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陶工)들. 돌무더기보다 조금 나은 ‘인간더미’가 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땅에 표류한 지 400년. 대를 이어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의 말을 쓰며 조선의 풍속을 지키며 조선을 그리워하던, 나에시로가와 도공 후손들의 못다 부른 망향가.
도기 굽는 가마 앞에 선 심수관 14대. 가마 일은 선대 이래로 늘 25명이 팀을 이루어 해왔다고 한다.
그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시바 료타로의 소설 때문이었다.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역사소설을 통해 사쓰마 도자기에 얽힌 드라마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시바의 소설은 곳곳에 일본 옛 문헌과 고어를 인용하고 있어 일부 이해하기 어렵거나 알 수 없는 대목도 있지만, 전편에 흐르는 조선 핏줄들의 기막힌 운명과 애환의 드라마는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그 심씨를 참으로 우연히 마주친 것은 2002한일월드컵 직전 도쿄의 뉴오타니 호텔에서였다. 일본의 오부치 유코(小淵優子) 자민당 중의원 등과 함께한 식사자리였는데, 심씨와 나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한번 만나서 긴 이야기 듣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건넸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긴자(銀座)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도자기 개인전을 열었는데, 200점도 넘는 작품이 모두 팔렸어요!”
심씨는 유쾌한 듯 자랑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예술품인 심수관 도자기가 일거에 매진됐다는 것은 확실히 얘깃거리다. 그렇지만 수인사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쩐지 상업적 가치를 중시하는 ‘일본적’인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니 그 느낌이 새롭다.
‘틀림없는 조선의 산하’
가고시마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 미야마(鹿兒島縣 日置郡 東市來町 美山)로 향했다. 그는 뉴오타니 호텔에서 만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2월의 아침, 날씨는 아직 쌀쌀하지만 햇살은 눈이 부시다. 어제 뿌린 비에 젖은 산하는 아침햇살에 점차 말라가면서 한결 부드럽고 안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라면 2월에 이렇듯 봄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야마는 원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국 제일주의 바람을 타고 마을 사람들이 단군신을 모시지 못하게 하는 조치와 함께 미야마로 이름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미야마 입구. 시바의 소설가다운 묘사가 아름답다.
‘낮은 능선 위로 하늘은 활짝 트이고, 그 밑에 바다가 숨어 있는지 일대는 온통 바닷물의 반사로 눈이 부셨다. 길은 화산재 때문인지 바랜 것처럼 하얗고, 나무란 나무는 일부러 그런 것처럼 엷은 연록색을 띠고 있다. 틀림없는 조선의 산하였다.
마을 자체가 일품이구나!
전에 이곳을 찾은 어느 고명한 도예가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그렇듯 바랜 것처럼 하얀 길 양편에 사쓰마 특유의 푸른빛 감도는 돌담을 쌓아올렸고 그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부분 가는 대나무나 나한송(羅漢松)으로 이루어진 생울타리는 숨은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촌락의 풍경에 한결 가벼운 멋을 더한다. 거기 무사의 집 모양의 대문에 문패가 보였다. 심수관.’
그 사이 하늘은 다시 흐려져 빗방울을 뿌린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때문인지 시바의 묘사에 나오는 정경을 실감할 수가 없다. 더욱이 초행길이라 네비게이터(위성 지리 안내 시스템)에 집중하는 사이 차는 그의 집 대문 앞에 가 닿고 말았다.
일본식 가격표의 ‘정성스러움’
‘심수관요(窯)’는 찾기 쉬웠다. 간판이 또렷하다. ‘대한민국명예총영사관’이라는 문패도 걸려 있다. 아예 손님 주차장도 따로 있다. 승용차 30대는 족히 세울 수 있으리라.
‘대문을 들어섰다. 문을 지나 몇 발자국 가자 조그만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지금은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이 돌무더기는 과거 사쓰마 지역 무사가 살던 집의 특징이다. 적이 문 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 돌무더기를 방패삼아 한번 더 싸운다고 했다. 뜰 오른쪽에는 아직 어린 벚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고 그 밑 닭장에는 날개가 꽤나 고운 사쓰마 닭이 들어 있다.
왼쪽 작은 문에 들어서자 안뜰에는 매화(臥龍梅) 한 그루가 땅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현관은 없고 손님은 안뜰 댓돌에서 바로 마루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14대 심수관씨가 근시안경을 낀 채 커다란 몸을 앞뒤로 흔들며 맞이해주었다.’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 일부)
하지만 내가 들어설 때는 이미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으므로 매화고 벚꽃이고 현관이고 눈여겨볼 틈이 없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내 전화를 받았던 직원이 손님을 맞는다. 어제, 그 직원이 전화로 “심수관 14대를 만나실 건가요, 15대를 만나실 건가요?” 하고 묻기에, 잠시 머뭇거리다 14대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두분 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투로 보아 부자(父子)가 한꺼번에 인터뷰에 응하는 일은 없을 성싶었다.
전시대를 보니 작품의 값을 매기는 것도 일본식이다. 3750엔, 5450엔… 하는 식으로 값이 매겨져 있다. 한국 같으면 3500원 아니면 4000원으로 끊어서 값을 정했을 텐데, 뒷자리 수가 ‘정성스럽게’ 따라붙는다. 도대체 50엔의 가치는 뭐고, 왜, 누가 정하는 것일까. 살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으며 다가서는 일본의 상술과 투박간명(?)한 한국식 판매술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를 느낀다.
심수관씨가 나타났다. 예의 활짝 웃는 얼굴, 개량한복과 도복의 중간쯤 되는 옷차림이다. 작가 시바는 ‘큰 키’라고 묘사했으나 정작 키는 나보다 크지 않다. 생각해보니 시바는 참으로 매운 고추처럼 작은 체구를 가졌다.
대북 강경파 아베 신조가 조선 핏줄?
안채 접견실로 안내한다. 시바가 취재했던 그 방이라고 한다. 밖에서 한국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그새 관광객 일행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기서 멀지 않은 이부스키(指宿)에 다녀가신 뒤로 한국 손님들이 늘었어요. 우리집에도 다녀가셨죠.”
지난해 12월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이야기였다. 그때 노 대통령이 여기까지 다녀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자리가 노 대통령 앉으신 자리이고 (당신이 앉은) 그 자리에 권양숙 여사가 앉았지요. 경호원들이 많이 왔고 경비가 상당히 삼엄했습니다.”
천황이나 황족이 다녀간 자리, 총리를 지낸 정치인들이 스쳐간 자리를 소중히 여기며 반드시 나무를 심고 기록에 남기는 일본 사람들의 습관을 생각한다.
‘일본에는 인격과 대칭되는 ‘물격(物格)’이 있다.’
서울대 인문학 분야 교수 한 분이 그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물건과 장소를 중시하고 신격화하며 길이 모시고 보전하는 전통을 말한다. 이는 필시 샤머니즘이나 일본 신도(神道)와도 관계가 있을 터. 어쨌든 욘사마 붐으로 남이섬과 춘천의 준상이네 집이 일본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도 그런 ‘물격’의 연장선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미 일본인 사쓰마 사람이 된 심수관씨가 ‘권 여사 자리에 당신이 앉아 있다’고 강조하자 새삼 물격을 생각하게 된다.
마주 앉은 심씨의 머리 너머로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默而識之(묵이식지)’.
1970년대 일본 총리를 지냈고, 노벨평화상을 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친히 써준 것이라 한다.
“말로 하지 않아도, 묵묵히 있어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의미랍니다.”
심씨는 자랑삼아 말했다. 도자기와 인간의 대화, 예술품과 보는 이의 마음의 회로가 ‘묵이식지’라는 뜻일까.
이어지는 심씨의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토씨가 하는 말이 놀라웠어요. 나한테 ‘당신네는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묻길래 400년 가까이 됐다고 했더니, ‘우리집은 그 후에 온 집안’이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느 고장에서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선조가 조선에서 건너와 야마구치(山口)에 정착했다는 얘기였지요.”
사토는 196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그렇다면 조선 핏줄이 일본 총리를 두 사람이나 배출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의 우익인사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증거를 대라! 또 그 한반도 출신 타령인가’, 그런 식이겠지.
문득 생각해보니 요즘 총리 후보로 손꼽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로 1980년대 후반 외무대신을 지냈다. 그 아베 신조가 요즘 ‘타도 북한!’의 선봉장이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가장 분개하는 강경파이며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자민당 선두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그에게 한반도의 핏줄이 얽혀 있다는 것은 아이러한 일이다.
북한의 납치와 일본의 납치
북한의 납치와 피랍도공 마을에 대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 ‘아사히신문’의 ‘나의 관점’이라는 칼럼에 이런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북한의 납치행위가 반인도적인,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국가범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도 400년 전 가고시마의 도공 70명을 납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시바 료타로도 납치라고 단정해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일본도 숱하게 납치나 강제연행 같은 일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라는 외교문제와 납치범죄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알 만도 하다고 본다. 지금 일본인의 대응은 감정적이고, 외교와 범죄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사토 에이사쿠가 써준 ‘묵이식지’ 휘호를 설명해주는 심수관씨. 총리를 지냈고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사토는 심씨에게 자기 조상이 조선 후기에 한반도서 건너온 조선 핏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한 가지 기억은, 지금 홋카이도 경찰총수(본부장)를 하고 있는 아시카리씨와 벌인 언쟁이다. 서울 주한대사관에도 근무한 적이 있는 그는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할 때 경비국장으로 현지 경호 총책을 맡은 바 있다.
그와 나를 포함해 네 명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널리스트인 내게 “납치된 사람들의 가족, 즉 평양에 남은 자녀들 문제가 장차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아사히신문’에 이런 의견을 쓴 일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도 했으니 나머지 가족도 평화적으로 오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그것이 북한을 두둔하는 말로 들려 신경에 거슬렸던지 그는 대뜸 “북한을 정당화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나도 약간 기분이 상해 그대로 맞받아쳤다.
“북한의 못된 짓은 당신보다 한국인인 내가 더 잘 압니다. 용납하기 어려운 범죄라는 전제하에서 말하는 겁니다. 가고시마 도공 70명을 납치한 게 일본인입니다. 지금 북한은 13명이 문제죠. 역사에서 400년 차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겁니다.
배로 납치했다는 점, ‘기능’ 때문에 강제로 끌고 간 것도 닮은꼴입니다. 도공의 제도(製陶) 기술을 노린 것이나 일본 습관에 익숙한 일본인을 남파요원화하려고 한 것 모두 인권 유린이란 측면에선 다 비슷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한국인도 있습니다. 400년의 시차 때문에 TV가 있냐 없냐, 여론이 형성되냐 안 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마찬가지라는 인식도 한국에는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외교관이 아니므로 기자로서 남으로부터 듣고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말입니까. 일본은 왜 자기가 한 짓은 잊어버리고 남이 한 짓만 범죄시합니까. 그걸 말하는 겁니다.”
자리를 함께한 K경무관의 중재로 가까스로 언쟁은 멎었지만 찜찜하게 헤어진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정신으로 무장한 고위직 인사가 혹시 나를 ‘동포애에 사로잡힌 친북인사’로 오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뒷맛이 씁쓸하다.
14대 심씨에게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웃는 얼굴로 즉시 대답이 돌아온다.
“삼백수십년 전 조선 정부는 피랍자 송환을 위해 세 번이나 교섭사절단을 보냈지요. 고이즈미 총리는 두 번 평양에 갔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더니 이런 말이 보도되면 일본 내에서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되는 듯 “쓰지 마세요…이건…” 하고 또 한 번 웃는다. 정치다 외교다 범죄다 논평하지 않고 선문답처럼 말하면서 웃기만 한다. 정경학부에서 공부한 덕분일까.
배 밑창에 간직해온 언문(諺文)책
커다란 두 폭 병풍에 넉 자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百世淸風(백세청풍)’.
“저것은 주자의 글씨입니다.”
주자학의 비조(鼻祖)인 주희(朱熹)의 글씨라는 설명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13대 심수관이 탁본을 떠서 병풍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13대는 도공의 아들로 일제시대 명문 가고시마고교(제7고)를 나와 교토대 법학과를 졸업한 수재다. 하지만 결국 향리에 돌아와 도자기를 구우며 아들 14대를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진학시켰다. 참으로 명석하고 학구적인 인물이다.
‘백세청풍’ 비(碑)는 중국 고사에서 연원한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를 기리기 위해 1738년(영조4년) 해주에 세웠다. 그 작은 비석 하나도 허술하게 보아 넘기지 않고 탁본을 떠 조선 ‘핏줄기행’의 기념으로 삼은 13대.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이 방에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옷깃을 여며야 할 듯하다.
시바 료타로 얘기로 질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이 지금도 우리집 전시장에서 팔리고 있어요.”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소설은 심수관 도자기가 일본에서 명품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그 글이 없었다면 국영 NHK가 심씨만을 놓고 8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겠는가. 이 프로그램을 본 홍콩에서도 그를 취재해갔다. 기실 나의 이 인터뷰도 바로 그 소설이 연원이다.
시바는 1967년 2월12일 처음 이 곳을 방문했다. 심씨는 날짜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매화가 비에 젖어 있지만 그날은 매화가 만개해 있었지요. 그 꽃 밑에 새하얀 머리카락의 시바가 낡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을 우리 집사람이 발견했어요. 나는 첫눈에 알아봤어요. 그는 벌써 ‘올빼미의 성(城)’같은 대작으로 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였으니까요.”
집주인은 신문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었다며 인사를 건넸다. 차와 소주를 대접하는 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시바로부터 소설을 쓰겠다거나 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다만 그는 “가고시마현(縣) 초청으로 강연하러 온 길에 들렀다.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20년 전부터 나에시로가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시바는 마을에 남아 있는 조선의 흔적을 물었다. 집주인은 아마도 한어(韓語)일 것이라고 대답해줬다.
가마 일을 할 때 쓰는 기구와 동작에는 조선 중기(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조선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앉을통’은 가마 일을 할 때 걸터앉는 걸상이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마른 장작토막은 ‘찍순’이고, 막대기는 ‘찔래’, 물통은 ‘불삭’, 흙을 두들길 때 쓰는 연장은 ‘슐래’, 가마의 공터, 즉 구운 도기를 놓는 자리는 ‘바닥’, 흙덩이는 ‘동구래’로 쓴다. 모든 일은 이들 한어로만 이뤄지며 이 용어를 모르면 심부름조차 시킬 수 없다.
심씨가 1965년 한국의 초청으로 시범을 보일 때, 마른 장작을 달라며 ‘찍순’ 하고 외쳤더니 그 자리에 있던 한국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사람은 제 핏줄을 따른다”며 웃더란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이 마을은 한어를 쓰면서 살아왔고 당시의 한글 교본으로 대대손손 한글을 익혀왔다.
놀라운 것은, 1597년 왜병의 손에 끌려올 때 배 밑창에 책을 간직해왔다는 사실이다. 노획당한 짐승처럼 갇혀 몇 날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여정을 떠나면서 책을 챙겨오다니, 먹을 것 입을 것, 밥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과 함께 언문(諺文) 책을 쑤셔 넣을 생각을 하다니….
이 집의 수장고(守藏庫)에는 한글판 ‘숙향전’이 전시되어 있다.
펼쳐진 한글 교본 ‘한어훈몽(韓語訓蒙)’에 옛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을 잘 닐럿냐”(책을 잘 읽었느냐)
이 마을의 향학열을 읽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가고시마의 행상들은 ‘나에시로가와를 지나칠 때면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을 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시절부터 번의 규칙으로 학문이 강조됐기 때문이다. 도공의 윗대가 죽었을 경우 무조건 아들들에게 상속하지 않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과 학문을 테스트해서 통과하는 자에게만 녹봉을 후하게 내려 가업을 잇게 했다. 또 장남이라고 해서 누구나 가업을 이어받는 게 아니었다. 고향 남원에서부터 책을 품고 온 정신, 행정 차원의 학문 장려, 이것이 면학 전통의 토대였다.
도자기에 얽힌 한자와 한글도 보인다.
‘磨 : 로기를 자조 하면 빗티 난다’(갈기를 자주하면 빛이 난다)
‘甕 : 독이라 하여도 적은 거슨 옹이라 하느니’
‘쾔 : 큰 독을 강이라 하느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책 읽는 청년들의 낭랑한 목청이 들려오는 듯하다.
‘도공 사냥’ 부른 ‘문화취미’
1597년 8월 조선의 전라도 남원성(南原城).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10만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재침, 이름하여 정유재란이다.
임진왜란 초전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명나라의 조선 도독-지금의 연합사 사령관 격이라고 할까-유정(劉綎)은 1594년경 사령부를 경상도 성주에서 남원으로 옮겼다. 남원은 양도의 중앙에 자리잡아 군대를 지휘하는 데 편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원성이 공격당할 때의 명군 조선 도독은 양원(楊元). 조선군 장교는 ‘연합사’측에 “평지에 있는 남원성은 왜의 10만 대군과 맞서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성 밖의 산성으로 나가 적을 방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이 고래(古來)의 한국형 도시방어 전술이다.
하지만 연합사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결국 명조 연합군은 궤멸당하기에 이른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에 서고, 명조 연합군이 석만자(石曼子)라며 두려워하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뒤를 받쳤다. 이 시마즈 군대가 바로 심수관 등 70명을 납치한다.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선조들이 남원성 전투에서 관군을 도와 분전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온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싸웠고 누구에게 붙잡혀 어떤 경로로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당시 일본에는 차를 기품 있게 마시는 다도(茶道)가 유행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권력과 리큐(利休·일본 다도의 완성자로 불리는 인물)의 문화! 그 센노 리큐(千利休)의 문화란 바로 다도였고 황족, 장군, 거상(巨商)들이 경쟁하듯 거기에 빠져들었다.
차 그릇(茶器)은 외국의 것이라야 가치 있게 보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나뒹구는 밥 사발 하나라도 리큐 같은 다도 명인들이 보증서만 붙여주면 보석처럼 취급됐다. 시바의 글에 따르면 다기가 무공의 상으로 내려지기도 했으며 일국(一國) 일성(一城)과 맞먹는 엄청난 다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흙과 불로 가치를 창조하는 도공들은 사냥감이 됐다. 더욱이 사쓰마는 교토 중앙과도 멀리 떨어진 변방이어서 그릇이라곤 온통 나무로 만든 것뿐이었다. 태수(太守)의 밥그릇도 나무를 파낸 목기였고, 술을 담는 그릇도 나무 표주박 정도였다.
“다들 운동신경이 둔했던 것 같아요.”
심수관씨는 약간의 농을 섞어 말한다. 선조들의 불운에 대해서다.
아프리카에서의 흑인 노예 사냥, ‘뿌리’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시마즈 군대가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일 때 도망치지 못하고 납치당한 도공과 부녀자들의 아우성과 울부짖음을 상상해보라.
돌덩이보다 조금 값진 ‘인간 더미’
사쓰마의 전설에는 일본군의 납치행위가 조선에 보낸 군량선(軍糧船)이 빈 배로 돌아오면 너무 가벼워서 가라앉을 가능성이 커 배 밑창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이뤄졌다고 한다.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가둬진, 돌덩이보다 조금 값진 ‘인간더미’들은 규슈 도처에 내려져 도진쪼(唐人町)를 이룬다. 당인이란 말이 토박이가 아닌 외국인, 특히 조선인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히데요시의 본거지 오사카. 잘 다듬어진 오사카성 내부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증빙이 남아 있다. 일반 관광객의 눈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겠지만 히데요시의 도장이 찍힌 명령서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잡아온 조선 부녀자들 가운데 바느질 같은 손재주가 뛰어난 것들은 상부(오사카)로 바쳐라’는 내용이다.
솜씨 좋은 많은 조선의 아녀자들이 히데요시 처소에까지 끌려가 잡일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녀들은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결국은 오사카 근방의 일본 핏줄에 스며들고 만 것일까. 하긴, 변방에서 번주 같은 높은 사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말단관리에게 핍박만 받았던 피랍자들보다는 대우도 받고 상대적으로 안일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표류, 그리고 인적 없는 해변
정유재란은 히데요시의 급사로 막을 내린다. 왜군은 명·조 연합군과 강화를 맺고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일선의 전투는 멎지 않아서 시마즈 군대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부대에 대패해 병선 200척을 잃고 50여 척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공들을 태운 배가 어떻게 조선 해역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는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시마즈 군대의 철수 선단에 도공들은 없었다는 점이다. 어찌 된 일인지 도공들은 시마즈 군대가 귀환한 하카타(후쿠오카)에 내린 것도 아니다.
누구의 배로, 누구의 안내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되, 도공들은 멀리 규슈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를 거듭해 사쓰마 반도의 구시키노(串木野)에 표착하게 된다. 그들은 시마즈에게도 잊힌 존재가 되고 만다.
시바는 추측한다.
‘아마 중간에 풍랑을 만나 사가현이나 나가사키 언저리의 섬에 일단 표착한 것은 아닐까. 그 섬에서 조개와 물고기로 연명하고 있던 중에 일본인 사공은 달아나버리고, 고국으로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결국 도공들 손으로 배를 고쳐서 규슈 서해안 섬들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 것 아닐까. 그 시절의 항해조건으로 따지면 이 추측이 가장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구시키노 어촌은 후미지고 한적한 곳이다. 그 어촌 남쪽에 시마바라(島平)라는 인적 없는 해변이 있다. 도공 일행은 이곳에 표착한다. 불러도 대답 없는 황량한 바닷가. 천지분간도 할 수 없는 이방인들은 헤맸을 터이다.
‘가고시마라는 지명도 몰랐고 방향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 누구를 찾을 길도 없이 흰 옷자락을 밟아가며 모래사장을 헤매었을 것이다. 아무튼 일행은 거기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병자는 쓰러지고, 아낙네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는 해변을 뒤덮었을 것이다. 날이 밝아도 모래사장은 그저 모래사장. 그중 몇 사람은 미친 듯이 배를 바다에 띄웠으나 작은 배는 물결에 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이때의 망향의 슬픔은 그들 각자의 집에 전승되어 지금도 혼령처럼 숨쉬고 있을 터이다.
병자 일부는 여기서 죽었다. 그 유해를 솔밭에 묻고 언문(한글)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새겼다. 그 무덤이 지금도 거기 남아 있다.’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 일부)
도공 후예인 심수관 14대는 대한민국의 명예총영사가 되고, 그의 집은 명예총영사관이 되었다.
“천주교 옹기 마을이라는 것이 한국에도 있지 않습니까. 관헌에 쫓긴 크리스천들이 산속으로 달아나 깊은 곳에 피신해 있다가, 나무숲 사이에서 생계수단으로 옹기를 굽게 된 것 말입니다.”
심씨의 말이다. 과연 14대의 상상력과 발상은 남다른 데가 있다. 강원도 양양이나 경기도 광주의 옹기마을을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도공들은 8년 세월을 거기서 보낸다. 그러나 정착하기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빛깔이 나는 그릇을 만드는 외계인 같은 벤처 집단. 말도 통하지 않는 원주민들의 텃세와 이지메가 끊이지 않았다. 무작정 가마에 들어와, 흙으로 도기를 빚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는 손으로 만져 무너뜨린다. 말려도 듣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되풀이 되는 실랑이다.
떠밀고 큰 소리로 저항하면 원주민들은 떼로 몰려와 도공들의 움막을 짓밟아 버린다. 사쓰마 관리들의 기록에도 ‘원주민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도공촌에 난입해 보복하기를 거듭했다’는 대목이 있다.
다시 이주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당시 원주민들로서는 혁명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들에게 물항아리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을 테죠. 말하자면 1960년대의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생활혁명 기기 같은 것이었으니 주민들이 이래저래 질시하고 구박했을지도 모르죠.”
14대 심수관의 해설이 그럴 듯하다.
아무튼 도공촌의 원로가 이주를 결정하자 저마다 봇짐을 지고 20리 떨어진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하게 된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가답게, 한 마을 사람들이 무작정 부대처럼 행진하다가 선두에서 ‘아, 고향산천과 너무 닮았다’고 탄성을 지르자 발길을 멈추고 정주하게 되었다고 드라마틱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미 8년을 인근에서 살면서 혹은 도기용 흙을 구하러 다니면서 미리 눈여겨보아둔 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그릇을 굽는 ‘외계인’
그곳에서 ‘양삼년(5, 6년을 뜻하는 듯)’을 사는 동안 드디어 시마즈 번주가 관심을 보였다. 나무 밑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정경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동정적인 관심이었을 것이다. 시마즈 번주는 도공들에게 가고시마 성내에 들어와 살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전하기 위해 도공촌에 간 관리는 “높으신 은혜는 감사하나 성내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도공들의 답변에 그만 기겁하고 만다.
“이건 상부의 명령이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짓이다.”
그래도 도공들은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유를 물으니 두 가지 때문이라고 했다.
“우선 주가전(朱嘉全)이라는 한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반역자다. 군부(君父)의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이역만리에 끌려와 도기나 굽는 주제에 대단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관리는 경악했다.
주가전은 남원 태생으로 관의 녹을 먹던 자인데, 시마즈 군대의 공격에 즈음해 이들과 내통하는 반민족행위를 했다. 왜군이 패주할 무렵 보복이 겁난 주가전은 시마즈에게 빌고 빌어 가고시마에 정착하게 됐고 이후 일본 이름을 쓰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리는 이 ‘웃기는 작자’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칼날이 번뜩이고 있음을 감지하며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고향이, 고향이 그립소이다….”
관리는 반문했다.
“여기서 가고시마는 60리밖에 안 된다. 여기는 고향과 가깝고 거기는 고향과 멀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도공들은 언덕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언덕 이름이 ‘산자락(山侍樂)’입니다.”
언덕에 오르면 동지나해가 보인다, 동지나해 아득한 저쪽에 조선의 산하가 있다, 우리는 천운(天運)을 잘못 타고나 조상의 무덤을 모시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 끌려왔으나, 저 언덕에 올라 거기 제단에 제사를 모시면 아득히 먼 조국의 산하도 감응하여 그곳에 잠든 조상의 넋을 달랠 수 있으리라!
떨리는 목소리에 사쓰마 관리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대로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번주 시마주의 반응도 뜻밖이었다. 그야말로 도공들의 읍소에 ‘감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살게 내버려두어라. 녹봉도 주고 부족한 점은 언제나 보고케 하라.”
매화가 피어 있는 정원을 가리키며 작가 시바 료타로가 찾아왔던 날을 회상하는 심수관14대.
핏줄 타고 흐르는 망향의 한
이 도공 마을에 관해 18세기의 여행기가 전해진다. 1780년경 의사였던 다치바나 난케이(橘南谿)가 쓴 것이다. 당시 일본은 번과 번의 장벽이 높아 국경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으나, 난케이는 의사라는 직분을 활용해 사쓰마의 나에시로가와라는 특수 취락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온 마을이 고려인이다. 조선 풍속을 그대로 계승해 의복에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식이며, 날이 갈수록 번창해서 수백 호를 이루고 있다. 처음 납치되어온 성씨는 17개성, 신(伸) 이(李) 박(朴) 변(卞) 임(林) 정(鄭) 차(車) 강(姜) 진(陣) 최(崔) 노(盧) 심(沈) 김(金) 백(白) 정(丁) 하(河) 주(朱) 등이다.’
난케이는 마을 어른에 해당하는 신무둔(伸屯)의 집에 안내됐다. 한의사였던 그는 조선이나 중국에 관한 지식도 나름대로 해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신무둔의 신씨 성에 어디에도 없는 ‘사람인 변(伸)’이 붙은 것을 궁금해하며 물었다.
원래 조상의 성씨는 신(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쓰마 관리가 호명할 때 ‘신(申)’자를 보고 “사루(원숭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비록 납치되어온 처지지만 원숭이라고 불리다니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생각한 끝에, 성씨에 사람 인 변을 붙여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무둔은 망건을 기품 있게 쓰고 있었다. 오가는 부인네들은 조선 풍속 그대로 머리를 뒤로 땋아 말아올린 헤어스타일이었다. 남녀 모두 널따란 소매를 펄럭이며 거니는 풍경 때문에 난케이는 스스로 ‘당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
신 노인에게 난케이가 물었다.
“일본 온 지 몇 대째가 되나요?”
“5대째니까 200년이 됩니다.”
“그러면 고국 조선은 이미 잊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천만의 말씀! 그 일은 참 기묘하더이다. 이 나라에 건너온 지 200년이나 되었고, 별 불만 없이 지내는 터이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실로 묘한 것이어서 고국에 대한 상념을 잊을 길이 없더이다. 때로는 꿈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낮에 그릇을 굽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고향이더이다.”
여행기 필자인 난케이는 ‘나 또한 슬픈 마음 가득하여…’라고 소회를 적고 있다.
매화향 가득한 뜰에 서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고향인지도 모르겠다. 5대가 지난 손자의 손자 대에 어찌하여 죽어 흙이 된 선조들만이 아는 고향을 기억하고 그 남원 산천을 그리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타향살이의 서러움, 배려를 받아도 어쩔 수 없이 겪는 차별의 아픔, 그것이 ‘고향을 어찌 잊으리’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심씨가 의자에서 일어나서더니 뜰로 나서는 문을 연다. 함께 나가보자고 한다.
여전히 비가 오고, 한국말로 떠들던 관광객은 떠나고 없다. 시바가 감탄하던 매화꽃이 고즈넉이 비에 젖어 있다.
“향기가 나지요? 매화 향기가….”
심씨가 냄새를 맡는 표정으로 말하면서 시바가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킨다.
“그 시바씨 말입니다, 자기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와서는 기웃기웃하고 있었어요. 그러고선 이 집에는 현관이 없다고 소설에 썼더라고요.”
심씨가 즐거운 듯이 당시를 회상하고, 나는 카메라를 꺼내 정원을 배경으로 그를 촬영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