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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조직관리의 새 이정표 제시한 ‘아름다운 축구’의 창시자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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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구단에서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중요성 터득

1970년대 중반 알자스의 인기 구단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부임한 힐트는 벵거를 스트라스부르의 2군팀 플레잉코치(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하는 사람)로 초빙했다. 1981년 스트라스부르 구단은 힐트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자 수업을 받은 벵거를 유소년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략, 전술, 선수관리, 언어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지닌 벵거는 구단의 미래 재산인 유소년팀 선수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3년 AS 칸 구단은 그를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불과 1년 후인 1984년 AS 낭시는 벵거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AS 낭시는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니티 현 유럽축구연맹 회장이 몸담았던 구단으로 유명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리그에서 우승컵도 차지했지만 벵거가 부임할 당시 성적은 당장 2부 리그로 강등될지도 모를 정도로 나빴다. 게다가 초짜 감독의 능력을 반신반의한 구단은 돈이 없다며 벵거의 선수 영입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선수도 없고, 돈도 없는 구단의 감독인 벵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적 시장에 나온 저가의 유망주들을 발굴하는 일뿐이었다. 새벽까지 유망주들의 플레이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틀어보고 전술 및 선수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에도 쉬지 않았다. 여전히 AS 낭시의 성적은 별로였지만 구단주가 돈 한 푼 내놓지 않은 하위권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벵거의 능력은 프랑스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구단 AS 모나코는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AS 낭시 구단주는 1부리그 잔류 정도의 성적을 원했지만 AS 모나코는 프랑스리그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었다.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키우는 벵거의 능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프랑스에 넘쳐나던 아프리카 출신 유망주에 불과하던 라이베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 조지 웨아는 벵거의 휘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며 1990년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 1995년에는 세계축구협회(FIFA)가 수여한 올해의 선수상까지 탔을 정도다. 팀 성적도 좋았다. AS 모나코는 1987~88년 프랑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국제전에서도 벵거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간 프랑스 구단들은 유럽 최고의 클럽들이 겨루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클럽에 비해 우수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벵거가 이끄는 AS 모나코는 1993~94년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 다소 치중한 나머지 그 다음해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94~95년 시즌 초반 극심한 성적 부진에 시달린 AS 모나코는 벵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일본에서 새로운 지도자상 정립

그간 쌓아올린 좋은 평판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은 벵거가 AS 모나코와 비슷한 명문 구단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벵거는 세계 축구계의 변방인 아시아, 게다가 당시 일본 내에서도 무명 클럽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 직을 택했다. 학구열이 높고 호기심이 많은 벵거는 이제껏 살아온 환경과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해보고 싶었고, 축구에 관한 견문도 넓히고 싶었다. 비록 유럽 축구보다 떨어지는 리그지만 일본 축구에서도 분명히 뭔가 배울 게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벵거는 절제된 사생활과 음식 습관, 엄격한 선수관리,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리더에게 복종하는 일본 스타일에 매료됐다. 나고야 그램퍼스의 오너인 도요타 그룹은 그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벵거 이전 리그 하위권이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1995년 시즌 일왕컵에서 우승했다. 1921년 시작된 이 경기에서 나고야가 우승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다음해인 1996년 시즌에는 정규리그 2위 및 슈퍼컵 우승을 이뤘다. “사람들은 내가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아줬다.” 벵거의 말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벵거의 행보를 비웃는 사람이 많았지만 벵거의 일본행은 축구 감독으로서 그의 이력을 상당히 독특하게 만들었다. 20개월간 벵거가 일본에서 이뤄낸 성과는 곧 일본 밖으로 퍼졌다. 세계 각국의 명문 구단이 그를 주시했다. 아스날, 토튼햄, 스트라스부르 등이 물밑 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자 벵거는 아스날을 택했다. 그의 성과에 흡족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계약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벵거를 풀어줬다. 1996년 10월 벵거는 아스날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

괴짜 감독, 영국 축구계에 새바람을 불어넣다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이 영국 런던에 있는 전지훈련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변방에서 세계적인 구단의 감독으로 금의환향했지만 벵거 앞에 놓인 현실은 참담했다. 아스날의 미드필더 폴 머슨은 술과 코카인에 중독됐고 부인과도 이혼해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다른 주전 선수인 토니 애덤스, 레이 팔러 등도 음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아스날뿐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구단은 대부분 선수들의 음주 문제를 눈감고 모르는 척했다. 벵거는 “술과 축구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당장 맥주 금지령을 내렸다. 과자, 햄버거, 적색 육류 등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는 선수들에게 찐 생선, 닭고기, 삶은 채소 등을 먹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선수들은 기름이 줄줄 흐르는 베이컨과 소시지, 튀긴 생선, 짠 맥주, 설탕이 가득 든 커피 등을 즐겼기에 벵거의 지시를 못마땅해하는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주장 애덤스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내가 왜 브로콜리를 먹어야 하느냐”며 징징대는 선수도 나왔다. 점핑 훈련인 플라이오메트릭스에 대한 반발은 더 심했다. 힘과 기동성 향상을 위해 고안된 플라이오메트릭스는 벵거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파리의 대중스포츠교육센터(CREPS)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을 때부터 시도했던 훈련법이다. 벵거는 자신이 몸담는 구단마다 근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이 훈련법을 시도했지만 영국 축구계에서 이를 도입한 지도자는 드물었다. 고참들은 “축구 선수인 우리가 왜 에어로빅을 해야 하느냐”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감독의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고참 이언 라이트는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거리람”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고참들이 반발하건 말건 벵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영양사, 정신과 의사 등과 선수들의 체력, 정신력을 향상하는 프로그램 개발에도 매진했다. 선수들에게 과음을 피하고 휴식과 수면을 충분히 취하도록 하면서 규칙적인 식사와 체계적 훈련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팀을 만들겠다는 벵거의 전략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영국 축구계에서 이는 대대적 혁신이었다. 요즘이야 선수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술과 흡연 등을 자제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선수단 관리가 주먹구구였다는 뜻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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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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