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졸 학력으로 학원식 로스쿨 나와 대통령 된 트루먼 ● 미국은 학부에 법학 과정 없어 대학이 학원식 로스쿨 흡수 ● 합격자 ‘0’ 기록한 일본 4개 로스쿨, 7개 로스쿨은 1명만 합격 ● 非법학 전공 합격자는 왜 전문 변호사가 될 수 없나? ● 로스쿨 나눠 먹기가 초래하는 과잉투자, 누가 책임지나 ● 고려대가 서울대를, 연세대가 고려대를 잡을 수 있다 ● 로스쿨, 사시 합격자 나이 올려 ‘사시 낭인’ 양산 ● 고시 공부용 자습실 된 일본 로스쿨 ● 전관예우 없애려면 대법원 권력부터 개혁해야 ● 법률 기술자만 양성.… 사회 정의 지키는 법조인은 누가 키우나 ● 로스쿨제에서 제2의 노무현은 나올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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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도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법학 교수들의 시위.
어릴 적 트루먼의 꿈은 ‘웨스트포인트(육사)’ 입학이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는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므로 트루먼처럼 가난한 수재들은 대개 이 학교 진학을 노렸다. 그러나 트루먼은 근시여서 웨스트포인트에 응시할 수 없었다. 가난하던 그는 다른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철길 옆에 있는 캠프에서 숙식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시각을 기록하는 일과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다 21세 때인 1905년 미주리 주방위군에 자진 입대해 1911년까지 복무했다.
1916년 미국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반발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는데 1917년, 33세의 트루먼은 다시 주방위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포트실’ 훈련소로 입소해 그의 운명을 바꾸는 친구 제임스 펜더가스트를 만났다.
펜더가스트의 후원
1919년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미주리주의 캔사스시티 로스쿨(지금은 미주리대학의 캔사스시티 로스쿨이 되었음)을 2년간 다니고 ‘법률 학위(law degree)’를 취득했다. 이 학위가 그의 운명을 띄우는 ‘날개’가 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로스쿨을 나왔지만 트루먼은 장사를 하다 실패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리고 1922년 포트실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제임스 펜더가스트를 통해 그의 숙부이자 캔사스시티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톰 펜더가스트를 만났다.
트루먼의 자질을 알아본 톰 펜더가스트는 트루먼이 잭슨카운티의 동부지역을 담당하는 법원 판사로 선출되도록 도와주었다. 시골 판사가 된 트루먼은 1924년 잭슨카운티 동부지역 판사 선거에 떨어지는 고통을 맛보았으나 1926년엔 한 단계 올라 그 지역의 재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톰 펜더가스트는 트루먼을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게 했는데, 이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트루먼은 일약 시골(미주리주)에서 중앙(워싱턴DC)으로 진출했다. 잘나가던 트루먼은 1940년 위기에 봉착했다. 후견인 펜더가스트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
그러나 1940년 상원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이후 트루먼 상원의원은 미군 전력과 군수산업을 육성하는 일에 노력했다. 1941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는데 이때부터 트루먼 의원은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정치인 해니건의 지원을 받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트루먼은 해니건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는데 1944년 해니건이 아주 큰 선물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해니건은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3연임 선거에 출마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민주당의 유력한 부통령후보로 거론되던 헨리 월리스와, 훗날 35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전 주영대사를 낙마시키고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