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꽃밭에서

  • 이진우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6-05-02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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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밭에서
    열살 먹은 딸, 지윤이의 마음이 봄날처럼 들떴습니다. 하루는 뜬금없이 파종기가 뭐냐고 묻기에 꽃씨 뿌리는 시기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러자 사루비아 꽃씨 봉지를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왔다며 내밉니다. “아빠, 꽃씨 심어요. 지금이 딱 파종기예요.” 꽃씨 봉지에는 파종기가 3월 중순에서 4월 하순 사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봄이 왔으니 꽃씨도 심고 나무도 심어야지요.

    올봄에 고향 통영으로 이사 와 적응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사 오기 전에는 아이들이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부모보다 적응이 빠릅니다.

    시골에서 자란 지윤이는 꽃씨를 뿌리고 채소를 가꾸고 나무를 심는 곳이 제가 사는 곳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어서 꽃씨 심어요.” 이 사람은 부모와 같이 살게 되었고, 부모의 마당과 밭을 함께 쓰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 때보다 가꿀 땅은 오히려 늘었건만 그 땅이 낯설기만 합니다.

    할머니와 꽃씨를 심기로 했다며 신이 난 지윤이가 대뜸 “아빠는 무슨 꽃씨 심으실래요?” 물었습니다. “아빠는 해바라기가 좋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풍성해진답니다. 해바라기와 키 재기 하며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대견했고요. 가진 게 별로 없던 이 사람에게 해바라기는 아주 커다란 보석이었죠.

    뜻밖에도 지윤이는 해바라기가 싫다고 합니다. “왜?” “너무 커져서 갖고 놀 수 없어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아이처럼 되물었지요. “사루비아는 뭐가 좋아?” 망설이던 지윤이가 꽃씨 봉지를 살피다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습니다. “사루비아 꽃말은 ‘내 마음은 불타고 있어요’래요.” 그것 하나만으로 사루비아를 심을 이유는 충분하다는 거죠. “그래라. 아빠 마음도 사랑으로 불탔으면 좋겠구나. 비가 내리고 나면 함께 꽃씨를 심자꾸나.”



    지윤이가 학교에 간 후에 올봄에는 무슨 씨를 어디에 뿌릴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습니다. 부모님이 무슨 요량을 해두었을 거라 싶어서였습니다. 씨 뿌리는 일로 가족의 복잡한 심기를 어지럽히기 싫었습니다. 지난해 연말에 협심증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대장암 초기로 밝혀져 수술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럴수록 예쁜 꽃을 많이 심어야겠다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이 사람과 생각이 다르답니다. 시키는 대로 하라거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마음대로 꽃씨를 뿌릴 땅 한 뼘도 없구나 싶은 생각에 기운이 쪽 빠졌습니다. 애꿎은 담배만 피우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사루비아와 샛노란 해바라기로 가득한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상상 속의 땅에 씨를 뿌리면 되겠다 싶었던 거지요.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을 그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지윤이 새끼손톱만한 해바라기 씨를 뿌렸습니다. 그 사이 사이에 사루비아 씨를 뿌리게 씨 뿌린 자리를 표시하면서요. 그리고 해바라기와 지윤이를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새 집에 이사 온 지윤이가 주인공이지요. 어느 따뜻한 봄날, 온 가족이 마당에 꽃씨를 심었습니다. 지윤이는 사루비아, 아빠는 해바라기. 지윤이는 아빠만큼 키가 커지는 해바라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아빠는 해바라기 씨를 하나만 심기로 합니다. 지윤이에게는 해바라기랑 키 재기를 해보라고 하지요. 지윤이가 쑥쑥 자라기를 바란다면서요.

    아빠는 말합니다. “지금은 아빠가 해바라기처럼 보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는 점점 작아지고 넌 점점 커지지. 네가 다 자란 해바라기가 되면 아빠를 굽어보게 될 거야. 네게는 아빠가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아빠는 정말 마음이 뿌듯할 거야.” 그러나 지윤이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봄비가 내리고 따뜻한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서 꽃씨들이 싹을 틔웁니다. 지윤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 마치고 오면 새싹이 자라는 걸 지켜봅니다. 해바라기 새싹만 보면 그렇게 빨리 자랄 것 같지 않아 보여 지윤이는 남몰래 해바라기와 키 재기 놀이를 합니다. 장마철이 되면서 해바라기는 마법처럼 쑥쑥 자랍니다. 지윤이는 애써 모른 척하지만 속이 많이 상하지요. 그래서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합니다. 밤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도 꿉니다.

    장마가 끝나고 햇살이 쨍쨍한 어느 여름날, 드디어 해바라기가 키 재기에서 이깁니다. 지윤이는 남몰래 해바라기에 제 키를 표시해놓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해바라기를 지윤이는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키 재기를 포기한 지윤이는 해바라기 옆에 붉게 핀 사루비아 꽃을 쪽쪽 빨아먹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해바라기가 쓰러집니다. 아빠는 비를 맞으며 쓰러진 해바라기를 일으켜 세우지만 해바라기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쓰러집니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마자 지윤이는 아빠의 손을 끌고 마당으로 나갑니다. 아빠는 성화에 못 이겨 해바라기를 세워놓습니다. “해바라기가 살지 모르겠구나.” 지윤이는 틈나는 대로 해바라기를 살피러 갑니다.

    잎과 꽃이 생기를 되찾은 해바라기는 쑥쑥 자라 아빠보다 키가 더 큽니다. 하늘만 바라보던 해바라기 꽃잎이 하나 둘 지더니 고개를 숙여 지윤이를 바라봅니다. 씨가 검게 익어갈수록 해바라기는 고개를 더 숙입니다. 지윤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요. “아빠, 해바라기가 죽어가나 봐요. 사루비아 꽃은 붉기만 한데.” “아니. 죽는 것처럼 보이는 거란다.” 이제 때가 되었나 보다.

    아빠는 해바라기를 뽑아버립니다. 지윤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합니다. 아빠는 해바라기 검은 씨를 한 움큼 지윤이 손에 쥐어줍니다. 지윤이는 차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빠, 다시 심으면 안 돼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도 심어 볼래요.” 지윤이는 사루비아 옆에 해바라기 씨를 심고 매일 물을 줍니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던 해바라기가 여기저기서 흙을 뚫고 새싹을 내밉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자 해바라기와 지윤이의 키가 비슷해집니다. 사루비아는 여전히 붉은 꽃을 자랑하지만 해바라기 틈에서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고요. 지윤이는 해바라기마다 제 키를 표시해놓습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해바라기는 더 빠르게 자랍니다. 지윤이는 한참 높아진 제 키 표시를 보면서 배시시 웃습니다. 언젠가 그만큼 자라겠지요.

    동화는 이쯤에서 끝납니다. 동화는 동화일 뿐. 상황이 달라진 건 없군요. 그러나 동화를 쓰는 동안 부모의 땅이 내 땅이고, 내 땅이 자식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고 자라고 다시 나고 자라는 게 생명의 이치. 이 사람이 딸아이의 해바라기이듯 부모가 이 사람의 해바라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꽃밭에서
    李眞雨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작품 : 장편소설 ‘그러나 날은 저물지 않는다’ ‘적들의 사회’ ‘바닐라클럽’, 산문집 ‘해바라기 피는 마을의 작은 풍경’ ‘저구마을 아침편지’,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내 마음의 오후’ 등
    ●現 출판사 ‘여러누리’ 대표


    3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나 10여 년 만에 부모와 함께 사는 생활에 한 달이 넘도록 적응 못하고 있는 건 고향이나 부모 탓이 아님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떨어져 사는 동안 고향이나 부모가 달라진 만큼 이 사람이 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달라진 것보다 달라지지 않은 게 더 많다는 걸 잊고 있었더군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도 달라질 수 없는 것, 그것이 고향이고 부모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이고 부모인 거죠. 고향과 부모에 적응하려 했던 마음가짐이 참 부질없습니다. 그저 품에 푹 안기기만 하면 되는 것을.

    어제, 비가 원 없이 내렸습니다. 꽃씨 심기 딱 좋은 날입니다. 모두 함께 꽃씨를 심자고 해야겠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저는 저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좋아하는 꽃씨를 심겠지만 꽃씨들이 자라면서 어울려 예쁜 꽃밭을 이룰 겁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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