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경제의 수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 한국 미술의 수장은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이란 말이 있다. 비단 삼성뿐이 아니다. 주로 재벌가 여인들이 운영하는 기업미술관들이 한국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은 막강하다. 오랜 경륜과 노하우,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의 식견이나 취향은 작게는 미술관의 색깔을, 크게는 우리 미술계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미니멀리즘(minimalism·평면성과 구획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없애버리는 미술사조)이 1990년대 말 한국에서 바람을 일으킨 것은 홍라희 관장이 개인적으로 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당시 국내 대다수 화랑은 최대 컬렉터인 홍 관장을 바라보며 미니멀리즘 작품들을 들여왔다고 한다.
한국 미술계에서 기업미술관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이들 없이는 미술계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현재 대기업이 직·간접적으로 보유한 미술관으로는 삼성미술관(삼성), 아트센터 나비(SK), 아트선재센터(대우), 금호미술관(금호), 성곡미술관(쌍용), 대림미술관(대림), 한미사진미술관(한미약품), 일주아트하우스(태광) 등이 있다. 대개 재벌가 여인들이 관장으로 있다.
이들은 미술을 전공했든 그저 호기심이나 취미로 미술계에 몸담았든 오랜 경륜과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웬만한 미술평론가나 전시기획자 못지않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다. 이들 관장 개개인의 식견이나 취향은 미술관의 독특한 색깔로 나타난다. 기업 미술관들의 성향과 우리 미술계에 미친 영향, 컬렉션 등을 비교해본다.
삼성은 지난해 10월13일 개관한 삼성미술관 ‘리움(Leeum)’과 호암미술관, 로댕갤러리, 삼성어린이박물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95년부터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이들 미술관의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200억원 들인 명품 미술관
서울 한남동에 자리잡은 리움은 삼성이그간 소장해온 한국의 국보급 전통미술품과 근현대 미술, 국제 미술 대표작들을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다. 게다가 세계 건축계를 대표하는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가 미술관을 설계해 더욱 화제가 됐다.
마리오 보타가 한국 도자기를 은유해 테라코타 타일로 설계한 ‘Museum 1’은 국보 36점과 보물 96점을 비롯해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시대별 대표작을 전시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자’는 뜻으로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50년대부터, 이건희 회장이 1970년대부터 수집해온 것들이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국보 제133호), 청화백자 매죽문호(국보 제219호), 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국보 제218호), 고려 금동대탑(국보 제213호) 등 국보급 고미술품은 소박함보다는 화려한 미를 뽐낸다.
장 누벨이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녹슨’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설계한 ‘Museum 2’는 한국과 서양의 현대미술 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 미술품으로는 이중섭, 박수근 등 대가로부터 이불 등 오늘날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까지 시대를 가로지른다. 해외 미술품으로는 1945년 이후 전후 추상미술 사조를 이끈 작가들의 대표작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는 홍 관장의 개인적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던 이 회장 부자(父子)와 달리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의 홍 관장은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현대미술품을 수집해왔다. 특히 미니멀리즘 등 전후 추상미술 사조를 좋아한다고. 이 외에도 최신의 미술 흐름에 따라 매튜 바니, 데미언 허스트 등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작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렘 쿨하스가 설계한 ‘블랙박스’는 기획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사실 리움의 기획전시는 모든 미술동네 사람들의 관심사다. ‘최고 실력자’ 리움에서 어떤 전시가 열리느냐에 따라 한국 미술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 현재 리움 건축가 3인의 예술세계를 살펴보는 ‘뮤즈-움? : 다양성의 교류’전이 열리고 있고, 앞으로 이중섭 드로잉전과 비디오 아트의 대가 매튜 바니의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삼성미술관 홍보팀 박민선 과장은 “국내 대가들의 기획전이나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전시를 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린이 미술교육에 관심이 많은 홍 관장의 뜻에 따라 블랙박스 밑에는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홍 관장은 “어린이들의 창의력과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줄 교육 시스템 하드웨어를 연구 개발하는 곳으로, 성과물은 삼성어린이박물관이나 삼성어린이집의 교육 커리큘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무려 8년여에 걸쳐 1200억원(부지비용 및 부대비용 제외)을 쏟아부은 리움은 규모에서나 소장품에서나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를 건립하는 데는 홍라희 관장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미술관 기획부터 완공까지 모든 단계의 작업을 그가 직접 관리했다. 특히 외환위기 여파로 공사가 중단됐을 때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왼쪽부터 삼성미술관 홍라희 관장,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 관장, 아트선재센터 김선정 전 부관장, 성곡미술관 박문순 관장. 한국 미술계를 이끄는 재벌가 여인들이다.
삼성 컬렉션 1만5000점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리움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대가 반열에 오르지 않으면 리움에 입성하기조차 어렵다는 것. 또 입장료가 1만원이나 되고 하루에 300명씩 예약을 통해서만 관람할 수 있으며, 작품에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면 경보음이 울려 관객이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성미술관 홍보팀 박민선 과장은 이렇게 해명했다.
“입장료 1만원을 받는다고 이익이 나는 것을 아니다. 그저 미술관 운영비 일부로 보전할 뿐이다. 예약을 통해 정해진 인원만 관람하게 한 것은 관객들이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리움은 소장품 중심의 미술관이므로 대가 중심, 명작 중심인 것이 사실이다. 기획전 역시 최고 수준이 될 것이다. 대신 호암미술관이나 로댕갤러리를 통해 신진이나 중견 작가들에게도 전시의 기회를 제공한다.”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은 고미술품 중심으로 운영하되 명품보다는 민화나 공예품을 주로 전시해 친근한 민속 문화를 맛보게 하고, 서울 태평로 삼성플라자에 있는 로댕갤러리는 젊은 작가들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전시를 할 예정이다. 한 예로 지난해 9월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장영혜중공업전’에서는 삼성으로 표상되는 한국 자본주의를 비난한 작품 ‘삼성’을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삼성에서는 이 ‘삼성’을 직접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삼성이 소장한 컬렉션은 국보·보물 150여점을 포함해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합쳐 1만5000여점에 이른다. 삼성미술관의 학예연구원은 12명(보통 미술관들은 2∼3명의 학예연구원으로 운영된다), 근무하는 직원만 200여명에 이른다. 학예연구실장은 이사급이다. 여느 사립미술관에서는 상상도 못할 파격적인 지원이다.
리움은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과 한국 여행정보 사이트에서 거론되면서 한국에서 반드시 가야 할 명소로 부각됐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 건축가의 명성도 일조했다. 삼성에서도 외국의 VIP급 인사들이 오면 리움을 관람케 한다. 그러면서 삼성이 ‘휴대전화만 최고가 아니라 문화 마인드도 최고’라는 인식을 심고 있다.
인터넷, 모바일 이용한 전시
삼성미술관만큼 대규모는 아니지만 내용 면에서 그에 견줄 만할 곳이 SK가 운영하는 아트센터 나비다. 관장은 최태원 SK 회장의 부인 노소영씨. SK의 미술 사랑은 나비의 전신인 워커힐미술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인 박계희 당시 관장은 앤디 워홀의 국내 최초 개인전을 비롯해 피카소, 오펜하임 등 굵직굵직한 거장을 국내에 소개했다. 박 여사는 미국 미시간주의 카라마주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을 만큼 조예가 깊어 초창기 한국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때 수집한 소장품이 450여점.
1997년 노소영 관장은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워커힐미술관을 맡으면서 미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독일 바이마르시대의 사회비판적 판화와 데생전을 기획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노 관장이 미술관 살림을 맡으면서 2000년 12월 워커힐 호텔에 있던 기존 미술관은 문을 닫고 서울 종로구 SK 본사 사옥 4층에 나비를 개관했다.
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노 관장이 운영하는 나비는 순수예술보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미디어 아트 쪽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미디어 아트란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매체를 예술과 접목하는 작업을 말한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이 이 분야의 선구자로 꼽힌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 새롭게 등장하는 모든 매체가 미디어 아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2개 이상의 매체를 통합해 사용하기도 한다. 나비라는 이름은 ‘꽃에 도움을 줘 열매를 맺게 하는 매개자 나비처럼 미술과 테크놀로지, 인문학과 사회학, 생물학 등 다른 학문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되겠다’는 의미.
나비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해왔다. ‘리퀴드 스페이스(Liquid Space)’전, ‘언지핑 코드(Unzipping Codes)’전, ‘꿈나비 2004 : 디지털놀이터’전, ‘아트 앤드 사이언스 스테이션(Art & Science Station)’전, 워치 아웃(Watch Out)’전 등이 대표적인 전시로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감성이 어떻게 교감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동통신기술을 이용한 ‘워치 아웃(Watch Out)’전은 관객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보낸 메시지가 일정 장소에 투사, 디스플레이되는 형식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나비의 전시는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고 영상을 투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전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 전시가 센터 밖에서 이뤄졌다. 또한 같은 전시를 여러 곳에서 관람할 수도 있다.
아트센터 나비가 이동통신기술을 이용해 선보인 ‘워치 아웃’전.<br>이렇듯 나비의 색깔을 결정하는 데는 모기업, 특히 SK텔레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독특한 모양새로 서울 을지로 2가의 명물이 되고 있는 SK T-타워. 1층 실내와 건물 외부를 휘감아 돌아가는 9m 길이의 띠 구조체가 현란한 영상을 통해 하나의 영상 갤러리가 된다. 이곳에 설치된 LED는 그 자체가 독창적인 조형물인 동시에 다양한 영상이 안팎을 드나들게 하는 매개체다. 이것도 나비의 프로젝트로 커뮤니케이션의 약자인 ‘COMO’라 불린다.
아트센터 나비의 최두은 전임학예연구원은 “작가들이 만든 영상작품을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도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COMO’ 라는 공간은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비의 색깔을 결정하는 데는 일찍부터 미디어 아트를 연구해온 노소영 관장과 모기업, 특히 SK텔레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노 관장은 국내외의 다양한 미디어 아트 작품들을 연구하고 국제적인 대회에 참가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읽어갔다. 한때 경희대학교 겸임교수로 출강했지만 미술관 운영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하고 대신 특강 형식으로 미디어 아트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에 관한 한 학예연구원들보다 더 많이 알고, 모든 프로젝트에 한 명의 팀원으로 참여해 함께 연구한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나비가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잃은 채 SK텔레콤을 위한 부속기관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것이 나비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최두은 연구원의 설명.
“미디어 아트는 세계적인 추세이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순수예술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미디어를 환경으로 하는 다양한 아트 작업을 통해 산업계, 학계와의 시너지를 모색하는 것이 나비가 추구하는 바다. SK텔레콤뿐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하는 모든 사업체가 나비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보수화하는 아트선재센터
모그룹의 몰락에도 전시를 중단하지 않은 아트선재센터(서울 소격동)는 특히 젊은 작가들이 실험성과 예술성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얘기를 하려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관장과 딸인 김선정 전 부관장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정희자 관장은 25년 전부터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청전이나 심정 등 근대 동양화가의 작품들과 도상봉, 김환기 등 국내 대가의 유화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만 해도 200여점에 이른다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대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관장은 경주에 있는 아트선재미술관도 운영하고 있다.
김선정 전 부관장은 실험적이고 발랄한 젊은 작가 등용에 주력하며 한국 화단에 활력을 제공해왔다. 아트선재센터의 부관장으로 있으면서 전시를 30여 차례 기획했는데, 모두 참신성과 실험성을 인정받았다. 또 이불, 최정화, 정서영, 이동기, 오형금, 김범, 박이소 등 최근 세계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견 및 신진 작가의 작품을 수집, 소장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초 갑자기 부관장직을 사임했다. 당시 그는 “격무에 지친 데다 아이 공부 뒷바라지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술동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양의 대가들을 좋아하는 다소 보수적인 경향의 어머니 정희자 관장과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최신 미술계의 흐름을 좇는 실험적인 전시를 하려는 김선정 전 부관장의 견해차가 커 갈등을 빚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김선정씨는 오는 6월 개막하는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지난 3월11일 그는 배영환, 최정화, 김홍석, 김소라, 김범 등 15명을 참여작가로 선정했다. 우리 현대미술의 개성과 힘이 느껴지는 젊고 실험적인 작가 위주로 선정한 듯하다.
아트선재센터는 현재 개보수 공사로 인해 지난 1월부터 전관 휴관중이다. 아트선재센터 관계자는 “단순히 건물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의 성향 자체를 새롭게 바꾸고 거기에 맞춰 건물을 보수해야 하기 때문에 공사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늦으면 1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밝혔다. 기존 학예연구원들도 상당수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씨가 운영하는 성곡미술관은 앞서의 미술관들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1995년 쌍용그룹 창업주인 고 김성곤 회장의 서울 신문로 자택을 갤러리로 꾸며 문을 연 성곡미술관은 대형 전시보다 대중을 위한 소형 전시가 주를 이룬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 확립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내의 중견, 신진 작가 위주로 연 15∼17회 전시를 진행한다. 다른 미술관보다 횟수가 많은 편인데, 소형 전시가 많은 데다가 본관과 별관으로 전시 공간이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국내 현실을 감안해 깊이 있는 전시를 적게 하는 것보다 다소 가볍더라도 대중에게 많이 선보이는 게 좋다는 미술관 내부의 판단이기도 하다. 컬렉션은 국내 중견 작가들의 작품 중심으로 400여점에 이른다.
성곡미술관의 자랑거리는 ‘내일의 작가’ 지원 프로그램과 인턴십 프로그램,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이다. 신정아 학예연구실장의 설명이다.
“‘내일의 작가’는 35세 미만의 신진 작가를 4명 선정해 400만원을 지원하고 전시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6월 선정하는데, 경쟁률이 8대 1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턴십은 젊은 전시기획자를 지원하는 제도다. 매해 8∼10명의 인턴을 뽑아 업무를 가르치는데, 교육만 하는 다른 미술관들과 달리 1년 후 이들이 공동으로 직접 전시기획을 하게 한다.”
수령이 수십년 넘는 100여종의 나무가 숲을 이룬 가운데 국내외 작가들의 조각품들과 조화를 이루는 조각공원 또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다 보니 관람객도 한달에 3000여명으로 꽤 많다.
박문순 관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소장품 선정이나 규모가 큰 기획전 등에는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 전공자인 학예연구원들이 놓칠 수 있는 기획·경영적 측면에 대해 조언하는 편. 김석원 전 회장 부부가 미술관 3층에 거주하는 것도 흥미롭다. 특히 박 관장은 1주일에 2∼3번 직접 쿠키를 구워 미술관 내 찻집에 내놓는다고 한다.
한편 모기업인 쌍용이 외환위기 당시 굵직굵직한 사업체를 매각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졌지만 미술관만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 실장은 “성곡미술문화재단의 기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모기업의 상황과는 큰 상관이 없다. 전시 횟수는 오히려 늘어났다”고 밝혔다.
젊은 작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금호미술관도 성곡미술관과 성향이 비슷하다.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의 누이동생인 박강자 관장이 맡고 있는 금호미술관은 1989년 개관 이래 중견이 되기 전의 신진작가를 중점적으로 후원해왔다. 김윤옥 학예연구원은 “지금 한국 미술계에 중견으로 뿌리내린 작가 중 상당수는 금호미술관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올해도 16명의 젊은 작가를 선정, 3월부터 다음해까지 개인전을 마련해줄 계획이다. 이들에게는 전시공간을 제공하며 함께 도록 제작비 등 창작지원금도 준다. 현재 10여명의 작가가 함께 입주할 수 있는 스튜디오 부지도 알아보고 있다.
박 관장은 소장 작품을 선정하는 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컬렉션은 1000여점에 이른다. 또 음악을 좋아해 2002년 ‘내 마음의 낙원 - 어느 미술관 관장의 사색과 꿈’이라는 가요음반을 내기도 한 그는 금호미술관을 음악과 미술이 어우러지는 복합 예술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경영 악화를 이유로 2003년부터 대관료를 내는 사람에게 전시공간을 빌려주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또한 금호그룹이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박성용 회장가의 영향으로 음악 부분에 메세나(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 활동)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지만, 미술 부문에서는 필요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사옥 전체가 갤러리
사옥 전체를 갤러리로 꾸며놓은 기업도 있다. 태광그룹은 서울 광화문에 있는 흥국생명빌딩 1층을 시민을 위한 열린 갤러리로 만든 것이다. 로비에 들어서면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아름다운 강산’이 펼쳐져 있다. 8040개의 작은 나무 프레임 하나하나에 우리나라의 자연과 문화, 일상이 담겨 있고 이것들이 모여 ‘아름다운 강산’을 이룬다. 작품의 크기는 가로 31.73m, 세로 2.65m에 이른다.
발밑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코드가 새겨져 있다. 바코드의 뜻은 ‘태광 50주년, 일주의 뜻으로 광화문에 세우다’라고 한다. ‘일주’는 태광그룹의 창업주 고 이임용 선생의 호. 뒤쪽 로비로 가면 독일의 세계적인 조명 아티스트 잉고 마우러의 홀로그램 기술을 조명에 이용해 디자인한 60여개의 홀론스키를 연속으로 설치한 ‘홀론스키 사열’이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 미국 작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설치 조형물 ‘망치질하는 사람(해머링맨)’이 있다.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이 철제 조형물은 높이 22m에 무게 50t. 오른손에 들린 망치가 1분17초 간격으로 서서히 내리치게 설계돼 있다. 독일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 등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서울에 설치된 이 보형물은 이제 광화문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해머링맨은 이른바 ‘1%법(건물을 지을 때 공사비의 1%를 미술품 구입에 쓰라는 문화예술진흥법)’과 상관없이 별도 예산으로 설치됐다.
1층과 지하 2층에는 2000년 태광그룹이 설립한 일주아트하우스의 미디어 갤러리와 아카이브, 예술영화 전용극장인 시네큐브와 아트큐브 및 스튜디오 시설이 있다. 일주아트하우스의 운영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기획 및 운영을 전문가인 외주업체에 맡긴 채 그룹 차원에서는 1년에 3억원씩 후원만 하는 것. 1층 로비는 일주아트하우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또 비디오 아트 작품은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상영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엔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길 수 있는 온갖 해프닝을 찍은 작품을 엘리베이터에서 상영해 흥국생명빌딩을 방문한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입장료를 낸 특정 관객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미술작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퍼블릭 아트(Public Art) 개념이 강하다.
태평양도 미(美)를 추구하는 기업답게 미술에 관심이 많다. 특히 2003년 9월에 개최한 ‘크로매틱 센세이션 바이 헤라’전은 태평양이 1억5000만원을 지원하고 전시기획까지 맡아 화제를 모았다. 세계적인 작가 데미언 허스트를 비롯해 국내외 작가들이 ‘색(色)’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태평양 창업주인 고 서성환 전 회장은 여성 장신구, 화장용구, 다구 등 한국의 미와 차에 관련된 유물을 꾸준히 모았다. 아들인 서경배 사장은 여기에 더해 화려한 색채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을 수집해오고 있다. 태평양은 현재 총 8400여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게 됐고, 이를 경기도 용인에 있는 태평양박물관에서 전시,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없는 대기업, 부끄러워해야”
미술관들은 주로 국내외 화랑을 통해서 소장품을 구매한다.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세계적인 경매회사나 작가를 통해 구매하기도 하지만 비중은 높지 않다. 최근 들어 국제적 규모의 아트페어(Art Fair·여러 개의 화랑이 한곳에 모여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피악, 스위스의 바젤, 미국의 시카고 아트페어가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힌다)를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최근 몇 해째 국내 미술계에서 대형 작품을 구입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기업미술관들의 소장품 중 상당수가 10여년 전에 구입한 것이고, 미술관 관계자들도 “경제여건 등으로 인해 현재 컬렉션을 줄이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만큼 한국 미술계는 장기불황에 빠져 있다. 몇몇 미술관을 제외한 대다수 사립 미술관은 운영난에 허덕이고 문을 닫는 상업 화랑이 속출하고 있다. 기업미술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림산업과 대유증권이 각각 설립한 대림미술관과 영은미술관은 그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으나 지난해 재정난에 봉착하면서 수석 학예연구원들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술계 사람들은 “기업들이 작품을 많이 ‘사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적으로 대규모 컬렉터라고 불릴 만한 사람(기업인 포함)은 20∼30명에 불과하다. 기업미술관도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 각 기업의 문화재단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아직 미약한 수준이다. 특히 고급 예술로 인정받는 미술에 대한 투자는 더욱 그렇다. 한 미술계 인사는 “메세나가 강조되는 요즘 LG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에 변변한 미술관 하나 없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갈했다.
취재 중 만난 한 학예연구원의 말이다.
“프랑스에 갔을 때 소르본 대학 내 소규모 전시회의 후원사가 삼성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전시회지만 전시 관계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후원을 한국 기업이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과 삼성의 이미지는 그들에게 뚜렷이 새겨질 것이다. 투자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