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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고향집 개 바우

고향집 개 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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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고향집에 홀로 남겨진 바우가 저 혼자 새끼를 낳아 키웠다는 사실은 바우가 아직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립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바우를 통해 새삼 감탄하고 놀라움을 느낀 것은 바로 이 야성의 힘 때문이다. 극한 상황에서 되살아나는 그 불굴의 힘.

야성이란 자연 속의 강인한 생명의 힘, 곧 자연에 적응하는 본래의 생명력이다. 인간은 이 지구 생태계 속에서 숨쉬는 모든 종(種) 가운데 자연성, 즉 야성을 잃어버린 유일한 생명체이다. 인간이 야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곧 인간이 영성(靈性)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결국 본래의 자연성을 잃어버리고 기형적이고 병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우리는 흔히 야성을 ‘거친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한다. 인간이 만들고 가꾸는 것을 ‘문화’라고 하면서, 그 반대의 개념으로 야성을 인식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문명은 자연이 가진 야성의 힘을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야성은 영성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영성은 자연성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존재 속에 깃들여 있는 신성의 빛은 그 존재가 자연성을 회복할 때 밝게 드러난다. 자연 그 자체가 신성이 드러난 모습인 까닭이다. 생명력이 충만하여 밝고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움 속에서 활짝 피어나는 영성을 볼 수 있다.

굶주리고 목줄에 묶여 있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며 돌보는 바우의 행동은 단순히 본능적 행위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바우에게서 어떤 숭고한 힘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야성이 야만성 또는 야수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야만성이란 건강한 인간성 속에서 야성을 배제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성이 왜곡되어 병든 상태에서 드러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에 만연한 각종 범죄와 전쟁, 잔혹한 학살 등이 바로 이러한 야만성의 발현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연 속에서는 무고한 학살이나 이라크전쟁과 같은 참극, 즉 자신의 생존 근거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서로를 죽음으로몰아가는 어리석은 행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태적 위기를 비롯한 오늘날 인간 사회의 여러 문제는 바로 야성의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할 만하다.



빈 고향집에서 일곱 마리나 되는 새끼를 제 스스로의 힘으로 낳아 기르고 있는 어미개 바우를 보면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류 문명의 야만성은 야성의 건강한 회복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신동아 200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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