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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⑧|문경새재에서 싸리재까지

라일락 향기, 철쭉꽃 잔향 “산마다 냄새가 다르다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라일락 향기, 철쭉꽃 잔향 “산마다 냄새가 다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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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원에서 대간에 다시 붙을 수 있는 길을 묻자 두 명의 여성이 자세히 일러주었다. 다시 “하늘재까지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1시간도 안 걸린다”고 답했다. 지도상으로만 봐도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을 1시간 만에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간을 타다 보면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대개는 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산이 일상이다 보니 산길도 평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다. 다들 자신의 그릇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산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 아니던가. 우리는 하늘재까지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부봉 밑 8부 능선쯤에 텐트를 쳤다.

저녁식사는 김치찌개에 카레덮밥. 소주에 과일주를 털어넣자 금세 취기가 돌았다. 중3 때 처음 설악산에 오른 뒤 암벽타기를 즐기게 됐고 대학시절 산악반에서는 거의 군대식으로 훈련했다는 김경수씨의 무용담은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렇게 청춘을 산에서 보냈기에 무려 5년 만에 배낭을 꾸리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장비를 챙긴 것이리라. 실제로 그의 배낭에는 전투식량과 비상식량, 갖가지 반찬과 밑반찬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선배들에게 줄빠따 맞으면서 배우다 보니 그냥 습관이 돼 버렸어요.”

이 길동무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만 해도 중학교 때 속리산 근처의 친척집에 놀러간 것이 계기가 돼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물병 하나만 들고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도 간단한 차림새로 훌쩍 다녀오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 아무튼 필자는 이날 저녁 고수로부터 배낭 꾸리는 법부터 워킹, 산행시 주의할 사항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한밤중 목이 말라서 눈을 떴더니 어디선가 정신을 맑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의 물줄기였다. 낮에는 걷느라 느끼지 못했고 저녁에는 술기운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던 물소리가 귓가에 제대로 잡힌 것이다. 텐트를 열고 나가 계곡물에 얼굴을 적신 뒤 고개를 들자 나무숲 사이로 촘촘히 박힌 별들이 보였다. 텐트 앞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텐트 위를 때리는 소리가 더없이 경쾌했다. 텐트 안에서는 빗방울인가 하겠지만, 밖에서 보면 분명 대자연의 숨결이다. 우리는 과연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혹시 일평생 텐트 안에서 단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것은 아닐까?



현세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하늘재

24일 아침 일찍 라면을 끓여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제의 헛걸음을 만회하기 위해 초반부터 속도를 냈다. 하지만 동화원 아주머니들이 1시간도 안 걸린다고 일러준 하늘재까지는 2시간 이상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재로 가는 도중 평천재에 이르자 하루 전 길을 잃고 헤맸던 부봉의 주능선이 훤히 들어왔다. 평천재에서 하늘재로 급하게 떨어지는 길에서 마주 오는 노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자 멀리 포암산(布巖山·961.8m)이 보였다. 저 밑이 바로 백두대간의 유서 깊은 고개 하늘재다.

하늘재는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잇는 고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제8대 왕 아달라이사금이 156년에 계립령을 열었다고 돼 있는데, 이 계립령이 바로 하늘재다. 북진을 내건 신라와 이에 남진으로 맞선 고구려는 6세기 무렵까지도 한강 유역 도처에서 혈투를 벌였다. 특히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주와 상주에 양측의 야전사령부가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하늘재는 종교적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늘재 남쪽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고 북쪽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재는 관음에서 미륵으로, 즉 현세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담 하나 더. 하늘재에서 충주 쪽으로 가다 보면 미륵사지가 나오고 이곳에 세계사라는 절이 있다. 이 곳 미륵불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린다고 해서 전국의 불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올초 대통령 탄핵사태 직후에도 식은땀을 흘려 언론에서 화제의 뉴스로 보도한 적이 있다.

인간세계의 경계지점인 하늘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 백두대간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친 봉우리가 바로 포암산이다. 포암산은 베바우산으로도 불렸는데, 겨울철 바위에 눈이 달라붙은 모양이 마치 베를 펼쳐놓은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색으로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삼대 껍질을 벗겨놓은 것과 닮았다고 해서 마골산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아무튼 포암산은 줄곧 오르막이어서 몸속의 진을 다 빼고 나야만 정상에 설 수 있다.

일단 정상에 오르면 왼편으로 장쾌한 월악산 주능선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포암산에서 긴 휴식을 취하며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래는데 검은색 나비 두 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이때 갑자기 하늘 위로 전투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내달리자 그 소리에 놀란 나비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백두대간은 포암산에서 잠시 북동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대미산(大美山·1115m)까지 길게 흘러간다. 관음재를 지나 938.3m봉으로 가는 길에 맹랑한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왼편 화살표에 지리산, 오른편 화살표에 백두산을 표시해놓은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왼편의 경계가 충북 충주에서 제천으로 바뀐다. 여전히 문경땅인 오른편에서는 석가탄신일을 앞둔 사찰에서 ‘석가모니불’ 독경소리가 들려와 발걸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1032m봉으로 가기 전 긴 너덜지대를 지나야 하고 여기에서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를 세 개 넘어서면 대미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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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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