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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경제성장 이끌고도 권력층 부정부패로 망신

중국 공산당 독재의 명암

눈부신 경제성장 이끌고도 권력층 부정부패로 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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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시라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의 부정부패와 권력암투가 공개되고 있다.
  • 천광청 사건은 인권을 억압하는 중국 당국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
  • 눈부신 경제성장, 막강한 군대, 한족(漢族) 중화주의가 중국 집권세력의 기반. 그러나 공산당 일당독재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예전처럼 단단하지 못하다.
일당독재가 중국의 힘이다?

로마클럽 회원인 요르겐 랜더스는 5월 8일 ‘2052년, 향후 40년의 글로벌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에서 랜더스는 2052년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의 주도권을 쥘 것이며 그 힘은 중국의 일당독재 체제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정부가 단기적인 정치적 계산과 유권자의 양분 같은 요인으로 대처를 잘 못하는 사이에 중국 정부는 민주적 절차에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고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보고서가 이목을 끄는 이유는 로마클럽이 갖는 중량감 때문이다. 로마클럽은 1968년 창설 이후 각 분야 핵심 인사들이 참여해왔다.

‘베이징이 워싱턴 대체’ 분위기

세계경제계에서는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가 화두다. 이 말은 타임지 기자 출신으로 칭화(淸華)대 겸임교수를 한 조슈아 쿠퍼 라모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용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대외경제 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사회주의 관치경제에 기반을 둔 대외경제 전략을 말한다. 베이징 컨센서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관련이 깊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른 미국과 유럽이 금융위기로 허덕이는 와중에 중국 경제만 활황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의 주인도 바뀌는 중이다. 2010년 4월 25일 세계은행은 증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 돈은 대부분 중국 쪽에서 나왔다. 이 결과 중국의 세계은행 지분은 2.77%에서 4.42%로 높아졌다. 독일을 제치고 미국, 일본에 이어 3위로 부상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세계은행 부총재 자리도 차지했다. 린이푸(林毅夫) 부총재가 베이징 컨센서스의 전도사로 알려진다. “미국은 저물어갈 것이고 중국은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경제를 주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린이푸의 지론이다. 미국 정부의 추천으로 총재가 된 한국계 김용 박사의 가장 주된 업무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베이징 컨센서스를 조율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렇다면 정말 베이징 컨센서스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할까? 얼마 전까지 시계추는 베이징 쪽으로 옮겨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워싱턴의 버티기도 만만치 않았다. 확장된 워싱턴 컨센서스는 경제체제를 넘어서 정치체제의 변화까지 유도하는 내용이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가능하려면 정치 제도와 문화도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면에는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정치적 민주화를 원한다’는 가설이 자리 잡고 있다. 서유럽과 미국, 한국의 역사발전 과정이 그랬다. 반면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치체제의 변화엔 침묵한다. ‘각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 군주제를 하건 민주제를 하건 관심이 없다’는 투다.

사회주의의 본산인 구소련이 붕괴한 탓인지 중국 정부는 자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보인다. 사회주의의 국제적 확산에 열을 올리던 구소련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직은 수성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앞으로 힘이 더 커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중국식 사회주의 개혁개방 모델을 다른 나라에 이식하려들 가능성, 그 모델을 잘 따르는 국가 순으로 줄을 세울 가능성이 엄존한다고 봐야 한다.

승천하는 용의 발목을 잡다

그러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것 같던 베이징 컨센서스는 안방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 혁명 주체가 세대를 거듭하는 사이 어떻게 초심을 잃어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민과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쳤던 그들이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당초의 혁명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건 권력투쟁과 이권 경쟁뿐이다. 공산당 일당독재는 이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전파해야 할 정치체제의 핵심이 내부에서 와해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충칭시 서기 출신인 보시라이는 중국 당·정·군내 최대 파벌 가운데 하나인 태자당의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혁명 1세대의 자녀들로 이뤄진 태자당은 상하이방(上海幇), 퇀파이(團派) 곧 공청단(共靑團·중국공산주의청년단)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을 구성하는 3대 세력 가운데 하나다. 공산당 일당독재라고는 하지만 내적으로는 이렇게 3개 계파가 존재하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권력의 정점인 정치국 상무위원 9인 가운데 하나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이런 그가 사법처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몰락도 이런 몰락이 없다.

태자당은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혁명 1세대 자녀 가운데 1명씩을 고위직에 임명해 덩샤오핑 복권에 기여한 데 대한 보상을 해주자는 아이디어였다. 초기 태자당을 이끌었던 인물은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鄧樸方)이었다. ‘중국제일태자’로 불린 덩푸팡은 1987년 태자당 출신을 모아 캉화(康華)발전총공사를 창립했다. 국무원이 직접 관장하는 기업으로 독점 사업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덩푸팡은 중국장애인연합회 주석으로서 캉화발전총공사 수익금을 연합회 운영 자금으로 활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1988년 덩푸팡이 금융 비리를 저지른 것이 밝혀졌다.

덩푸팡뿐만이 아니다. 1원로 1자녀 원칙에 따라 고위직으로 진출하지 못한 원로의 자녀들은 대부분 이권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사실상 독점으로 사업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신흥부자로 변모했다. 예를 들어 화가인 덩샤오핑의 장녀 덩린(鄧林)은 작품을 고가에 판 것으로 유명하고 인민해방군 현역 장성인 3녀 덩룽(鄧榕)의 남편 허핑(賀平)은 해외 무기거래로 엄청난 재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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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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