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어린 참회와 서정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안겨준 시인. 이역의 차디찬 감옥에서 2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독립운동가. 그러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윤동주와 그의 시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지난 2월16일은 윤동주의 60주기였다. 그의 유일한 혈육과 뜻있는 학자들이 60년 만에 다시 그려낸 시인의 ‘문학 초상’.
은진중학교 시절의 윤동주(오른쪽)와 그의 절친한 벗 문익환(뒷줄 가운데).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 윤동주 연구의 원전으로 취급되어온 저간의 사정에는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시인 자신의 손에 의해 발표된 것이 아니라 모두 ‘유작(遺作)’ 형태로 유가족을 통해 공개됐다. 사정이 이렇다면 윤동주 연구자 중 누구라도 원본에 접근해 한 번쯤 유작으로서의 자격을 검증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집의 편집과정에 줄곧 고 정병욱 교수가 깊숙이 관여한 점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병욱 교수가 누구인가. 그는 윤동주가 생전에 육필로 된 자선 시고집(詩稿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편 수록) 중 하나를 넘겨줬을 만큼 연희전문 시절 아주 가까웠던 친구였다. 더구나 그는 국문학자다.
하지만 인문학 연구의 경우 원전 확정 문제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기본 요건이다. 뿐만 아니라 고 정병욱 교수의 누이는 윤동주의 동생인 고 윤일주 교수와 결혼했다. 따라서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사후 그 유가족과 가족관계가 된 것이다.
일반 독자가 아닌 전문 연구자라면 애당초 원전 확정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이미 시인이 타계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임에도 ‘유작(遺作)’들이 자꾸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어야 했다.
실제로 윤동주의 유작은 1948년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경우 31편이 수록됐는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진지한 연구자라면 이제 어느 판본을 ‘윤동주 연구’의 원전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육필 시고에 접근하려 나선 연구자는 없었다는 것이 유가족의 증언이다.
이러한 기현상을 답답해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연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유가족이었다. 그들은 윤동주 연구의 새 장을 열기 위하여 용단을 내렸다. 윤동주가 생전에 남긴 모든 육필 초고를 사진 자료로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1999년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발간된 직후 이를 입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면밀하게 대조했고, 그 결과 그동안 원전 노릇을 해온 이 유고 시집을 원전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나는 줄곧 원전 확정 작업에 매달려왔다. 내가 윤동주 시들의 원전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사진판’의 1차 자료에 나타난 어휘에 덧붙인 교정, 해설만도 1700여 항목에 달한다. 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텍스트의 어휘 중 1차 자료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려 570여 곳이었다. ]
홍장학 교사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지난해 7월 ‘정본 윤동주 전집’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 두 권을 펴냈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는 이 책들을 ‘2004년 올해의 도서’로 선정했다.
세 가지 버전, ‘오줌싸개 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행사’를 취재하던 필자는 뜻밖의 소득을 얻었다. 윤동주 시인의 친척인 김태균(85·전 경기대학교 교수)씨와 연결이 된 것. 1986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현재 토론토에 살고 있는 그는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 외5촌 조카인 윤동주 시인의 집에서 살았는데, 그것도 한방에서 2년 동안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1936년 당시 윤동주 시인의 시 창작 과정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나중에 시집에 실린 것을 보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김태균씨는 그 증거로 필자에게 ‘오줌싸개 지도’라는 동시를 두 가지 형태로 암송해줬다.
그러나 김태균씨는 홍장학 교사의 원전연구를 통해 제3의 ‘오줌싸개 지도’가 나타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필자가 그 시를 읽어주자 김태균씨는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세 개 중 내가 윤동주 시인과 함께 지내던 방에서 접한, 맨 처음의 ‘오줌싸개 지도’가 제일 좋다”고 말했다.
김씨는 윤동주의 시 창작과정을 ‘신동아’에 최초로 들려줬다. 그는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다. 내가 국문학자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암 투병으로 불편한 몸이지만, 내가 아는 윤동주의 한때를 늦게나마 증언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가 보내온 ‘김태균의 윤동주’ 중에서 일부를 원문대로 옮긴다.
윤동주의 산문 ‘종시’의 육필 초고. 좌측 페이지가 예리하게 도려져 있는데, 홍장학씨는 윤동주가 아닌 제3자가 이 부분을 잘라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은 수많은 독자의 기림을 받고 있으나, 작품에 대한 미적 분석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며 심지어 오독(誤讀)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국내 논저가 수백 편에 이르면서도 그 성과가 빈약했던 이유는 윤동주의 개별 텍스트들이 지닌 탄탄한 미적 구조에 대한 분석 미흡, 전체 텍스트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상호 연관성에 대한 체계적 분석 부재, 성서와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이해 부족, 무려 50년간(1948~98) 사실상 윤동주 문학의 원전으로 간주돼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부분적 오류 등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윤동주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동주의 개인사적 측면(가족사, 성장 과정, 피체 및 순절 등),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상황 및 북간도의 지정학적 상황 등 발생론적 관점이나 반영론적 관점에 기대어 조명됐다. 1990년대 이후에 와서야 구조주의, 신화·원형 비평, 기호학, 심리학 등 서구의 문예이론을 동원한 다채로운 분석이 시도되고 있으나 그 성과는 아직 미약하다.
윤동주의 작품에는 기독교적·성서적 상징이 시종일관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필 시고 형태로 남아 있는 최초의 텍스트인 ‘초 한 대’(1934.12.25)에서부터 순절 직전 남긴 ‘흰 그림자’(1942)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상징이 꾸준히 나타나는데, 대체로 1941년 이후 윤동주 말년의 작품들은 기독교적 신앙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윤동주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그간 수백 편의 논저가 발표됐음에도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가령 일부 논문에서 ‘팔복’ ‘종시’ ‘또 태초의 아침’ 등의 텍스트에 대해 “반기독교적이다, 또는 기독교적 허무주의가 표출된 것이다” 등으로 논평하고 있으나, 이는 어이없는 오독의 결과다.
필자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 쓰기는 초기인 1934년부터 마지막 집필 시기인 1942년까지 줄곧 기독교 신앙과 분리되지 않고 있다.
사족으로 윤동주의 텍스트 바탕에 흐르는 이념은 저항적 민족주의임에도 당시 젊은 지식인 사이에 유행하던 사회주의(공산주의)와의 거래가 일체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가 사회주의적 가치관과는 배타적 관계에 있던 기독교 신앙과 유교적 휴머니즘을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또 다른 각도에서 방증하는 것이다.]
홍장학 교사는 시드니 강연에서 ‘시드니 선언’이라 불릴 만한 발언을 했다.
“지난 60년 동안 지속된 윤동주 시 연구는 사실상 준비작업에 불과했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근거로 시의 원전이 확정되어가는 지금이 본격적인 연구의 출발선이다. 은사나 선배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자살행위로 간주되는 국내 학계의 경직된 상황에서 나는 고등학교 교사라는 홀가분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기’ 식의 발언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가 상처를 받더라도 윤동주 연구는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발언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해서도 아주 결연한 어조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잘못된 원전으로 연구했던 부분을 보완해 ‘생산적인 논쟁이나 토론의 장’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나 또한 스타트 라인에 선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논쟁이나 토론에 적극 참여할 각오가 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 행사를 주관한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들. 가운데 노(老)부부가 윤혜원·오형범씨.
간도는 추운 곳이다. 저녁에 공부를 하려면 코가 시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서 책을 읽는 게 보통이었다. 동주는 이 시간이 되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메워진 수첩을 꺼내놓고 무엇을 써넣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다가 원고용지로 된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라는 노트에 종종 정서(正書)하곤 했다.
동주의 작업에 관심이 생겨서 내 할 일은 잊어버리고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노라면 그는 정서가 끝난 노트를 내게 보여줬다. 그중에서 지금도 기억하는 동시가 하나 있다.
나의 동생은 밤이면 요에다 지도를 그려요어저께 그린 것은 조선 지도지난밤에 그린 것은 만주 지도내일은 세계 지도를 그리려느냐-김태균이 기억하는 ‘오줌싸개 지도’ 전문
그때 나는 이 동시를 읽고 눈물이 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동주의 동생 일주는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는데도 밤이면 요에다 오줌을 쌌다. 겨울철에 그 요를 빨랫줄에 걸어놓으면 거기서 김이 무럭무럭 나다가 저녁때가 되어 마르면 그 자리가 몇 겹의 지도가 되곤 했다.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윤혜원씨.
그러나 동주는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는데, 며칠 후 이런 동시가 나온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난다’더니, 그의 시는 손을 펼칠 때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요술이었다.
그 시에는 “어저께까지는 네가 몸도 작고 생각도 좁아서 조선만한 지도밖에 못 그렸지만 오늘 그린 지도는 제법 크구나. 조선의 몇 십 배 되는 만주만큼 큰 지도를 그렸으니 말이다. 부디 잘 자라서 훗날에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많은 업적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는 사랑의 기원이 담뿍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동시를 읽은 후, 도를 얻고 눈이 트이는 경지에 이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천 마디의 연설보다 단 몇 줄로 된 시 한 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더 강하고 진실했다.
평이하지만 가슴 뭉클한
문학이란 이런 위대한 기능을 가졌고, 그 효용가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동주의 행동거지는 내 삶의 지표가 됐다. 나는 그가 읽는 책을 옆에 끼고 다녔고, 옷이고 글씨고 모두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하려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동주의 유고집 증보 제3판이 나왔을 때, 나는 또 다른 윤동주의 일면을 보게 됐다. 거기에는 아주 다른 내용의 ‘오줌싸개 지도’가 있었다.
빨랫줄에 걸어 논요에다 그린 지도지난밤에 내 동생오줌 싸 그린 지도꿈에 가 본 엄마 계신별나라 지돈가?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 지돈가?-정음사 간행 제3판에 실린 ‘오줌싸개 지도’ 전문
윤동주 묘소를 찾은 윤혜원(앞줄 오른쪽 두번째) 오형범(앞줄 왼쪽 세번째) 부부.
그러나 문학의 창작이나 수용의 입장에서는 그 둘 사이에 큰 갈림길이 있음을 본다. 둘 다 소재는 같지만 두 번째 시는 첫 번째 시처럼 교훈이나 목적 같은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목적이 강하면 문학은 그 수단으로 전락한다. 두 번째 시는 어린아이가 꿈꾼 세계를 그렸을 뿐이다.
어머니 계신 나라는 모국(母國)인 조선이고, 별나라는 모국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 아빠 계신 만주는 작가의 현주소이고, 엄마 계신 별나라는 꿈과 동경의 세계다.
그의 경험을 보면, 동주는 숭실학교 시절에 평양의 대동강, 능라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광명 시절에는 수학여행에서 금강산 만이천봉의 신비스러운 절경을 보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윽한 해당화의 향기를 맡으며, 걸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명사십리를 거닐던 기억도 갖고 있었다.
사실 간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 강 하나를 두고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놀라게 된다. 맑은 하늘, 초목이 우거진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시냇물과 그 향기, 새들의 노래, 모든 것이 꿈의 세계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윤동주가 제일 좋아한 노래가‘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였으니 내 고향이 바로 어머니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윤동주의 시 전반을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곧 자신의 생활이고, 그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나는 참회와 가슴 뭉클한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다가서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시의 흐름을 볼 때, 동시 ‘오줌싸개 지도’에서 첫 번째의 것을 버리고 두 번째의 것을 택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2004년에 발간된 ‘정본 윤동주 전집’에 실린 ‘오줌싸개 지도’는 다음과 같다.
밧줄에 걸어 논요에다 그린 지도는간밤에 내 동생오줌싸서 그린 지도
위에 큰 것은꿈에 본 만주 땅그 아래길고도 가는 건 우리 땅. ]
2004년 12월12일 남산 문학의 집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에서 상지대 신길우 교수가 발표한 논문은 제목 자체가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다. 사정이 이쯤 되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서글픈 마음으로 불렀을 윤동주 시인의 문학적 초상을 다시 그려야 할 것 같다.
윤동주의 고향은 잘 알려진 대로 북간도다. 구한말의 국운쇠퇴기에 주로 함경도 지방의 조선인들이 이주해 터를 잡았던 ‘이주민의 땅’ 북간도. 그곳은 일제에 강탈당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이 암약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기도 했다.
북간도에서도 ‘밝은 동쪽 마을’ 혹은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明東村)이 윤동주의 출생지다. 1917년 12월30일, ‘해환’이라는 아명(兒名)의 윤동주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곳은 청나라의 발원지인 중국 땅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윤동주는 남의 나라 땅에서 태어난, 조금은 ‘슬픈 족속’이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윤동주의 詩 ‘슬픈 족속’ 전문
왼쪽의 사진은 윤동주의 동시 ‘봄1’의 육필원고, 가운데는 정병욱 교수가 갖고 있는 육필원고, 오른쪽은 윤동주의 동시 ‘굴뚝’의 육필원고다. 윤 시인이 쓴 함경도 방언 ‘가마목’을 정병욱 교수가 서울말 ‘부뜨막’으로 고쳤다. 동그라미 안의 글자들을 비교해보면, 윤동주의 필체와 정병욱의 필체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윤동주는 잉크를 사용하여 퇴고했는데 ‘부뜨막’이란 단어의 퇴고는 연필로 하여 흐릿하다.
북간도 룽징에서 나고 묻히다
20세기의 첫 해에 이주민이 된 윤동주의 선조들은 한 해 먼저 정착한 조선사람들과 함께 농토를 일궜다. 함경도 지방의 지식인이면서 선각자인 이들은 명동촌에 명동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여러 개의 교회를 세워 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어나갔다.
윤동주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명동소학교와 룽징에 있는 미션스쿨 은진중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 동갑내기 친구인 문익환 등과 함께 공부했다.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반대 표시로 자퇴하고 만다. 다시 룽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이하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만류해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한국인의 최고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그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학창생활을 보낸 윤동주가 본격적인 시련기에 접어든 때가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942년경이다. 그는 도일(渡日) 수속을 밟기 위해서 ‘平沼東柱’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그 무렵 쓴 시가 ‘참회록’이며, 이는 윤동주가 한국에서 쓴 마지막 시가 됐다.
윤동주는 동경 릿교(入敎)대학에서 6개월 정도 영문학을 공부하다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겨 역시 영문학을 공부하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 갇혔다.
조국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16일,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윤동주는 ‘영원한 청년’의 고결한 이미지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일본에서 화장한 윤동주의 유해는 출생지인 북간도 룽징에 묻혔다.
고구려의 강, 해란강 자락에서해처럼 환하게 피어난 아이…해환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눈빛 맑은 아이가 해종일 걸어다녔던북간도, 거긴 남의 나라 땅이었다
조심스레 詩의 씨앗을 묻어두었던숭실학교와 광명학교, 깨친소년이 서툴게 언어의 집을 지었던평양, 거긴 빼앗긴 땅이었다
여러 겨울을 견뎌내며 틔워낸 씨앗꽃을 피워도 슬픈 연희전문학교입을 꼭 다문 청년이 혼자 거닐었던한강, 거기도 빼앗긴 강이었다
교토의 도시샤 대학교, 꿈을꾸는 일조차 거부당한 식민지 청년은모국어로 쓴 시편들과 함께후쿠오카 감옥에 갇혀버렸는가
아아, 감옥에도 강물은 흘러광복 직전의 어둠까지 흘러1945년 2월16일 03시악! 하는뜻 모를 외마디 소리를 두고뚝 멈춰버린 강… 60년
님께서 묻혀 있는 북간도, 거긴여태도 남의 나라 땅이다- 윤필립의 詩 ‘순례자의 강 2’ 전문
위의 시에 나오는 ‘해환’은 해처럼 환(煥)하다는 뜻의 윤동주의 아명이다. 1995년 ‘윤동주 시인 50주기 추모문학제’에 낭송하기 위해서 ‘순례자의 강 1’을 썼던 필자는 ‘윤동주 시인 60주기’에 맞춰서 ‘순례자의 강 2’를 썼다.
윤동주 시인의 묘소 앞에서 ‘서시’를 낭송하는 중국 동포 소녀들.
그 때문일까.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 열기는 모국이 아닌 해외에서 더 뜨겁다. 여동생 윤혜원씨가 살고 있는 호주 시드니와 그의 고향 룽징을 비롯해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특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일본에서는 사흘에 걸쳐 도쿄, 교토, 후쿠오카에서 다양한 형태의 추모행사가 펼쳐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모 신문사 기자의 칼럼처럼 ‘조촐한 너무나 조촐한’ 윤동주 60주기 추모제가 연세대 안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서 열렸다고 한다. 유족대표로 윤인석 교수가 참석했고, 연세대 총장과 학생 등 2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보도됐다.
여동생 윤혜원씨는 “서울의 유족들이 조용하게 추모하기를 원한 것으로 안다”면서도 섭섭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2004년에 심장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윤혜원씨는 남편 오형범(82·시드니 우리교회 장로)씨와 함께 시드니 추모행사의 다과를 손수 준비했다.
한국에는 윤동주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40명 가까이 되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각종 연구서적도 수십 권에 이르며, 학술논문은 300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윤동주 문학상’도 2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호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특별강사로 초청된 홍장학 교사는 “윤동주 시인은 국민시인이다. 그의 60주기를 그런 식으로 보내다니 참으로 실망스럽다. 얼마나 고독하게 죽어가신 분인데…”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서울에선 조금 이른 시기에 윤동주 추모행사가 열렸다. 2004년 12월, 서울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가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회장 김우종)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후원으로 열린 것.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의 추모행사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지난 2월12일 일본 후쿠오카 클로오코트 호텔 세미나실에서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 문학 세미나’를 마련한 것. 이들은 세미나 다음날인 2월13일 오전에도 일본 후쿠오카 구치소(옛 형무소) 뒷마당에서 한국문인 26명, 일본인 8명, 미국동포 시인 1명 등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다음은 서울 문학의 집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에서 문학계간지 ‘문예춘추’의 신길우 주간이 발표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들’의 요약이다.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들
[ 이 글은 본인이 2003년 3월 중국 옌볜대 초빙교수로 근무할 때 마침 윤동주의 묘를 개수하러 옌지(延吉)에 와 있던 윤혜원·오형범 부부와 여러 차례 만나서 직접 들었던 이야기다.
묘비에 ‘詩人’이라 붙인 이유 :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윤동주는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발표된 시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45년 6월14일에 세운 윤동주의 묘비에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시인으로 등단한 일도 없고 시집을 낸 사실도 없는데 어째서 ‘시인’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장례식이 끝난 뒤 묘비 건립을 준비하면서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 육필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이 육필시집은 윤동주가 1941년 12월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 자선 육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여 낸 것이다. 이 시집은 육필로 3벌을 만들었는데, 1벌을 당시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또 1벌은 정병욱에게 줬다고 했다.”
묘비에 연호(年號) 대신 서기(西紀)를 쓴 까닭 :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가 아닌 서기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연호를 사용했는데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이에 대해 오형범씨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들려줬다.
“윤동주는 한국사람이지요. 더구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습니까”
비문(碑文)은 부친의 친구인 김석관 선생이 짓고 썼는데, 그는 윤동주의 스승이자 명동학교의 학감을 지낸 분이다. 비문도 일제 강점기의 것이라 그 속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운명하니.”
호주 초청 강연중인 홍장학씨.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1948년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여러 나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호주에 전해졌다. 윤 시인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동생 윤혜원씨가 호주 시드니에서 19년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출생지인 옌볜 자치주에서 전해온 소식부터 전한다. 옌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개최한 ‘윤동주 서거 60주기 추모 모임’ 소식인데, 표현방식이 특이해 분량만 줄여 원문대로 옮겨본다.
[오늘은 2월16일,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 서거 60주기 기념일이다. 옌볜인민출판사 ‘중학생’ 잡지 편집부와 옌볜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 내리는 야외 룡정(龍井) 동산의 윤동주 시인 묘소에서 뜻깊은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조성일 회장은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 세대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기에 손색이 없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 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 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옌볜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 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윤동주 시랑송. 석화 시인이 윤동주의 ‘서시’를 랑송한 뒤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서시’를 재차 랑송하여 시랑송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초·고·중 대표 녀학생 5명도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를 읊으면서 윤동주 시랑송에 열을 올리였다.
정오가 되어 추모모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참가자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숫눈길을 헤치며 룡정시가지에서 늦게야 점심상을 받았을 때 연길고급중학교 1학년 허은희 학생이 “날씨는 추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고 속셈을 털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일본 교토에 거주하는 박세용(45·도시샤 코리아 동창회 이사)씨는 도시샤 대학에서 무려 6시간 동안 진행된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 소식을 시드니로 알려왔다. 일본에서 열린 윤동주 60주기 추모행사는 2월11일 도쿄, 12일 교토, 13일 후쿠오카로 이어졌다.
12일 행사에서 윤동주 시비에 헌화한 일본인 동창생은 “윤동주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난다. 그와는 주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조선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금세 얼굴표정이 굳어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교토 행사에서 눈에 띈 것은 각 행사의 사회를 민단, 조총련, 일본인이 나눠 맡은 것이다. 제1부는 김용주 도시샤 코리아 동창회 부회장(민단계)이 맡았고, 제2부의 시낭송 행사는 일본성공회의 이다 목사가 진행을 맡아 해박한 시 해석을 곁들였다. 제3부는 도시샤 코리아 동창회 박동무 총무(조총련계)가 사회를 맡았다.
박세용씨는 윤동주의 시 대부분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암송한다. 그는 윤혜원씨 부부와 함께 윤동주 묘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묘소 앞에서 윤동주의 시를 줄줄 외워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중국동포 평론가의 ‘저항시인론’
다음은 1992년 3월 중국작가협회 옌볜분회 기관지 ‘천지’에 수록된 중국동포 평론가 임윤덕씨의 글 ‘저항시인 윤동주’에서 발췌한 것이다. 임씨는 한국에서 발표된 오세영, 마광수, 김흥규의 글 중에서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가 아니다’라는 대목을 접하고 이를 반박하는 평론을 썼다. 원문 중 일부를 표현 그대로 옮긴다.
[시인 윤동주는 이 땅에 태어나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심했던 1934~42년 시기에 주옥 같은 불멸의 시를 쓰고는 8·15 해방을 눈앞에 두고 일제감옥에서 순절한 민족의 저항시인이다.
우리 문단(옌볜)에서 윤동주 시에 대한 연구는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퍼지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진행됐다. 1987년 ‘천지’ 12호에 윤동주의 생애와 시를 소개한 리해산의 글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지켜’가 실리고 그 뒤로 비평적인 시각에서 윤동주의 시를 다룬 김경훈의 글 ‘외롭게 대화하는 자’와 권철의 ‘윤동주론’, 박출록의 ‘윤동주의 시세계’ 등 수 편의 글이 나왔다.
이런 글들은 모두 윤동주를 일제 말기의 저항시인으로 보는 것에 견해를 같이하면서 윤동주의 생애와 고매한 시정신을 찬미하고 그의 시의 주체사상, 시적 형상화의 특징, 시의식 차원, 시의 구조적 특징 등 여러모로 의의 있는 탐구가 진행되었다.
그동안 남조선에서는 윤동주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윤동주의 저항성 문제는 1970년대부터 줄곧 가장 표면화된 쟁론문제로 남아 있다. 례하면 김흥규는 그의 글 ‘윤동주론’에서 윤동주의 시를 총체적으로 화해의 세계, 갈등의 세계, 미완의 긴장으로 보았다. 또 오세영은 ‘운동론의 반성’에서 “윤동주의 시는 일제 패망 후에 공개되었다는 사실, 윤동주 시의 내용에서도 어떤 저항성이 표출되지 않고 있다는 것, 시어의 기능에서도 전달적 언어기능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 등으로보아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라기보다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성찰이 진실하게 반영된 서정시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라고 하였다.
1980년대 와서도 윤동주 연구에서 저항성 문제는 계속 론의되었는데 마광수는 그의 글 ‘윤동주 연구서설’(1984)과 ‘형이상학적 저항의 시인 윤동주’(1988)에서 “윤동주의 시를 단순한 저항시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저항시로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하였다.]
우주·생명·초월·철리의식
임윤덕씨는 이어 ‘윤동주 시의 저항성’에 대해서 10여 편의 시를 논거로 제시하면서, 윤동주가 태어나고 성장한 명동촌과 룽징 일대의 배일사상과 투철한 항일운동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다음은 결론 부분이다.
[뛰어난 재질을 지녔던 시인 윤동주는 짧았던 창작생애에 민족의 슬픔과 울분 항거의 정신을 반영한 저항시를 씀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그의 시는 저항정신으로 하여 그 시대에 몹시 성행하였던 순수시나 모더니즘의 시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즉 그의 시는 일제 조선강점으로 조성된, 민족적·계급적 모순을 드러낸 첨예한 현실문제를 소재로 하고 민족의 비극적 삶의 현실과 슬픈 운명을 통탄하고, 새 세상의 도래를 안타까이 바라는 열렬한 동경을 나타내였다. 적어도 일제의 탄압 앞에는 굴복하지 않고 조선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자세는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르게 한다.
윤동주의 시세계는 풍만하고 아름답다. 그의 시에는 번뜩이는 저항의식이 일관되여 있거니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정이 넘치고 있으며 자연과 우주의 변화에 깊은 사색을 담은 우주의식, 생명의식, 초월의식, 철리의식도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시에는 주체의식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의 시의 저항성은 시인의 주체의식의 사상적 핵이며 시의 령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성은 후기시에 이르러 내면화에로 전향함으로써 전민족을 일제와 대결하는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 제약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성한 객관적 요인 외에 그가 줄곧 학창생활을 하면서 인민대중의 투쟁과 격리되었고 그의 인생관에 강력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교리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관으로 인한 것이였다.
그의 시는 기법상에서도 남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징성은 시의미의 내포와 외연을 몹시 넓히고 깊게 했으며 저항의식을 미묘하게 살려나갔다. 그것은 시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의 다의성, 암시성, 함축성, 모호성을 잘 살리였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빠의 우스개는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허리를 부여잡곤 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고향에 오면 두부를 만들어서 먹이시곤 했는데, 오빠랑 나를 데리고 콩을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드셨다.
한참동안 말없이 맷돌질을 하던 오빠가 “어서 오세요” 하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서 “오빠, 누가 왔어?” 하고 물으면 “아니, 그냥 심심해서”라고 대답한다. 할머니께선 “요 녀석이 또 할미를 놀렸구나” 하시며 웃으시곤 했다.
오빠의 싱거운 우스개는 그가 쓴 여러 편의 동시에도 나온다. ‘만돌이’ 같은 동시에 오빠의 장난기가 잘 배어 있다. 오빠의 시를 읽어보면 오빠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빠는 과묵하긴 했지만 사진 속의 모습처럼 늘 심각한 건 아니었다. 딱 한 번 아주 심각한 오빠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연희전문을 지원하면서 의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때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문과에 가는 것보다 의대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다. 그때 오빠가 밥까지 굶어가면서 문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오빠가 문과로 가게 됐다.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도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지낸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 보니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
“남편 오형범에게 절하고 싶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60주기에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내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윤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같은 북간도 출신이지만, 오형범 장로는 사실 오빠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맞선을 봐서 결혼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 것도 남한으로 내려온 다음, 윤동주 시인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이었다.
그런데도 오 장로는 만난 적도 없는 손위 처남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하긴 그와 나 둘이서 오빠의 시 원고를 갖고 내려왔으니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운명은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82세의 노인이 60년 전 떠나간 처남의 추모식을 위해서 분주하게 다니는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 장로는 유교적인 삶의 태도와 크리스천의 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전형적인 룽징 사람이다. 아마 오빠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오형범 장로의 모습과 흡사할 것이다. 늘 검소하고 쓸데없이 과장하지 않으며 대체로 과묵하고 한번 결심한 일은 평생을 두고 초지일관하는 사람.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늘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 룽징 사람이다. 오 장로도 딱 그런 류의 사람이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오늘의 윤동주가 있는 데는 오형범 장로의 공이 아주 크다. 그가 건축가이면서도 웬만한 문인 못지않은 문학 지식을 축적한 것은 오직 윤동주의 생애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이다.
오 장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일이면 미국, 캐나다, 중국을 가리지 않고 떠난다. 중국 방문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에는 매년 옌볜에 가서 윤동주 묘지를 새롭게 조성하고 ‘윤동주 문학상’등을 손수 관리했다.
그의 또 다른 큰 업적은 윤동주 시인의 막내동생 윤광주의 시를 발굴한 것이다. 광주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함께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 치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31세로 요절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작품이 제대로 보관됐을 리 없다. 오 장로는 1990년 옌볜을 방문, ‘옌볜일보’ 10년치와 문학지 ‘천지’를 다 뒤져서 몇 편의 시를 찾아냈다(‘신동아’ 1995년 2월호에 최초 공개).]
오형범씨는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소를 예약하고 행사를 알리고 추모식장을 꾸미는 일까지 손수 했다.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양쪽 귀에 꽂고도 소리를 질러대야 알아듣는 82세의 노인이 그런 일들을 한 것이다.
홍장학의 ‘시드니 선언’
시드니 추모행사의 강사로 초청된 ‘정본 윤동주 전집’의 저자 홍장학 교사는 강연을 통해 “그동안 윤동주 삶의 비극성에 얽매여서 정작 그의 시 읽기에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면서 “60년의 긴 세월이 흘렀으니, 이젠 그의 시가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씨는 “윤혜원씨가 목숨 걸고 가져온 윤동주 초기 작품들의 경우 무수히 퇴고, 이기(移記)한 흔적들을 담고 있는데, 이것들을 통해 윤동주 텍스트의 발생과정 및 텍스트간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풍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를 가져온 당사자인 윤혜원씨를 만나기 위해 북간도까지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만 방문하고 돌아온 일이 있는데, 이번에 시드니에서 마침내 윤씨를 만나 너무 기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