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진앙지는 충청지역이다.
- 염홍철 대전시장과 심대평 충남도지사가 각각 한나라당과 자민련을 탈당하면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진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4월30일로 예정된 재보궐선거 결과로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3월11일 대전시 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가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위한 토론회’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는 심대평 충남도지사(왼쪽)와 염홍철 대전시장. 두 사람은 3월8일 탈당한 이후 처음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지향하고 중원(中原)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력한 정당을 만들어 내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하자!”
손학규 경기지사와 이원종 충북지사에게서 축전이 날아왔다. 이 여세라면 내년 지방선거도 자신만만하다.
#시나리오 2
“우리의 패배는 신행정도시의 헤게모니를 쥐지 못했기 때문이야. 내년 지방선거를 기다릴 수밖에….”
‘충청권 맹주’를 자처하며 재보궐선거에 우호적인 후보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충남 아산과 공주·연기, 단 두 곳의 선거였지만 충청 민심은 심 지사 대신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다. 심 지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폭탄주 서너 잔을 내리 들이켰다.
자민련을 탈당한 뒤 신당을 만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참하겠다고 밝힌 인사들은 대부분 자민련 출신이었고, 창당의 결정적 요소 중 하나인 ‘돈줄’도 막혔다. “도와주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몇몇 지역 기업의 해명성 변명이다.
함께 탈당한 염홍철 대전시장에게 기대를 걸어봤지만 신당 창당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염 시장은 오히려 열린우리당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이원종 충북지사도 독자 행보를 걷고 있다. 심 지사의 중부권 신당 구상은 요원한 일일까. 이제 충청권을 다시 여야의 각축장으로 내놓아야 할 판이다.
#시나리오 3
“참신한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 탓일까. 그나마 1개 지역구를 차지했으니 다행이지.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압승하자고.”
4월30일 치러진 두 곳의 재보궐 선거결과는 1승1패. 50일 전 탈당 직후 지역민들이 보내준 성원을 감안하면 미약한 결과다. 앞으로도 좀처럼 자신이 없다. 다시 추스르고 내년 지방선거에 참신한 인물을 내세울 경우 가능성도 있겠지만 인물난이 심각하다.
‘절반의 승리’를 거둔 뒤 열린우리당과 적절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신행정도시나 원만하게 이루는 것이 꿈이다. ‘여당의 2중대’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다. 충청권의 염원인 신행정도시 건설이라는 실리가 있는데 무슨 소리를 들으면 어떠랴.
신당 정책·정강 등 자문
3월8일 정가에 회오리를 불러일으키며 각자의 소속당인 자민련과 한나라당을 탈당한 심대평 충남지사와 염홍철 대전시장의 요즘 심정은 어떨까. 아마 이처럼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놓고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탈당 이유를 보면, 문구와 어조가 조금씩 다를 뿐 모두 행정도시 건설에 ‘올인’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두 사람의 탈당은 약속된 것이었다. 양측은 모두 “탈당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해본 적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발표날짜를 7일로 할 것이냐, 8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조율한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
다만 두 사람이 탈당 후의 행보에 대해 논의하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건 3선 연임으로 자치단체장선거에 더는 출마할 수 없는 심 지사와 앞으로도 두 차례나 더 출마할 수 있는 염 시장의 사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심 지사의 탈당은 신당을 창당해 정치를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심 지사는 “신당 추진에 대해 많이 묻고 있는데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니다. 신당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면서도 향후 정치 일정을 묻는 질문에는 미리 준비한 듯 말이 술술 이어졌다.
그는 앞으로 바람직한 정당의 형태나 성격을 묻는 질문에 “민주주의의 꽃은 지방자치다. 분권하에서 생활정치를 담아낼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국민에게 편안함을 주고 미래에 대한 확신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신당 창당을 여러 차례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실제로 심 지사와 측근들은 지역 내 정치학·지방자치학 전공 교수들에게 향후 신당의 정치적 행보와 정강, 정책에 대해 수차례 자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두 자치단체장의 탈당으로 충청지역 정가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특히 박동윤 충남도의회 의장을 비롯한 소속 자민련 도의원들과 지난해 자민련으로 총선에 출마한 정치 지망생들이 화답이라도 하듯 자민련 당적을 내던졌다. 자민련 정진석 전 의원(공주·연기)과 이명수 건양대 부총장(아산·전 충남도 행정부지사)이 3월9일 각각 지역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민련을 탈당했다. 임영호 전 대전동구청장도 같은 대열에 합류했다.
이와 달리 염홍철 시장의 소속당인 한나라당 인사들은 다소 멈칫하는 태도다. 염 시장은 탈당 이틀 뒤인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수백명을 탈당시킬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권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자치단체장의 행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심 지사는 ‘포스트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충청권의 리더가 되려고 탈당했고, 염 시장은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의 재선이 목표라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당이 언제부터 우리 식구였나”
그렇다면 과연 두 사람의 정치적 미래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충청 지역민들의 정치적 정서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여당 대전시지구당 사무처장을 지낸 J씨(52)는 “충청 지역민의 정서는 한마디로 ‘소외감’이다”고 단정했다. 자민련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영호남의 틈바구니에서 지역의 정치적 의사가 중앙정치 무대에서 개진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실제 현 정부에서 이 지역 출신이 요직을 차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주민들이 행정수도 위헌 결정을 “법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소외감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을 대변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분위기라는 것.
충청지역에 국회의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처럼 21곳의 지역구가 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 15명, 한나라당 1명, 자민련 4명 등 모두 21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하지만 이들 정당이 충청권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신당에 폭발력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런 전망이라면 ‘시나리오 1’에 가까운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J씨의 이야기다.
“심 지사 탈당 직후 충남의 한 지역구 보궐선거에 여당 후보 경선에 나서려다 실패한 사람과 통화했어요. ‘안됐다’고 걱정했더니 그는 ‘차라리 잘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지역구 여론을 살폈더니 행정수도 때문이지 ‘여당이 언제부터 우리 식구였냐’는 정서가 팽배하다는 거예요.”
최근 한 중앙 일간지의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두 자치단체장의 탈당 직후인 9일 실시된 이 조사에서 심 지사가 추진하는 ‘중부권 신당’이 충청권에서 14.4%(열린우리당 29.8%, 한나라당 19.5%)의 지지율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분석 결과 신당을 창당할 경우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7.4%포인트가 깎여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조사된 것. 열린우리당에 대한 충청권의 지지가 그만큼 상대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신문은 충청지역민들이 여론조사 결과보다 실제 선거에서 자민련을 더욱 많이 지지했다는 과거의 투표행태를 예로 들며 신당 지지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전역에서 만난 택시기사 임창호(52)씨는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야 할 말도 하고 이쪽(충청권)을 대변할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만날 질질 끌려만 다니더니 말예요. 자민련이 그동안 뭘 할 수 있었나요. 그리고 다른 정당들도 표 얻으려 한 거지, 이쪽 이익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인물난이 최대 걸림돌
하지만 신당이 과연 지역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 전국 정당이 될 수 있을지, 앞으로 얼마나 폭발력을 가지며 ‘롱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인물과 조직난 때문이다. 아직 신당 추진세력의 윤곽이 분명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자민련을 통해 정치생활을 하다 접었거나 지난해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자민련 정치지망생 정도가 신당추진세력의 대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 정치인은 이들의 존재를 ‘그 밥에 그 나물’이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다.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입니다. 자민련에서 기생하고 살던 사람들이지요. 새로운 정치적 이념을 실험해봤거나 개혁을 외쳐본 이들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국적으로 지명도 있는 사람도 없어요. 전국정당은커녕 지역정당을 만들어도 지역민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죠.”
이는 결과적으로 ‘시나리오 2’를 점치는 것.
이런 가운데 최근 충남도와 지역 상생협약을 맺은 손학규 경기지사가 신당과 일정한 관계를 가질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웅전 전 의원은 10일 오후 자민련을 탈당하면서 “심 지사와 손 지사가 ‘S-S 라인’을 구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 지사는 상생협약 이후 행정도시의 충청권 이전에 대해 유화적인 자세를 취해 주목된다. 일부에서는 이명박 서울시장이 충청권을 배제한 대권전략을 세운 것으로 분석하고 있어 손 지사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손 지사와 신당의 관계는 아주 느슨한 협력관계는 몰라도 정책연합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분석이 더 많다. 손 지사도 수도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국지방자치학회장인 육동일 충남대 자치행정학과 교수는 “부모가 자녀의 손을 이끌고 투표장으로 가던 선거 양상이 이제는 반대로 변했다”며 “과연 신당이 유권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여성과 젊은층을 어떻게 공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당 추진 세력의 정치포럼에 연사로 초빙된 적이 있는데, 그때 여성이 한 명도 없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신당의 모델 독일 기독교사회당?
자금도 문제다. 신당 창당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관심을 표명한 경제계 인사는 지역의 G, D, M기업 대표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신당 창당이 구체화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태동 조짐을 보인 만큼 추진 세력들이 꽤 많은 재력가를 확보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대표적인 향토기업이면서 국내 건설업계의 랭킹 10위 안에 드는 G기업은 두 자치단체장의 탈당 직후부터 “혹시 신당의 자금줄 아니냐”는 문의가 쇄도해 곤욕을 치른 것으로 전한다. 이 기업의 한 간부는 “여당의 자금줄이 돼도 위험부담이 큰데, 아직 실체조차 불분명한 신당에 돈을 댈 기업이 어디 있느냐. 특히 오너의 나이와 기업경영 스타일을 감안할 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펄쩍 뛰었다.
이념적으로도 신당이 차별화를 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에서는 “지역당을 또 만들겠다는 것이냐” “자민련의 신장개업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혹평한다. 일단 신당 창당세력 주변에서는 신당이 중도 보수를 표방하면서 ‘뉴 라이트(New Rights) 등의 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정당 형태도 좀 다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주목을 받는 것이 심 지사의 ‘지역분권형 정당론’이다. 지역분권형 정당의 전형은 독일의 기독교사회당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사회당은 독일에서도 바이에른주(州)에만 있다. 그러면서 다른 정당과 연합해 지역적인 문제는 물론 전국적 문제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번 수상선거에서 기독교사회당은 전국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연합해 수상 후보를 내기도 했다.
대전대 정치학과 박광기 교수는 “신당이 충청권을 기반으로 형성돼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정당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 구실을 하며 지역의 의사를 대변하고 전국적인 이슈에도 참여하는 방식을 취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 워낙 심해 그동안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의 출현을 금기시하고 비난해왔지만 캐스팅 보트를 통해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면 오히려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도 있다”며 “미국의 연방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역주의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발전시킨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시나리오 3’에 근접한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어느 시나리오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충청 민심이 과연 어떤 시나리오를 선택할지는 재보궐선거 결과가 그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