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초반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에서 활동할 당시의 구영필
최근 독립운동가 구영필(具榮泌·1890∼1926)씨 유족회가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신민부 세력이 북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영안현 영고탑을 차지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위원 출신 독립운동가 구영필을 죽였다”면서 “광복 후 정치적 목적과 신민부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왜곡됐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가 친일파로 내몰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나서 주목된다.
만일 유족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정리된 한국독립운동사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신동아’는 객관적인 사료를 근거로 유족회의 주장을 확인하는 한편,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박환 수원대 교수 등에게 자문했다. 또 이들 교수의 저서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를 오랜 기간 연구한 중국 옌볜대 박창욱 교수의 논문 및 저서에 등장한 관련 사료를 참고했다.
‘신민부와 정의부의 관계인 듯…’
구영필씨의 호는 일우(一友)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최계화(崔桂華)’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에 그는 과연 어떤 인물로 기록돼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 1926년 10월18일자로 그의 사망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특히 이 기사는 구영필의 과거 행적에 대해 가장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다음은 기사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다.
[ ‘군정서 창설자 길림 간민회장 구영필씨 피화
최근은 이주동포 지도 활동
중국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상회 공제호(共濟號)를 설립하고 이주동포를 지도하던 일우 구영필(35)은 지난 9월11일 오전 7시에 영고탑 아문압 동채시(東菜市)에서 어떤 흉한에게 복부에 칼을 맞아 많은 피를 흘리고 사흘이 지난 14일 오후 4시30분경에 굳은 혀(舌)로 말을 못하고 오른팔을 들어 곁에 있던 동지들에게 민족을 위해 진력하라는 뜻을 보이고 마침내 최후의 길을 떠났다는데 구씨의 짧은 일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더라(영고탑통신).
구씨는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5세까지 한문 수학, 17세에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에 3년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연구하다가 한일합병 후 2년에 동지 몇 사람과 같이 봉천성 류하현 삼원보에 가서 1년 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무슨 계획을 세워 다시 봉천성에 나가다가 경찰에 잡혀 평양감옥에서 6개월 복역 후 기미년에 다시 봉천성에서 삼광상회, 안동현에 원보상회를 개설하고 독립운동의 교통기관이 되어 내외를 연락.
동년 3·1운동 당시에 상해에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추선되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재무부위원이 되어 내외지에 활동. 동년 5월에 길림에서 동지 황상규(黃尙奎)와 같이 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수과장을 본직으로 교통사장(司長)을 겸임, 익년 경신 2월경에 영고탑에 가서 현재의 근거를 정돈하고 익년 신유에 다시 본국에 잠입하였다가 출판법위반으로 3년 징역의 결석재판을 받았다.
동년 영고탑에서 한교호회(韓僑戶會)를 설립하고 회장에 추선되어 이주동포를 지도하다가 국제문제로 중국관헌에게 한교의 간판은 압수되고 다시 입적간민호회(入籍墾民戶會)로 조직을 변경, 또한 회장에 추천, 익이년 계해에 동지 김사국(金思國)과 같이 무산자교육기관 대동학원(大同學院) 중학교(中學校)를 경영하다가 간도동양학원의 후신이란 혐의로 중국관헌으로부터 폐쇄의 처분을 받았다. 그후 끊임없이 민족회사 두 방면으로 운동의 길을 개척하다가 불행히 35세를 일기로 실절.’ ]
이 기사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구영필씨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또 이 내용은 광복 후 공개된 다양한 기록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가장 결정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피살됐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다.
이에 앞서 그해 9월25일자 동아일보는 구영필 피습 당시 그 배경에 대해 ‘신민부(新民府)와 정의부(正義府) 사이의 어떠한 관계(에 의한 사건)인 듯싶다’고 보도한 바 있다. 여기서 신민부는 바로 김좌진 장군이 만든 독립운동단체다. 어쩌면 1910~1920년대 북만 독립운동사 재조명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