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베일 속 500억대 삼성 채권의 ‘꼬리’

대선 후 베트남 잠적한 채권 매입자, 여권 인사 측근설 제기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5-12-15 11:1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삼성이 사들인 800억원대 채권 중 2002년 대선 당시 여야 정치권에 뿌려진 자금을 뺀 나머지 500억원대 채권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검찰은 30대 최모씨가 삼성 채권 일부를 매입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베트남으로 출국한 뒤 검찰의 귀국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최씨가 여권 모 인사의 측근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 1년8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삼성 채권 정치권 추가 유입 논란의 최근착 정보를 추적했다.
    베일 속 500억대 삼성 채권의 ‘꼬리’

    2003년 12월15일 오전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대검찰청에 자진 출두해 불법 대선자금 조사를 받은 뒤 이날 저녁, 귀가하고 있다.

    삼성채권은 실체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휴화산’이다. 그러나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렇게 볼 만한 정황이 몇 가지 있다.

    삼성 고위 관계자들이 2004년 3월 대검 중수부에서 한 진술을 종합해보면, 2002년 대통령선거 직전 이건희 삼성 회장은 ‘개인 재산’으로 1000만원권, 500만원권 1종(만기5년) 국민주택채권 900억~1000여 억원어치를 사들였다. 만기 20년인 2종 채권도 섞여 있었다. 액수는 정확하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에서 자체 파악해 삼성으로부터 확인받은 규모가 그 정도라는 것이지, 대선(大選) 전 삼성측이 실제 매입해 사용한 채권이 전부 얼마인지는 삼성만이 안다”고 말했다.

    삼성의 컨트롤타워인 구조조정본부 간부들의 주도로, 삼성 직원 최모씨, 김모씨 2명은 대선 전 명동 채권시장에서 국민주택채권을 매입했다. 삼성은 이 채권을 대선자금으로 활용했다. 검찰 조사 결과, 100억~200억원의 채권은 대선자금과는 무관하게 증권예탁결재원에 예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나머지 800억원대 채권이 문제가 된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삼성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에게 300억원의 채권을 줬다. 2002년 5~6월경 만기 5년짜리 국민주택채권 40억원, 같은 해 7~8월경 만기 5년짜리 국민주택채권 10억원, 같은 해 11월 만기 5년짜리 국민주택채권 250억원 등이다.

    “쓰고 남은 건데 가져가세요”



    이회창 후보는 “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책임이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은 40억원의 현금은 별도로 건넸다. 서 변호사는 쓰고 남은 채권 138억원어치는 대선 후 삼성에 돌려줬다.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에 착수한 뒤였다. 돌려준 과정을 삼성 간부는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2003년 11월 초순경 검찰에서 대선자금 수사를 본격화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서정우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용건은 말하지 않고 그냥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서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갔더니 ‘대선 때 쓰고 남은 것인데 가져가세요. 진작에 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대선 때 저희가 준 채권을 쓰고 남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받아가지고 와서 열어보니 쇼핑백 안에 채권이 138억원어치 들어 있었습니다.”

    삼성은 2002년 7월경 안희정씨를 통해 노무현 후보 진영에도 15억원어치의 채권을 줬다. 한나라당에는 5년 만기 국민주택채권을 줬지만, 안희정씨에겐 20년 만기 국민주택채권을 줬다. 검찰 수사 결과 안희정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인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통해 이를 현금화해 노무현 대통령 채무 변제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은 이와는 별도로 15억원의 현금을 노무현 후보측에 제공했다. 민주당 후원회를 통해 10억원의 현금을 내기도 했다.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에게도 15억원 상당의 삼성 채권이 전달됐다.

    검사, “삼성이 쩨쩨하게 30억?”

    현금은 빼고 채권만 놓고 본다면 삼성이 매입한 800억원대 채권에서 300억원(이회창 후보 진영에 전달), 15억원(노무현 후보 진영에 전달), 15억원(김종필 총재에 전달)만 용처가 나온 셈이다. 남은 470억원대(액수가 딱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언론에선 편의상 ‘500억원대’로 보도) 삼성 채권의 행방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800억원 중 330억원이 불법 대선자금으로 쓰인 사실이 확인된 만큼 나머지 채권의 용처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수사를 맡았던 검찰도 “삼성이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에게 준 금액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삼성이 노무현 후보측에 추가로 채권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수사 검사가 삼성 간부를 상대로 심문한 내용을 봐도 이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검찰에서 채권유통과정을 추적한 결과, 삼성그룹이 사채시장에서 구입한 국민주택채권 15억원 상당이 노무현 대통령이 운영하는 생수회사 장수천의 리스 채무 변제자금으로 유입된 사실이 최근 확인되자 삼성그룹에서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민주당이나 노 캠프에 제공한 무기명 채권이 이 15억원 상당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요.…

    노무현 캠프나 민주당 관계자들도 2002년 11월25일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이후 상당한 정치자금이 들어왔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삼성그룹이 대선자금을 안주면 몰라도 주면서 이렇게 쩨쩨하게 겨우 30억원밖에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국민이 그 말을 믿을 것으로 생각하나요.”

    2004년 5월21일 대검 중수부는 대선자금 수사를 마쳤다. 수사가 종결된 지 18개월이 지난 2005년 11월 현재까지 잔여 채권의 사용처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삼성에 그대로 보관돼 있는지 아니면 모두 제3자에게 건네졌는지, 일부는 보관돼 있고 일부는 제3자에게 건네졌는지, 제3자에게 건네졌다면 그중 정치권이 포함돼 있는지의 여부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여전히 채권의 행방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삼성측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명동시장에서 채권을 매입하도록 지휘한 삼성 박재중 상무가 암으로 사망했고, 채권을 매입한 삼성 직원 2명은 해외로 출국했다. 두 사람 중에서도 채권 매입을 주도한 직원 최모씨는 2005년 초 귀국한 뒤 잠적했다. 일부 언론은 “최모씨를 조사하면 남은 삼성 채권의 용처가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최근 검찰은 최씨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최씨가 어디까지 진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찰은 800억원 규모의 삼성 채권의 일련번호를 대부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대검 중수부는 증권예탁결재원의 관련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이 계좌에 있는 삼성 채권에 대해 수사에 나섰다. 삼성 채권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재개된 것이다.

    삼성 채권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국민주택채권 유통과정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민주택채권은 1종의 경우 만기가 5년이다. 수익률은 은행이자보다 조금 높은 편이다. 이 채권은 민원인이 여러 가지 인·허가를 받으면서 의무적으로 구입해 유통되기도 한다.

    국민주택채권은 1000만원권 등 고액권이기 때문에 거액을 주고받을 때 현금보다 간편하다. 이는 지난 대선 때 LG가 냉동차까지 동원한 ‘차떼기’로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을 현금으로 건넨 데 견주어 삼성은 국민주택채권으로 한나라당에 250여 억원을 ‘간편하게’ 전달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이 채권은 개인과 개인의 거래, 개인과 기관의 거래를 통해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 개인 A가 다른 개인 B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국민주택채권을 팔고 그 대가로 현금을 받을 경우 A에 대한 신상정보는 거래당사자인 B만이 알 수 있다. 즉, A의 처지에선 B의 입만 막으면 완벽하게 자금 세탁이 되는 것이다.

    “430억원어치는 추적 가능”

    그러나 국민주택채권의 또 다른 특징은 현금만큼 완벽하게 출처조사를 피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개인이 증권사 등 금융기관에 이 채권을 예치하거나 매도할 때 금융기관은 들어온 채권을 증권예탁결재원에 맡기며, 이 경우 해당 개인의 신상정보 기록이 당국에 남는다(증권예탁결재원은 소유주별로 채권을 구분해놓진 않는다).

    이에 따라 검찰은 삼성 소유이던 채권의 일련번호를 미리 파악해둔 뒤 그 일련번호의 채권 가운데 일부가 증권예탁결재원에 들어갔음을 확인하고, 누가 그 채권을 증권예탁결재원에 맡겼는지를 조사하는 절차를 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즉, 증권예탁결재원으로 입고된 삼성 채권의 경우 입고 직전 소유주의 신상은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유주를 상대로 누구로부터 채권을 구입했는지 역추적해가면 대선 이후 해당 삼성 채권의 유통경로, 정치권 인사 포함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조사는 채권 한 장 한 장에 대한 일종의 저인망식 뒤지기여서 많은 노력이 투입돼야 한다. “내게 채권을 판 사람의 신원을 모른다”고 하면 추적이 더는 불가능해져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증권예탁결재원에 입고되지 않은 삼성 채권의 경우엔 검찰이 일련번호를 알고 있다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베일 속 500억대 삼성 채권의 ‘꼬리’

    지난해 5월21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리무중인 500억대 삼성 채권 중 증권예탁결재원에 입고된 채권, 즉 출처 규명의 가능성이 그나마 남아 있는 채권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이 부분에 대해 검찰 이상으로 관심을 두는 곳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용처가 확인되지 않은 삼성 채권 중 430억원어치의 경우 증권예탁결재원에 입고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증권예탁결재원이 제출한 입고자료를 통해 확인했다는 것. 권 의원은 “검찰은 입고자가 누구인지, 그 입고자가 누구로부터 삼성 채권을 매입했는지에 대해 역추적 수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비공개로 “출처조사가 가능한 삼성 채권은 매우 소액”이라고 밝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 의원의 주장은 이 같은 검찰 발표와는 상당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법 등 현행법상 검찰만이 삼성 채권 유통자를 조사할 수 있다.

    앞서 권 의원은 “증권예탁결재원에 입고된 삼성 채권 중 23억원어치 402장은 대선 직전인 2002년 10월부터 대선 이후까지 현금화됐다. 대선자금인지, 당선축하금인지를 규명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검찰이 ‘쪼면’ 삼성이 버티겠나”

    이런 가운데 삼성 채권 유통자 중 일부가 검찰에 포착됐다. 최근 검찰 관계자는 “삼성 채권이 최모씨라는 사람(명동시장에서 삼성 채권을 매입한 삼성 직원 최모씨와는 다른 인물)에게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확인된 규모는 1억원 미만이라고 한다. 최씨는 그후 출국해 현재 베트남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최씨측에게 조사에 응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최씨는 응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최씨가 여권(與圈) 모 인사의 측근이라는 설이 나오고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해 한나라당에선 “답답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검찰이 삼성을 제대로 ‘쪼면’ 삼성이 과연 버틸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채권 번호까지 다 나왔으면 채권 사용처를 진실되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의 의지가 관건이다. 검찰은 지금처럼 의혹이 커지게 놔두지 말고 ‘명세가 이러이러해서 정치권엔 전혀 안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는 식으로 진상을 속시원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이런 반응에는 “(삼성이) 한나라당에 준 채권에 대해선 다 불어놓고…”라는, 삼성에 대한 불만이 한 자락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삼성이 2002년 하순 집중적으로 사들여 사용한 800억대 채권은 2007년 말쯤 만기가 된다. 그때쯤이면 현금화 과정에서 소지자 신원 등 새로운 단서가 상당수 밝혀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그러나 채권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선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 같은 은밀한 일에 무기명 채권을 활용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면 채권 만기 때 들통나도록 어수룩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기다리기만 해선 진실을 밝힐 ‘최적의 시기’란 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