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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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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보다 스타벅스 간판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서울을 보고 싶지는 않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닥다리 시인의 푸념을 조금 더 늘어놔도 될까.
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서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떠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서울은 이미 내게 낯선 곳이었다. 미술전시가 시작되는 어느 흐린 수요일 저녁에 약속장소를 찾지 못해 인사동의 한복판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학고재 화랑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강남도 아니고 강북에서 서울토박이인 최영미가 길을 잃다니. 서울에 오면 저절로 발이 가던 나의 만만한 동네, 인사동에서 길을 묻는 수치스러운 일이 내게 닥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저~ 여기가 학고재 화랑 자리 아닌가요?”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만 할 뿐,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114에 전화해 화랑의 전화번호와 위치를 알아내어, 삼청동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걸어가도 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그날따라 비도 내리고 정신적으로 지쳤기에 더는 헤매고 싶지 않았다. 헤아려 보니 춘천에 살던 지난 2년간 내가 인사동의 어느 화랑에서 누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단골식당에서 낮에 밥을 먹었을 뿐, 화랑이나 미술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문화생활을 멀리하고 저녁의 술자리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살벌하게 살았는지 후회하며 나는 여러 번 가슴을 칠 것이다.

수도약국 뒷골목

인사동에 내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가 언제인지. 서울이 자랑하는 문화의 거리에서 언제 처음 밥을 먹었는지? 골동품 수집가인 아버지에 이끌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에 벌써 드나들었겠지만, 인사동이 나의 약속장소로 애용된 것은 등단 무렵이었다. 문예잡지사에 시를 투고하고 문단의 선후배들에 이끌려, 밥을 먹기 전에 차를 먼저 마셨던가, 술을 먼저 마셨던가. 마포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에 자주 드나들던 1990년대 초였다. 평론가 김사인을 따라 들어간 어느 후미진 골목의 전통찻집, 탁자가 두어 개밖에 없던, 가게인지 뉘 집의 사랑채인지 분간 안 되는 작은 찻집에 앉아 문학을 논하던 어리벙벙한 신인. 사람 좋은 ‘고향 오라비’ 같은 그를 깍듯하게 선배로 대접하던 서른 살의 시인.



내가 기억하는 가장 낡은 인사동의 내 초상이다. 좁아터진 전통찻집이 나는 불편했다. 앞 사람과 간격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손님들끼리 한 식구처럼 어울리는 곳에서 나는 편히 숨을 쉬지 못했다. 곧 나는 신인 딱지를 떼고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게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다. 학고재 골목으로 죽 들어가 ‘평화 만들기’ 옆의 ‘볼가’가 나의 아지트였다. 담쟁이 넝쿨이 멋스럽게 드리워진 창가에 앉아 나는 시를 썼다. 내 첫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시’라는 제목의 시를 거기서 완성했다. 둥근 탁자에 초고종이를 펼쳐놓고 한 행, 한 행 지워가며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정쩡한 시간, 사람들이 찾지 않는 늦은 오후에 찻집에 앉아 ‘새벽 1시’의 고독을 썼다 지우며 약간의 이율배반이랄까, 어색함을 느꼈던 것 같다. 오후 4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를 음미하다니. 거짓말을 할 때처럼 뒤가 켕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의 어긋남은 아무것도 아니며, 작업시간과 작품에 나타나는 시간을 일치시킨다는 건 멍청한 짓이며, ‘정직’을 들먹일 문제도 아니지만, 고지식한 30대의 초보 시인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야 좋은 작품을 쓰는 글쟁이의 숙명을 의식하며, 정직에 대한 나의 오랜 집착을 버리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돼지들에게’를 탈고하며 나는 드디어 완전한 허구의 세계를 정복하는 창조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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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ymchoi3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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