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폭풍군단’ 노림수는 다탄두 ICBM 텔레메트리 기술”

[주목! 이 사람] ‘북에서 온 초선’ 박충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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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24-11-2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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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제1고등·김정은국방대 출신 엘리트

    • 국감서 ‘전문가’로 존재감, 6개월 27개 법안 발의

    • 간부 ‘애첩’에게 뇌물 주면 좋은 직장 배치…“환멸”

    • 북한군 파병, 김정은 정권 종말로 가는 단초

    • “자녀 목숨 잃은 北 부모들이 변수”

    • 탈북민 출신 4번째 국회의원, 받은 것 보답하고파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은 탈북민 출신 이공계 인재로 22대 국회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이상윤 객원기자]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은 탈북민 출신 이공계 인재로 22대 국회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이상윤 객원기자]

    1986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평양 제1고등학교 졸업,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국방대) 화학재료공학부 학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부속물 연구개발 참여, 2009년 4월 10일 탈북, 서울대 재료공학 박사,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 22대 국회 초선의원,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전문가….

    몇 줄로 요약한 박충권(38) 국민의힘 의원의 이력 사이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범인들이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널따란 간극이 자리한다. 열 살에 북한을 덮친 식량난으로 굶어 죽는 친구들 곁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고, 북한의 영재들이 한데 모인 고등학교에서는 36등으로 입학해 3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차세대 국방 지도부를 양성하는 국방대에서는 학생 간부를 맡을 정도로 체제에 순응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썩어빠진 중앙당 간부들의 실상을 접한 순간, 국가와 체제를 향한 무한한 신뢰의 끈이 툭 끊어졌다.

    그날로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지 1년 8개월 만인 2009년 어느 봄날 새벽, 두만강을 건넜다. 탈북 브로커가 건넨 이름 모를 한국인 여성의 여권을 손에 들고 사흘간의 목숨을 건 여정 끝에 배를 타고 인천항에 발을 디뎠다. 경찰을 찾아 “북에서 왔다”고 자백한 순간, 그는 다시 열 살로 돌아갔다. 같은 민족의 언어인데 70%는 알아듣질 못해 처음부터 다시 모든 걸 배워야 했다.

    북한에서 영재 소리 듣던 그였기에 빠른 속도로 한국을 배워나갔다. 탈북을 결심한 순간부터 입학을 꿈꿨던 서울대에서 7년간 공부한 끝에 박사학위도 받았다. 동기들은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합격했지만 그는 번번이 취업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현대제철의 한 임원이 그에게 기회를 줬고, 운 좋게 7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올해 1월 4·10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서 인재 영입 제의를 해왔다. 탈북을 결심했을 때만큼이나 깊은 고심을 한 끝에 그는 정계에 발을 디뎠다. 오로지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이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내린 결정이었다.

    1월 8일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위원회 입당 및 영입환영식에서 박충권 당시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에게 당 점퍼를 입혀주고 있다. [뉴시스]

    1월 8일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위원회 입당 및 영입환영식에서 박충권 당시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에게 당 점퍼를 입혀주고 있다. [뉴시스]

    첫 국정감사와 ‘전천후 과방위 전문가’

    입법부에서 제대로 활약하고자 했던 처음의 각오 때문이었을까. 그는 10월 말 기준 대표 법안을 27건이나 발의했고, 10월 국정감사에서는 제대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민주당 의원들이 장악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에 자진해서 들어가 출석률 86%를 기록하며 구글 등 빅테크 ‘갑질’ 문제를 제기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지원 필요성 등 이공계 출신답게 톡톡히 목소리를 냈다. 그 덕에 국정감사가 끝난 뒤 ‘전천후 과방위 전문가’란 평가를 받았다.

    북한의 ICBM 화성-19형 발사, 러시아 파병, 대통령 대국민담화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던 11월 초순, 박 의원을 인터뷰하기 위해 여의도 의원회관을 찾았다. 훤칠한 키, 말끔한 외모와 달리 기력이 없어 보이던 그는 “국감 끝에 감기에 걸렸는데 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곧바로 일정이 몰아쳐 회복을 못 하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상흔을 남긴 첫 국감에 대한 그의 소감이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만 과방위에 ‘방송’이 있다 보니 정쟁의 무대가 돼버리면서 시급한 과학기술 관련 민생 현안이 묻혀서 안타까웠다. 일례로 최민희 위원장 혼자 위원들 평균 질의 시간의 5.4배를 썼다. 또 편파적으로 여당 위원들 입을 막고 질의 시간을 빼앗기도 했다. ‘국민이 주신 시간을 함부로 빼앗을 권한이 위원장에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앞으로 국회가 한 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 가까이 의원 활동하면서 대표 법안을 27건 발의했다.

    “좋은 보좌진을 만난 덕분이다(웃음). 처음 꾸릴 때부터 고심을 많이 했고, 좋은 보좌진을 만나 매일같이 브레인스토밍 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 가장 공들인 법안은 ‘이공계 지원 특별법’이다. 이공계 우수 인재들이 해외로, 의대로 빠져나가는 ‘엑소더스’ 현상이 심각하다.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강국으로 거듭나려면 합당한 법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법안소위에서 통과가 됐고,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걸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불필요한 규제들은 다 완화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발의한 법안들도 대부분 규제를 푸는 법안들이다. 그 일환에서 나온 것이 ‘단통법 폐지안’이다. 전기통신 사업자들끼리 경쟁을 활성화해 그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가게끔 규제를 풀어야 한다. ‘탈북민 교육 사각지대 해소법안’도 발의해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해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나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김정은이 쥐고 있는 세 가지 카드

    10월 말 1만여 북한군이 러시아에 파병됐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명분 없는 전쟁에 북한의 청년들이 끌려가 목숨을 잃겠구나’ 싶어 마음 아팠다. 이어 ‘김정은이 과욕으로 자충수를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1만여 북한군이 사망할 경우 김정은에게 보상금 1조 원가량의 ‘캐시’가 들어간다. 한마디로 김정은이 ‘시드머니’ 확보를 위해 북한 장병들을 베팅한 것이다. 러시아는 전쟁을 3년째 치르면서 70만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국 내 병력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고, 푸틴은 앞으로도 북한에 파병을 계속해서 요구할 거라고 본다. 김정은은 상장 폐지될 주식을 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추가로 북한군 10만 명이 파병되고 대다수가 사망한다면? 세상에 어떤 부모가 명분 없는 전쟁에 자녀를 보내 목숨 잃게 한 사람을 두고만 볼까. 북한군 파병은 김정은 정권이 크게 흔들리고 종말로 가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월 31일 북한이 고체연료 ICBM 화성-19형을 발사했다. 북한은 파병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진일보한 ICBM 기술을 지원받을 가능성이 높다. 향후 어떻게 될까.

    “화성-19형은 생김새로 볼 때 다탄두미사일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김정은 정권이 꿈꾸는 ICBM의 최종 완결판이다. 북한은 화성-19형이 수평비행거리 1001.2㎞, 정점고도 7687.5㎞, 비행시간 5156초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발사한 화성-18형보다 기록 경신에 성공했고, 계속해서 높이뛰기하듯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 발사 고각보다 장거리로 실질적 사거리를 뽑아내는 실험이 더 중요하다. 이게 되려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다탄두미사일과 실시간으로 통신해 미사일 속도와 방향, 타격점 등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텔레메트리(telemetry)’ 기술인데, 아직 북한이 개발 못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러시아로부터 기술을 제공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떤 나라도 최첨단 군사기술을 함부로 넘겨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푸틴이 궁지에 몰린다면 파병을 조건으로 넘겨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한반도와 미국, 북한과의 관계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게 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친분을 강조하며 또다시 만날 의향을 밝혔다. 그렇게 되면 북한의 대미 노선이 달라질 걸로 보는가.

    “김정은의 대미 노선은 결코 달라질 것이 없다. 김정은이 원하는 것은 △핵보유국 지위 인정 △대북제재 해지 △서방국가의 북한 인권 개선 활동 중단 등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김정은은 여러 카드를 복선으로 깔고 있다. 첫 번째가 ICBM이다.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면 핵과 ICBM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고도화할수록 김정은의 협상력은 올라간다. 두 번째는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무기 지원과 파병이다.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이를 중단하라고 요청하면, 이는 푸틴에 대한 카드도 된다. ‘미국이 철수하라는데? 너네 돈 더 안 주면 철수한다’ 하는 거다. 세 번째는 북한이 지금 대미용뿐 아니라 대남용 미사일을 같이 테스트하고 있다. 이 미사일에 ‘화산-31’이라고 하는 전술핵 탄두를 실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 핵공격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나아가 트럼프에게도 카드를 주는 셈이다. 트럼프는 이 문제를 김정은과 만나 해결하면서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청할 수 있다. 결국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인 셈이다.”

    “주민 통제하는 북한, 의로워 보이지 않았다”

    박 의원은 탈북민 출신 4번째 국회의원이다. 조명철(19대)·태영호·지성호(21대) 전 의원에 이어 22대 국회에 입성했다. 각자 탈북의 사유도 과정도 다르지만 박 의원의 경우는 꽤 독특하다. ‘고난의 행군’을 거쳐 어렵사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 국방대 간부로 탄탄대로를 걷던 중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스스로 깨쳐 탈북을 결심했다. 한국 드라마 등 외부 요인에 자극받은 경우가 아니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일으킨다.

    북한 제1고등학교 입학 스토리가 영화 같다. 나흘 만에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1996년 고난의 행군 직격탄을 맞은 세대다. 중학교 2~3학년 당시 학교를 제대로 안 갔다. 가봐야 선생님들도 밥을 못 먹어 출근을 못 했을 정도였으니, 교육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졌던 때다. 그 시기를 지나고 북한 영재학교 ‘제1고등학교’가 생겨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당시 입학시험을 보라고 권하셨다. 북한은 지금도 가부장제 사회다.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나흘간 하루 2~3시간 자면서 밤새 공부해서 합격했는데, 첫 시험에서 180명 중 36등을 했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께 ‘10등 안에 들기 전까지 밥 먹이지 말라’고 하셨다. 오기가 생겨 인정받으려고 더 공부했다.”

    체제 수호자들이 모이는 국방대에서 간부까지 맡을 정도면 보통 ‘악바리’가 아닌 듯하다. 조선노동당 간부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

    “국방대는 조선노동당 중앙당 간부의 자제들이 입학하기에 아주 철저하게 ‘너희는 특별하다’는 특권의식을 심어주는 곳이다. 학생들이 졸업했을 때 북한 체제에서 받는 혜택도 크기에 나같이 탈북한 사람이 없다. 나는 학생 간부도 했기 때문에 매우 철저했다. 1학년 방학 때 아버지가 집에서 쉬다 가라고 한국 드라마·영화 CD를 주셨는데 전부 다 태워버렸다. 그 정도로 충성파였는데 3학년 때 김정일이 직접 쓴 사회주의 관련 논문 두 편을 읽고 머리를 맞은 듯했다. 사회주의를 비판한 외부 세계의 지적을 김정일이 조목조목 반박한 논문이었는데 죄다 모순투성이였다. 북한이 일당 체제로 주민 전체를 통제하는 방식이 불합리해 보였고, 무엇보다 의로워 보이지 않았다.”

    마침 그즈음 보위부 중좌와 소통하며 협조하는 간부 학생이 자신 이외에 몇몇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위에서 국방대 전체 학생의 세부 정보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학교 안팎으로 온통 ‘뇌물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중앙당만큼은 부패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마저 허상이었다.

    “김정일만은 애국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졸업할 무렵 실력과 성적이 아니라 뇌물 액수에 따라 직장을 정해주더라. 평양에 배치받으려면 3000달러를, 그것도 간부와 연결된 ‘애첩’에게 주면 된다고 들었다.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신뢰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니까 세계관이 뒤집혔고, 꿈과 희망을 다 잃었다. 뒤집힌 세계관으로는 국가에 충성할 수 없어 탈북을 결심했다.”

    1년 8개월 준비 끝에 2009년 4월 13일, 중국 단둥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에 입국했다. 당시 어떤 느낌이었나.

    “20대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꿈과 희망이라는 것은 목숨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이다. 탈북을 결심한 순간부터 대한민국은 매일 꿈꾼, 정말 가고 싶은 나라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순간에 느낀 건 크나큰 환희였다. 더는 잡힐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처음 본 우리나라는 북한에서 수집한 정보로 파악한 것보다 더 발전해 있었다. 흑백 TV를 보다가 LED 터치패드를 보는 듯한 격차가 느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민심이 각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도와주시는 분이 정말 많아서 아주 많이 따뜻한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 정착도 쉽지 않았다고. 15년을 돌아보면 어떤가.

    “입국 당시 남북한의 격차가 너무 크고 아득해서 ‘내가 과연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같은 한국 말인데 70%를 못 알아들어서 일상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수능을 준비했는데, 그 과정에 서울대 재료공학과 지도교수님을 만나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이 사회에 바르게 정착할 수 있도록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해주신 분이다. 대학원 졸업할 때는 삼성, LG, SK 다 떨어져서 낙심이 컸는데 그때도 현대제철의 한 상무님을 뵙게 돼 일할 수 있었다. 매 순간 은인을 만난 덕에 한국에서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었다.”

    “과학기술로 부국강병 이루는 데 일조”

    대화를 나눌수록 박 의원에게서 강직한 신념, 올곧은 기개 같은 것이 느껴졌다. 북한 지도층에 그와 같은 엘리트가 스무 명만 있었어도 체제 전복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북한 지식인들의 탈북 러시가 이어지고, 고위층의 심경 변화가 계속된다면 체제 붕괴로 인한 흡수 통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내비치자 박 의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입을 뗐다.

    “나도 탈북하기 전에 체제 전복을 일으키는 상상을 해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반인이 김씨 정권을 상대로 테러를 기획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이미 15년 전 탈북을 할 때도 북한 엘리트들은 실상을 다 알고 있더라. 여러 정보를 수집할 당시 들은 이야기인데, 평양에 있는 간부들이 ‘외교관 한 사람이 탈북했다’는 소문에 ‘그 친구 참 잘했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간부들은 반기를 들었다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친척까지 멸족을 당하니까 리스크가 커서 체제 전복을 못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북한 주민 대다수가 김씨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때쯤엔 북한 엘리트들도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성공한 탈북민으로 자리 잡았다. 의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나의 활동을 보고 탈북민들도 자신감을 얻어 활발하게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정착해 잘 살면 좋겠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노력만 하면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북한 주민들에게 주고 싶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나는 이 사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성장한 사람이다. 이제 보답하고 싶다. 그 길은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부국강병의 시작은 과학기술 발전으로부터 나온다고 보고, 의원으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겠다. 또 강력한 국방력을 보유해 북한을 비롯한 적대국이 감히 우리나라를 상대로 헛된 꿈을 꿀 수 없도록, 그런 나라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신동아 12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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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차장

    정혜연 차장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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