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이재황 옮김/문학과지성사<br>‘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지음/ 창비<br>‘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음/ 푸른숲
가족의 내부에서 아버지란 무엇인가. 카프카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를 반영한다. 아버지가 법과 권력의 표상체계이며, 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질료적 흐름을 단절하고 규제하며 조정하는 원리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그런 혐의는 더욱 단단해진다. 카프카는 이렇게 고백한다.
“제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씌어졌습니다.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한테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토로해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
카프카의 문학은 아버지의 상징성을 해독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미궁이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가문이며, 관료체제며, 온갖 종속현상을 유포하는 자본주의 권력 메커니즘의 표상이다. 아버지는 “힘, 건강, 식욕, 목소리, 언변, 자기만족, 자부심, 끈기, 순발력, 이해심,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아량”의 표상이고, 이것들은 어린 카프카를 억압하는 기제들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막대한 영향력으로 이른바 카프카 가문다운 DNA를 그에게 주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문학을 통해 아버지의 권력에 저항한다. 아버지로부터의 탈주는 아버지라는 중심 지층에서 이탈하려는, 더 근본적으로는 아버지라는 중심 지층을 해체하려는 무정부주의적 욕망을 근간으로 한다.
아버지로부터의 탈주
가부장적 세계 질서의 대변자라는 점에서 한국의 아버지들도 카프카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아버지(즉 남자)의 정체성은 저절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남자들의 독특한 인성과 인격, 그리고 한국의 특정한 가족, 사회, 국가라는 구조 속에서 길러지고 굳어진 것이다.
한국 남자는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뻔뻔스럽고 아무때나 큰소리를 친다. 고집스럽고 으스대기를 좋아하며 패거리 짓기를 즐겨하고 권위주의와 자기애에 찌들어 있다. 허세와 피상성에 젖어 있고, 강한 척하지만 턱없이 나약하다. 상사나 권력자 같은 높은 지위와 힘센 사람들에겐 비굴하지만,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서는 무자비하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고 실패자를 철저하게 짓밟으며 부패구조를 청산하지 못하는 책임의 대부분은 남자, 즉 아버지들에게 있다. 저 혼자 놔두면 똥오줌도 제대로 가릴 줄 모르는 이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 오빠라는 직분을 수행하며 우리 곁에서 살아간다. 겉이 멀쩡하다고 속까지 멀쩡한 것은 아니다.
한국 남자의 인성과 정체성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의 구조적 기능의 특징, 즉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동성의 형제들이 맺는 심리적 연관 속에서 키워진다. 1960년대 한국 농촌의 가옥 구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공간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공간이 규율과 권력 서열에 따른 법도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제사와 같은 중요한 공식 의전들이 이루어지는 공적 공간이라면, 어머니의 공간은 자질구레한 가사노동을 하고, 정과 어리광이 통용되며 모자, 모녀가 친밀한 애정을 쌓는 사적 공간이다. 아버지의 공간은 깨끗하고 조용하지만, 어머니의 공간은 허드레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고 항상 시끄러운 곳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 두 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이 사회가 내게 침투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내가 사회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즉 나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과 ‘어머니 공간’에서 익힌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남성들의 세상에서 펼쳐 보이는 방법을 배웠다.”
‘동굴 속 황제’를 ‘살해’하라
한국에서 아버지는 ‘나’의 사회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 즉 불가피한 포획장치다. 아버지 뒤에는 아들을 아버지로 복제하는 장치, 즉 비자발적인 ‘예(禮)’라는 코드로 개체의 변환과 변이 능력을 통제하고 구속하면서 끊임없이 국가주의적 사유로 훈육하는 주자학적(朱子學的) 장치가 숨어 있다. 그 ‘예’라는 코드에 녹아든 “국가와 가족이라는 이중의 고착적 성분”은 삶의 내밀한 곳까지 침투하고 질료적 내용을 지층화한다.
남자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새끼 아버지’ 대우를 받는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절대 권력자다. 아버지의 이불은 다른 사람 이불 밑에 깔리면 안 되기 때문에 맨 나중에 개고 가장 먼저 펴야 한다. 밥을 풀 때조차 아버지-형-나-남동생-누이-어머니라는 순서가 지켜진다. 밥상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것이 따로 차려진다. 대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밥상에서 밥을 먹는다. 어머니와 딸들은 따로 모여 밥을 먹는데, 두 상차림은 다르다. 이것이 가족 또는 국가 안의 계급질서다. 한국 남자들은 가족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아버지를 닮는다. 이 말은 새끼 아버지, 소황제라는 특권에 젖어서 살다가 마침내 동굴 속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이들의 특징은 권위주의와 자기애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남자, 아버지의 대다수는 실패했다. 그 증거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아버지가 나이 들수록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아무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그 실패 원인은 자기 자신과 사회구조 속에 잠복되어 있다. 첫째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른다. 둘째 가정,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 군대, 회사와 같은 연쇄적, 중층적 권위 구조 내부에서 고만고만한 동굴 속 황제들로 양육된다. 동굴 속 황제들은 과보호와 주체적 인격 형성의 미성숙에 대해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른다. 독선, 몰염치, 체면 우선주의, 허장성세, 피상성, 똥고집, 권위주의, 자기애, 빗나간 연고주의, 도덕적 해이는 이들의 내적 특성, 혹은 자질들이다. 이것들이 만연된 사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사회가 드러내 보이고 있는 문제점들은 한국 남자들이 안고 있는 내적 문제와 완벽하게 겹쳐진다.
소아병적인 동굴 속 황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봉건과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하고 늘 기득권에 젖어 있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다. 자기 속의 “나-아버지-권위적 국가주의”가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남자, 아버지가 탄생한다. 그러나 손을 피로 물들인 악성 신화(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원죄를 갖지 않은 좋은 아버지의 탄생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아버지로 재생산되는 오빠
근대의 발견물 중 하나인 ‘오빠’는 아버지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쇠잔하고 퇴패해가는 전근대의 사상과 기운을 혁신할 ‘대생명의 발로’로 나타났다. ‘오빠’는 새 시대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맹아’라는 개념이 추가되면서 나타난 수사학적 기호다.
김영하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성욕과 돈의 권력을 독점한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인 살해는 오빠에 의해 행해진다. 그러나 그 오빠는 아버지의 DNA를 복제한 변형된 아버지에 지나지 않는다. 오빠는 아버지의 문화적 표상과 아비투스를 무반성적으로 세습한다. 한국 사회에서 오빠들은 아버지라는 구악(舊惡)과 싸우지만 아버지를 개혁하는 데 실패하고, 곧 구악의 습속을 답습하는 아버지로 재생산된다. 오빠가 돌아왔다고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것은 내부의 파시즘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오빠는 봉건적 위계질서를 해체하면서 등장하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맞물려 나타난 한 부산물이다. 근대와 계몽의 표상적 기호로 큰 힘을 받지 못하고 곧 주변화해버렸다는 점에서 부산물이다. 오빠들은 그 내부에 현실전복적인 힘과 사유를 키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빠의 탄생’은 가부장제가 드리운 억압과 부정적인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하고 유사 가부장제라는 잡종적 현실의 도래를 암시하는 데 그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