제외하면 깊은 러프로 무장한 코스가 많지 않다. 이에 따라 PGA 투어에선 더 정교하고 다양한 쇼트게임 실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선수들은 이런 환경에서 골프를 익혀 러프에서 탈출할 다양한 기술을 갖고 있다.

    반면 한국의 골프장에선 미국처럼 깊은 러프를 조성하기 어렵다. “골프장 회원들의 반발 때문”이라고 한다. 한 골프장 관계자는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지만 내장객들의 불만으로 중단해야 했다”고 말했다. 깊은 러프가 없다보니 선수들도 이에 대비한 기술 습득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따로 연습할 환경도 마땅치 않다. 연습 그린에서 어프로치 연습을 하면 프로라도 쫓겨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최경주(8승)와 양용은(2승), 배상문(2승), 노승열(1승) 같은 한국 선수들은 PGA 투어에서 우승했다. 이들의 우승이 값진 이유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본토 선수들을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남자골프의 현재와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오는 10월 인천 송도의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에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2015 프레지던츠컵’이 열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 안방에서 열리는 큰 대회임에도 인터내셔널팀에 자력으로 출전할 한국 선수가 아직 한 명도 없다. 남자 선수들은 여자 선수들처럼 세계 골프의 주류로 자리 잡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한국 남자골프가 이런 문제들을 이겨낼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 조만간 세계 정상에 다시 도전할 것으로 믿는다.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3월 LPGA 투어 혼다 타일랜드에서 우승한 양희영이 공동 2위 이미림으로부터 맥주 세례를 받고 있다.

    승강제로 동기 부여

    1978년부터 시작된 이 시스템을 통해 박세리, 김미현, 강수연, 장정, 한희원 같은 1세대는 물론 정일미, 신지애, 안선주, 서희경, 최나연, 이미나, 지은희, 허미정, 김인경, 유소연, 이미림, 박희영, 이미향, 양수진 같은 2세대를 지나 김효주, 김세영, 백규정, 장하나, 이정민, 전인지, 고진영, 김민선 같은 3세대에 이르기까지 LPGA 투어와 KLPGA 투어를 주름잡은 대다수 선수가 태극 마크를 달았다. 요컨대 10대 시절부터 태극 마크를 향한 치열한 승부 끝에 살아남은 소수 정예가 해외에 진출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정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KLPGA 투어의 활성화도 글로벌 경쟁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자국 투어가 발전해야 좋은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또 자국 투어 대회 수가 많아야 훈련량도 늘고 실전 기량도 향상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 KLPGA 투어를 주름잡은 정일미 호서대 골프학과 교수는 “과거엔 대회 수가 적었다. 샷 감이 좋을 때 출전할 곳이 없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반면 2015년엔 투어가 16주 연속 열린다. 경기 수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선수들의 기량도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KLPGA투어 대회 수는 1998년 7개에서 2015년 27개로, 상금 규모는 같은 기간 7억8000만 원에서 184억 원으로 비약적으로 많아졌다. 메이저 최다승에 빛나는 전설적인 골퍼 잭 니클라우스는 골프장 설계 업무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국 여자골프 투어엔 3부 투어까지 있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전 세계에서 3부 투어가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승강제는 동기 부여에 유리하다. 이제 KLPGA 투어의 정상급 선수들이 LPGA 투어에 진출해 정상을 노리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김효주와 김세영, 장하나, 백규정이 대표적 결과물이다.

    ‘멘붕 없는 근성’ 체화 ‘똑바로 멀리 치기’ 단련 ‘이기는 골프’ 익숙
    이강래

    1964년 서울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스포츠서울 골프팀장, 골프다이제스트 베스트코스 패널

    現 해럴드스포츠 대표, 2015 프레지던츠컵 컨설턴트

    골프칼럼 ‘그늘집에서’ 15년 연재


    좋은 재목감이 지속적으로 몰려드는 것도 청신호다. 남자아이는 축구나 야구를 선호하는지 모르지만 여자아이는 단연 골프를 좋아한다. 외모나 체격이 뛰어난 여자아이가 장래 희망으로 골프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주니어 대회 시상식에 가보면 덩치 큰 여자아이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들은 20대에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고 한국이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고 있는 만큼 기회도 상대적으로 넓다고 본다. 골프의 우아한 이미지가 한국 여성의 취향에 잘 맞다는 점도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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