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각지서 ‘토지 문학 기행’차 통영 찾은 사람들
번역 말미 ‘끝’ 입력하자 쏟아진 눈물
“20권 완독하고 나니 온통 토지 생각으로 충만”
“토지를 읽으며 인생을 배웠습니다”
거장 박경리가 다진 땅에 피어오른 한강이라는 결실
일본에서 온 박경리 작가의 팬들. [허문명 기자]
곧이어 관광버스 한 대가 도착했고, 일본인 30여 명이 버스에서 내렸다.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들이었다. 도쿄, 후쿠오카, 구라시키, 사이타마 등 일본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전날 김해공항에 내려 KTX를 타고 통영에 와서 하루 묵고 오전 일찌감치 일정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에서 한국문학과 책을 번역해 출판하고 있는 쿠온(CUON)의 김승복 대표가 기획한 ‘토지 문학 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쿠온은 재일한국인 김 대표가 2007년 일본 도쿄에 설립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다. 구원, 즉 영원을 뜻하는 단어의 일본어인 쿠온은 ‘좋은 것은 오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김 대표는 2015년 도쿄 책방거리로 유명한 진보초(神保町)에 한국 서적 전문 북카페 ‘책거리’를 열었다. ‘새로운 한국문학 시리즈’ ‘한국문학 명작 시리즈’ 등을 기획해 120여 종의 한국문학을 일본어판으로 선보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신경림, 구효서, 김연수, 김중혁, 박민규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10년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묘지 앞에 선 일본인 팬들. [허문명 기자]
이들은 모두 자기 돈을 내고 행사에 참여한 평범한 일본의 생활인들이었다. 통영의 멸치조림과 한국식 반찬으로 맛있게 점심 한 끼를 먹은 이들은 바로 박경리 기념관과 묘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버스로 20여 분 달려 내린 산양읍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은 이곳 출신인 작가를 기념하고, 소개하는 공간이다. 쪽 찐 머리와 수수한 한복 차림의 젊은 시절 모습과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한 당시 모습, 6·25 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살던 시절의 사진들이 관람객을 맞았다.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일본인들의 얼굴이 진지했다.
선생이 묻힌 곳은 기념관 뒤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통영 앞바다가 펼쳐진, 누가 봐도 따뜻하고 안온한 곳이었다. 각자 일본어판 ‘토지’ 한 권씩을 들고 올라온 참가자들은 무덤 앞 묘비에 한 권씩 놓고 묘지를 빙 둘러쌌다. 식당에서의 설렘과 떠들썩한 분위기가 금세 경건함으로 바뀌었다.
곧이어 김 대표가 마치 살아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걸 듯 옷매무새를 여미고 묘지 앞에 섰다.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꼭 10년 전이었던 2014년에 ‘토지’를 번역하겠다고 찾아왔었습니다. 이번에 10년 만에 약속을 지켰습니다. 선생님과 토지를 사랑하는 일본 팬들과 함께 왔습니다.”
일본어판 ‘토지’ 제2번역자 시미즈 사치코 씨가 번역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문명 기자]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여기서 인사드린 것이 2016년 가을이었으니까 8년 만이네요. 그때 막 간행한 일본어판 ‘토지’ 1권과 2권을 묘소 앞에 바치고 반드시 20권 모두를 완역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기억하고 계십니까? 너무 늦어서 더는 오지 않을 거라고 반쯤 체념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사히 완역해 오늘 여기에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약간 흔들렸다.
“저는 번역하면서 몇 번이나 울었어요. 천애 고독한 신세가 된 어린 서희의 모습에, 용과 월선의 애틋한 사랑에, 봉순을 생각하는 주석의 애틋한 마음에, 주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정말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이 난 것은 올해 번역 원고 마지막에 ‘끝’이라고 박았을 때였습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약 10년, 몇 번이고 좌절할 것 같은 저 자신을 달래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고 또 성원을 받으며 달려온 날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동시에 이제 더는 ‘토지’라는 작품을 번역할 일이 없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제부터는 독서 모임 등을 통해 독자 여러분과 선생님을 만나겠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다시 기다려주세요.”
토지 완역은 일본 사회에 큰 질문 던지는 일
다소 숙연해진 분위기를 걷어내기라도 하듯 김 대표가 무덤을 죽 둘러선 일본 팬들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토지의 독후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18권까지 읽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3, 4대에 걸친 이야기라 한국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는 큰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도쿄에 돌아가 19권, 20권을 읽을 생각을 하니 설렙니다.”
“저는 20권 모두를 읽었습니다(박수가 터져 나왔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매력적입니다. 한분 한분이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게 대단합니다. 인물 하나 하나가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그들의 비극적 삶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감정이입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석해 감개무량합니다.”
“책거리 쿠온의 팬입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서점에 들러 한국 책을 삽니다. 운이 좋으면 김승복 대표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번역자도 만나 ‘다음 토지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20권 나온 시기를 꼽아보니 어떤 해는 건너뛰기도 했고, 18권 다음에 19권은 13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완간은 정말 쉽지 않았다고 짐작됩니다. 중간에 김 대표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순조롭지 않은 여정을 끝냈다는 게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20권 완독을 하고 여기에 와서 지금 머릿속에 온통 ‘토지’ 느낌으로 충만합니다. 밤이라도 새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독서 모임을 꼭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토지’ 완역은 일본 사회에 큰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1945년 8·15광복이 되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그 의미를 일본 사회에 던지고 있습니다. 독서 모임이나 연구회를 통해 그 질문들에 답을 찾고 싶습니다.”
일본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심 어린 후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맨 마지막 독자의 말에 분위기는 다시 명랑해졌다.
“19권까지 읽었습니다. 토지를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저는 요즘 한국의 민요를 배우고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에게 새타령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바현에서 왔다는 가지타 사토로 씨가 한국어로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며 새타령을 시작하자 웃음과 박수가 번졌다.
이들은 박 작가가 통영 앞바다를 내다봤다는 곳에서 “토지” “바다” “박경리”를 외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유쾌함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진하게 녹아들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가랑잎 구르는 소리만 나도 웃는다는 말은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작은 농담에도 까르르 웃음 짓는 모습이 마치 소년 소녀들처럼 순수해 보였다.
“번역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어요”
다음 행사장은 숙소인 거북선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묘지에서 ‘토지’ 헌정식을 한 뒤 오후 4시경 이어진 행사에 모인 이들은 150명으로 늘었다. 소설가 강석경·공지영 씨도 함께했다.
이번 행사의 주인공은 토지 완간의 주인공인 번역자와 이들을 조율한 편집자였다.
일본어판 ‘토지’ 편집을 맡았던 후지이 미사코 씨. [허문명 기자]
“10년 전 김 대표로부터 편집을 맡아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작은 출판사가 과연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까, ‘토지’는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이고 편집을 맡는다는 건 그의 작품이 일본 내에서 평가를 받는 중대한 책임을 맡는 일인데 내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열정 어린 설득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전의 박경리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고도 했다.
“한일문화교류 심포지엄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2000년대 초반 박 선생이 참여하는 심포지엄에 참여해 그의 연설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아하면서 아름답고 힘이 있는 그 존재감에 압도됐습니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행사가 끝나고 한국의 여성 작가들이 한꺼번에 그를 둘러싸고 마치 여신처럼, 어머니처럼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후배들로부터도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이미지가 ‘토지’ 완간 작업에 늘 힘이 돼줬습니다.
저는 ‘토지’에서 보여주는 삶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습니다. 나라와 인종을 넘어선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또 나약하고 추한 인간 내면의 모습, 그리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담긴 표현에 매료됐습니다. 그러면서 어느덧 번역자들의 원고를 기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됐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토지 등장인물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돼 아쉽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10년을 끈 번역 작업을 놓지 않고 버틴 번역자들의 말을 들을 때면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일본어판 ‘토지’의 제1번역자로 이름을 올린 요시카와 나기 씨. [허문명 기자]
‘조선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을 비롯해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고한용과 동료들’이란, 한국 사람도 잘 모르는 근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평전 작업도 하고 있다. 그가 무대에서 서자 객석에선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경리 선생 살아 있다면 ‘애썼다’ 할 수 있도록
요시카와 씨는 나지막하면서도 힘찬 목소리로 번역 과정을 찬찬히 회고했다.
“‘토지’는 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완역된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서 한국 책은 물론 한국 물건들조차 잘 팔리지 않던 시절 신흥 약소 출판사가 완역을 한다니 사운(社運)을 건 무모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역자에게도 무거운 일이었습니다. 김 대표가 의뢰해 왔을 때 거절했는데 다시 몇 달 뒤 전화가 오는 집요함에 결국 수락하고야 말았습니다. 1권이 너무 힘들어 괜히 맡았다고 후회하면서 일했습니다(웃음).
협의 끝에 공역을 하기로 하고 1권을 제가, 2권을 시미즈 씨가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번역문에 사용하는 용어나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번역어, 표기 방법, 등장인물 이름들을 정리해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토지에는 경상도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사투리가 나오는데 이걸 일본 사투리로 대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번역문은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하고 원문이 현대의 표준 문법을 벗어나도 일본어는 정연한 문장으로 다듬기로 했습니다. 작품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중엔 성(姓)과 이름이 같은 사람들도 있어 가타카나, 히라가나, 한자로 달리 써서 혼란을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토지는 단편이 아니라 대하소설이기 때문에 글 자체가 어렵다면 그렇지 않아도 생소한 외국 소설을 누가 20권이나 읽을까 이런 생각으로 독자들이 읽는 것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번역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살아 계셔서 이번 번역을 보신다면 ‘애썼다, 괜찮다’라고 하실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완간했다고 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책은 읽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많은 일본 독자들이 줄을 서고 의외로 재미있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 겨우 일을 끝낸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바로 직전 추모공원 묘지 앞에서 섰던 제2번역자 시미즈 씨는 이번에는 밝은 얼굴로 무대에 섰다. 그는 마지막 번역 작업을 한 원주 토지문학관에서의 추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024년 8월 3주간을 토지문학관에서 보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자 후배들을 위해 만든 레지던스 시설입니다. 지금까지 100여 명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숙식하며 창작에 전념했다고 들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고, 밤에는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입니다. 저는 텃밭에서 키운 야채들이 풍성하게 제공되는 식사를 하며 번역을 끝냈습니다. 햇수로 10년입니다. 때로 숨이 차서 힘들었지만 완주를 한 마라토너 심정입니다.
토지문학관은 곳곳에 박 선생의 시가 있고, 글 쓰는 후배들을 위해 마치 자식을 돌보는 엄마처럼 직접 밭을 갈고 된장과 간장을 만들며,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후배들을 뒷바라지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문학관에 있는 동안 한국의 여성 작가들과 어울려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놀기도 했습니다. ‘토지’의 마지막 20권째에 나오는 히로시의 장녀, 상의가 다니는 고등여학교 기숙사 같았습니다. 이해 관계없이 그냥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런 친구들을 만난 게 너무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원주에서 3주 동안 박경리를 느꼈다고 할까요. 토지를 번역하면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5년간이나 토지를 쓰면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해 온 작가의 모습처럼 끈질기게 뭔가를 계속 묻는 것의 중요성도 깨달았습니다.”
번역이라는 고도의 언어 창작 작업을 하는 사람들답게 한마디 한마디에 삶과 글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통찰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인상적이었다.
한강은 지진 와도 묵묵히 글 쓸 사람
이번 행사는 마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각별해 보였다. 한강의 수상은 ‘토지’ 같은 현대문학사 거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특히 우리에겐 잊히고 있는 명작 고전이 꾸준히 번역돼 국경을 넘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뿌듯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일본인들도 한강 작가의 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모두 자기네 일처럼 기뻐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탔어야 했는데 아쉽다” 같은 말은 듣지 못했다.
휴가를 내고 행사에 참여했다는 일본의 한 신문사 여기자의 말이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 문학이 한국문학입니다. 과거에는 ‘한국’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었는데, 한강 작가의 수상을 계기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K-팝, K-드라마에 이어 K-문학이 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흰’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를 모두 읽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제주4·3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노벨상을 타서 너무 기뻤습니다.”
이번에는 파트타임으로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50대 중년 여성의 말이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었습니다. 몇 번 읽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노벨상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막 박수를 치고 좋아하니까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정도였습니다.”
기념식의 마무리는 한일 참석자들이 모두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문학이 이어주는 정신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출판사 ‘쿠온’의 대표 김승복 씨. [허문명 기자]
쿠온은 2007년 설립 이래 일본에 한국문학을 알려오며 조명을 받아왔다. 그는 2011년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120여 종의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출판해 왔다. 그와는 한강 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토지 완간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강이 범람을 해서(웃음) 토지가 쓸려가고 있다”며 비유적인 농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쓸려가다니?
“주문이 쇄도해 정신이 없어요. 일본에선 전화나 팩스로 주문이 오는데 연휴여서 인쇄소가 쉬는 바람에. 한국은 24시간 풀가동이죠. 일본은 그렇게 못 해요.”
뭐가 인기 비결일까요.
“이렇게 자기들에게 친근감이 있는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처음이라고들 해요. 이미 일본에는 한강 씨 작품이 7권이나 번역돼 있고, 그중에 저희가 네 권을 했는데 이미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노벨상이 늦게 안 거지요(웃음).”
4·3이나 5·18도 그렇고 ‘채식주의자’ 같은 경우에는 어쨌든 표현도 그렇고 한데 일본 사람들이 여기에 공감하나요.
“한국적 감수성이다, 일본의 감수성이다 이런 게 아니라 그녀의 세계관이 독특한 거죠.”
어떤 점에서요?
“우선 문체가 너무 아름답잖아요.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 같은 구성도 그렇고요.”
그는 출판사 대표로 가깝게 작가를 대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작가로서 어떤 사람인가요.
“세상에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몰려와도 앉아서 소설을 쓸 사람 같아요.”
좀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써낼 수 있는 사람, 소설가로서 몰입하고 그 세계관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 이런 느낌이죠.
그녀는 인간의 아픔, 슬픔 이런 것을 치유하는 에너지 치유사라고 생각하고 글을 써요. 자신의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광주나 4·3은 상처받은 사람, 아픈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가져온 배경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역사적 무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나 실존, 아픔에 대한 천착, 그리고 그 아픔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아지고 나아갈 수 있을까 소설을 쓰는 이유를 그거라고 생각해요.”
소설로 그게 가능해요?
“공감하고 어루만지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지금 독자들은 강력한 메시지나 답을 원하지는 않아요. 답을 찾는 우리들의 과정을 고민하는 거죠. 어떤 독자들은 ‘이게 뭐야’ 하겠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걸 원하는 거 같아요.”
박경리가 다진 땅에 피어오른 귀한 한강
약간 다른 질문이긴 한데 사람이 유명해지면 권력화되잖아요. 돈도 많이 벌면 변질되고. 또 내가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좋아할 거야 하면서 독자들 입맛을 맞출 수도 있고. 한강 작가는 어떨까요.
“저는 변치 않을 사람이라고 봐요. 한강 작가는 구호나 표어를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난 9월에 서울에 있는 한강 씨 책방에서 만났어요. 저희 출판사에 한강 씨 앞으로 편지가 왔는데 1년 전에 친구 같던 남편을 잃은 70대 일본인 여성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힘을 얻었다며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온 거예요. 제가 서울로 배달을 간 거죠. 한강 씨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주던지요. 저는 일본어로 번역해서 독자에게 드렸습니다. 제가 출판사 사장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메신저라는 걸 실감했어요.”
작가는 뭐라고 답장했나요.
“당신의 슬픔이 물결처럼 나한테 전해진 것 같다. 그리고 삶에서 이어지는 것들이 기적 같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주 좋았어요. 그런 작가를 이렇게 가까이 알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이죠. 문학에 경계가 없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이번에 한강의 수상으로 많은 작가들이 자극을 받아서 또 좋은 작품 쓸 거고, 독자들은 그 좋은 작품들에 또 감동할 거고,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질 생각에 굉장히 기뻐요. 제가 한국문학을 알리려고 10년을 해왔는데 한강 작가가 한꺼번에 이뤄놓은 것 같아요. 직원들하고 ‘이제 우리는 일 안 해도 되겠다’ 농담도 했을 정도였어요(웃음).”
‘토지’를 연결고리로 다양한 사람을 만난 통영행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국경을 넘어 새로운 세계와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문학의 힘을 곱씹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강의 성취가 한국 근대문학의 박경리 같은 거장이 뿌리고 다진 땅에 피어오른 귀한 결실이라는 생각에, 한국문학의 뿌리를 이참에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