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도 없고 학벌도 없었다. 그래도 1등이 하고 싶었다. 스물아홉 살, 직장을 뛰쳐나와 14년을 하루같이 내달렸다. 이제 팬택계열은 매출 3조원, 세계 7위의 휴대전화 생산업체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책임감은 날로 커져만 간다. 회사를 키우고 직원들과 행복을 나누고, ‘없는 놈’도 열심히만 살면 대한민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라는 걸 어쩌면 그는 만인 앞에 제대로 증명해 뵈고 싶은가 보다.
반면 진정한 유혹자는 자신을 잘 안다. 명석하고 주도 면밀하다. 솔직하고 겸손하다. 고개 숙이고 있어도 빛이 난다. 그가 쓰는 유혹의 기술은 ‘아트(Art)’에 가깝다. 대상이 된 이들은 굴욕감은커녕 행복을 느낀다. 기꺼이 그의 사람이 돼 영욕을 함께한다. 유혹자는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활력과 열정을 선사한다.
위대한 유혹자는 종종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기업인이 된다. 바꿔 말해 위대한 기업인, 정치가, 지휘관은 위대한 유혹자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며 넘기 힘든 벽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타고난 유혹자’의 냄새가 나면 나는 못 견디게 싸움이 걸고 싶어진다.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 또는 그녀는 붙어볼 만한 상대다.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직관, 외교술, 인간적 매력
팬택계열 박병엽 부회장(朴炳燁·43) 또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는 빈한한 집안, 지방대 출신이란 어려움을 뚫고 거부(巨富)를 쌓아 고전적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1년 종자돈 4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를 14년 만에 연 매출 3조원,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7위의 대기업으로 일궈냈다. 계층의 대물림이 대세가 된 지금, 그의 성공기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드라마틱하다.
박 부회장을 아는 이들은 그를 “무서울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평한다. ‘친화력’은 수많은 매체들이 반복·확대·재생산해온 ‘박병엽 신화’의 키워드다. 누구든 맘만 먹으면 곧 ‘형’ ‘동생’을 만들어버린다거나, 전문 경영인부터 핵심 기술인력까지 ‘인재 모시기’에 탁월하다거나, “나이와 경력이 일천한 만큼 ‘회장’ 아닌 ‘부회장’ 직함이면 족하다”는 자기 포지셔닝이나, ‘감성경영’이란 용어로 불리는 특유의 용병술까지. 그러나 ‘친화력’은 성공한 기업인을 묘사할 때 항용 동원되는 용어는 아니다. 이것이 그가 특별한 기업인으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이유다.
로버트 그린은 저서 ‘유혹의 기술’에서 ‘유혹자의 9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강력한 친화력은 그중 ‘차머(The Charmer)’의 특징이다. ‘능란한 외교가형’으로 정의되는 차머의 예로는 독일 출신의 러시아 여제 에카테리나 2세, 중국 국공합작의 주역 저우언라이(周恩來), 빅토리아 여왕의 친구이자 정치적 파트너였던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 경 등이 있다. 이들은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 매력, 달릴 때와 멈출 때를 아는 천부적 직관, 탁월한 외교술과 위기관리 능력, 상대(개인 혹은 대중)의 아픔에 절절히 동참할 줄 아는 겸손하고 열린 자세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본 박 부회장은 ‘차머’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조직의 리더요 협상의 달인이었다.
사실 팬택계열만한 규모의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를 몇 시간씩 맞대면하고 앉아, 고교 시절 성적은 어땠고 사회에서의 평판은 어떻고 하는 식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업은 조직이다. CEO는 조직의 철저한 보호와 관리를 받는다. 홍보 담당자는 백이면 백, 서면 인터뷰니 ‘미리 보낸 질문지 외 내용은 언급 불가’니 하는 조건을 단다. 이는 CEO들이 직접 내린 지침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관리의 명수다. 약육강식의 비즈니스판에서 수만분의 일의 기회를 낚아챈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말이 나느니, 차라리 어떤 주목도 받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개 오너 경영인이다. 관행화한 시스템보다는 자신의 판단대로 회사를 이끌어간다. 일에서건 언변과 논리에 있어서건 분명한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잘 무장된 인터뷰어가 예기치 않은 도발을 해오면 당황하기보다는 강한 흥미를 느끼며 곧 게임에 돌입한다. 아울러 적절한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 발언)’ 활용으로 솔직함과 신중함을 과시한다. 박 부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쪽 팔려서’ 못 맨 가죽가방
정력적인 인물로 알려진 그는, 그러나 첫 대면한 그날 몹시 지쳐 있었다. 낯빛은 어두웠고 신경은 날카로웠다. 직원 하나가 구치소에 있다 했다. 그도 그지만 가족들이 몹시 걱정된다고 했다. 연구인력 이직으로 인한 LG전자와의 해묵은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 그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으로는 ‘동생’ 중 하나인 모 신문사 기자를 언급하며 임원에게 “해외 연수 간다고 전화 왔더만 걔가 뭘 알겠냐”며 “지사 통해 집 찾는 것 좀 도와주라”고 당부했다.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 받고, “나 사진 찍는 거 싫어한다”며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 사이사이 오고 간 말들이었다.
-바로 들어가지요. 박 부회장의 놀라운 성공기는 많은 샐러리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장 과정은 크게 알려진 바 없는데요. 고향이 전라북도 정읍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정읍군 감곡면 유정리입니다. 6남매 중 막내고요. 누나가 셋, 형이 둘. 양조장집이라 제법 잘 살았어요. 누나들을 다 서울의 대학으로 유학 보냈고, 저도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가죽 가방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보자기 둘러메고 다녔어요. 쪽 팔려서.”
-다른 친구들이랑 다른 게 창피했나요.
“가방만 그런 게 아니라 신발도 운동화 대신 고무신 신고 다녔어요. 어색하잖아. 친구들은 그런 거 하나도 없는데. 폼 잡는 것 같고 잘난 체하는 것 같고, 동료의식도 없는 놈 같지 않아요?”
-가장 어린 시절 기억이 뭔가요.
“뭐 그런 거라기보다 생각나는 게, 전 등하교 때 내 가방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애들이 다 해줬거든. 주먹이 센 편이었지만 인심을 잃지는 않았고. 급장을 했는데, 건빵 같은 걸 직접 나눠주잖아요. 그러면 한 반 50, 60명한테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했어요. 친구들도 잘 도와주는 편이었지요.”
-서울로 이사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무엇보다 막내인 절 빼곤 자식 전부가 서울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상경 후 아버지께선 자동차 폐차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은 그저 그랬나봐요.”
-가세가 기운 건 언제부터였나요.
“이사 와 처음에는 은평구 녹번동 보일러 있는 2층집에 살았어요. 그런데 처음 사단이 난 게, 저 6학년 때 세 살 많은 둘째형님이 백혈병에 걸렸거든요. 6개월 살면 다행이라 그랬는데 1년 8개월을 투병하다 죽었어.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가 죽은 형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많이 울었어요. 형제 중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거든. 형 뒷바라지하느라 돈 엄청 날렸죠. 또 아버지가 보증 서길 좋아하셔서 온 집안에 빨간 딱지 붙는 일이 여러 번 있었어요. 결국 중학교 때 정릉 산동네로 이사를 갔죠.”
“청와대 경호실장 하는 우리 매형…”
-마침 사춘기였을 텐데…. 외로웠겠네요.
“쓸쓸했죠. 얘기할 상대도 없고. 그래도 단칸방 아닌 단독 전세를 살았는데, 난 사실 그게 더 불편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갈등이 인 것이, 부모님 입장에선 살던 가락이 있으니 독채를 고집하고 싶으셨겠지만 어쨌거나 돈이 없어 정릉 3동에서만 네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였잖아요. 요금을 못 내 전화 끊긴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꼭 독채를 고집해야 하나….”
-가난해서 많이 힘들었나요.
“일단 용돈이 부족했죠. 명절 때도 남들이 기름덩이라고 내다버리는 싼 고기만 사다 먹고. 그나마 매형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요.”
-공부에 몰두하기 어려웠겠군요.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뭐 다 말하기 힘든 이유로 집안이 늘 소란스러웠거든요. 부모님께선 그래도 제 학원비만큼은 어떻게든 챙겨주셨는데…. 그저 그런 실력이었지만 좋아하는 과목, 예를 들어 정치경제, 사회 같은 것들은 곧잘 만점도 받고 그랬어요.”
여기서 그는 불쑥 ‘청와대 있는 매형’ 얘기를 꺼냈다. 김세옥 청와대 경호실장을 말하는 거다. 안 그래도 언제쯤 물어볼까 싶었는데, 냉큼 앞질러 확실하게 김을 빼버렸다. 역시, 감이 빨랐다.
“제가 고등학생 때 경장이었는데 한 달에 2만~3만원씩 용돈 보태주시며 격려도 많이 해줬어요. 아주 시계처럼 정확한 인사거든. 그분 보며 바르게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지요.”
-어떤 학생이었나요.
“중학교 2학년 땐가, 새마을 지도 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처럼 제게 “이 화단 좀 가꿔보라” 하시는 거예요. 두말없이 아침 저녁으로 그 일을 했죠. 한 7개월쯤 지나니 비로소 선생님께서 인정해 주시데요. 그래서 각 학년 수석만 가는 새마을운동 모범지역 탐방단에도 끼고 그랬어요.
친구들 사이에선 리더십 있는 애로 통했어요. 신선한 발상이랄까 새로운 사고랄까, 나한테 그런 면이 좀 있었거든. 대학 때도 한 달에 한 번씩 고려대, 서강대 다니는 친구들이랑 모여 세미나를 하고 그랬어요. 경영이나 리더십, 그런 분야 책은 많이 읽었으니까.”
-친구들한테 인정받은 또 다른 뭔가가 있었나요.
“좀 자신 있는 게, 안 되는 일을 곧잘 되게 했거든요. 여행 가서도 굶겠다 싶으면 미리 대책을 세워놓고. 위기 때 리더십을 발휘한달까.”
-주먹질도 제법 한 편인가요.
“안 그랬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어떤 덩치 큰 친구가 절 위협하데요. 굉장한 두려움을 느껴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졌다, 잘못했다” 그랬지요. 그래놓곤 잘 다독여 내 똘마니로 만들어버렸어요. 물론 언젠가 저랑 엇비슷한 놈이 한참 까불 때는 아주 쌍코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준 적도 있지마는.”
-친구의 폭은 넓은 편이었나요.
“전교 1등짜리부터 껄렁한 녀석까지 다 있었어요. 사귀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친구로 만들었으니까. 늘 내가 먼저 다가서자 생각했고 작은 것은 두말없이 양보했어요. 하지만 큰 사안에서 의견이 다르면 대화를 통해 내 편으로 끌어들였죠. 그럴 때 중요한 게 상대를 한껏 인정해주는 거예요. 야, 너 싸움 잘하고 참 멋있다, 그런 식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대체로 넉넉하고 인간성 좋은 놈으로 통했지요.
하지만 호락호락한 녀석으로 뵈진 않았을 거예요. 까불면 찍어버리겠다, 그런 근성은 확실히 보여줬으니까. 저 자식은 두들겨 패면 붕대 감고 나타나서라도 내 등을 후려칠 거다, 안 되면 각목에 못이라도 박아 올 놈이다, 대충 그렇게들 생각했지요.”
-재수를 했네요.
“대성학원에 들어갔어요. 아 그때는 공부 좀 했다니까요(웃음). 그런데 처음에는 ‘서울대반’이던 것이 ‘연고대반’, 그 다음…. 뭐 다른 애들 노는 것처럼 좀 놀았죠. 그때 날 알던 친구랑 얼마 전 우연히 연락이 됐는데 걔가 그러데요. ‘너는 굉장히 황당한 얘기를 하는 친구였다, 어떤 주제건 자기 방식대로 풀어 말했다, 요컨대 무엇에건 네 의견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내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경험에 비춰볼 때 중·고등학교 시절을 잘 보낸다는 건 어떤 걸까요.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일들을 잘하는 게 맞죠. 그게 곧 성실성이니까. 더해서 흥미 있는 분야의 독서를 통해 내적 역량을 키우면 좋겠고. 솔직히 전 우리 입시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시험 몇 쪽으로 애들 인생을 일류, 삼류로 확정해버리잖아요.
특정 분야에 뛰어나고 수준 이상의 사고 역량을 가진 친구들은 다양한 평가를 통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해요. 대학생이 된 후로도 얼마든지 배우고 변화할 수 있는데, 그걸 인정 안 하는 우리 사회 시스템이 문제인 거지. 대학 졸업 후 발전하는 놈들도 많거든요. 우리 회사 임원 진급자 중에도 똥통학교 나온 놈 있어요.”
학사경고, 의가사 제대, 취직
박 부회장은 호칭이며 말투가 상당히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나이 많은 회사 임원들은 몽땅 ‘형’이고, 손아래는 대충 ‘너’다. 인터뷰 중간중간 걸려온 전화들을 받는데, 호칭은 역시 대체로 ‘형’, 마지막 멘트는 “정말 고맙수”였다. ‘부회장님’이란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편한 말도 간간이 튀어나왔다.
-왜 하필 호서대를 택했나요. 보니까 4년제 대학 전환 후 1회 입학생이던데요.
“뭐, 점수 맞춰 갔죠. 게다가 1, 2학년 때는 4학기 내내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3, 4학년 때 계절학기 뛰고 해서 겨우 졸업했죠. 그래도 맘에 드는 선생 과목 리포트는 베리 굿, 날카롭고 시각이 독특하다는 평을 들었어요.”
-경영학과는 원해서 간 거였나요.
“대학 갈 땐 기자가 돼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경영에도 분명 관심이 많았어요. 재미있게 읽은 책들을 떠올려 보면 ‘상품개발력을 기른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자서전, 혼다 소이치로 회장에 관한 것들 등등이 있죠. 사사(社史)에도 재미를 붙여 꽤 많이 구해 읽었고요.”
-책 읽으면서 상상을 많이 했겠죠? 나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저렇게 했을 텐데….
“맞아요. 신문 읽다가도 ‘무슨 기업이 경영 부실로 부도가 났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부실로 그랬을까, 왜 부실이 생겼을까, 투자가 과해서 그랬을까 따위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지요.”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바로 취직했나요.
“육군 현역이었는데, 제가 타자를 기막히게 쳤거든요. 보니 머리도 제법 좋거든. 그래서 인사계 발령을 받았어요. 상관 머리 아픈 일까지 나서서 해결해주며 군대 생활 잘 했지요. 그런데 그만 1년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고 말았어요. 단칸 셋방 사는 부모님이 외롭고 누님들 도움으로 사는 것도 힘에 부치니까 사정 담은 서류를 꾸며 병무청에 제출한 거지요. 제대 후 바로 취직했어요.”
-1987년 맥슨전자에 입사했는데 되는대로 간 건가요, 나름의 계산이 있었나요.
“제조업체에 가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첨단산업 분야였으면 했어요. 가서는 물 만난 고기였죠. 3000명 직원 중 접대비를 회장 다음으로 많이 썼으니까. 공부도 엄청 했지. 전공서적을 대학 때보다 더 많이 읽었어요.”
“이제부터는 1등만 하자”
-영업 파트 근무는 자원한 건가요.
“그럼요. 국내사업부에서 일종의 법인 영업을 했어요. 내가 그 회사에서 마케팅 플랜이란 걸 잡은 최초의 사람이요. 연구원들이랑 제품 기획 짜고 프로젝트 관리하고 유통 경로 설정하고. 첫 성공 아이템이 ‘삐삐(무선호출기)’였거든요. 엄청난 경쟁을 뚫고 국방부 납품에 성공했죠. 또 병원이나 호텔처럼 별도의 호출 시스템이 필요한 데가 있잖아요. 미국 가서 직접 기술 제휴하고 통신시스템을 만들어다 모토로라, 삼성, 필립스 그런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쳐가며 새 시장을 개척했어요. 그게 맥슨전자 최초의 시스템 장사였어요.”
-회사에서 재량권을 많이 줬나봐요.
“3, 4개월 두고 보니 팔팔하고 윗사람 잘 모시고 발상 신선하고 괜찮거든. 제가 아주 유능한 사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사 딸린 회사차도 신청만 하면 하루 종일 타고 다닐 수 있었어요. 삼성, LG에선 임원급이 나오는 이동통신 회의에도 저 혼자 들어가고 그랬어요.”
-사람들을 설득하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었나요?
“그냥 녹여놓는 거죠. 간단한 질문이라도 흘리지 않고 메모해뒀다가 가장 빨리, 정확하게, 제 아이디어까지 실어 답을 내놓습니다. 깍듯하게 밥 모시고, 그러다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결론부터 똑 부러지게 말씀드리고요. 근본적으로는 ‘대학 때까지는 꼴등만 했는데 이제부턴 1등만 하자’, 그런 결심이 확실했어요. 24시간 쉬지 않고 일했고, 경찰청 무전 시스템 같은 것도 두 달간 혼자 공부해 직접 브리핑했죠.”
-스물아홉 살 때 삐삐 제조업체인 ㈜팬택을 창업했습니다. 좀 이른 선택 아니었나요.
“그때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돈 몇 푼 때문에 회사를 옮기고 싶진 않았는데, 좀 튀다 보니 회사 내에선 또 나름의 견제가 들어오고. 이럴 바에야 내 손으로 시작해보자 싶었죠.”
-창업 멤버가 박 회장 합쳐 6명이었네요.
“여직원 하나에 엔지니어가 넷이었어요. 그중 세 명은 맥슨에서 날 따라 나온 사람들이었는데 한마디로 ‘똥배짱’이 맞았던 거죠. 저 친구하고 하면 뭐든지 항상 되더라, 그런 믿음이 있었던 거야. 근데 문제가, 나오긴 나왔는데 기술 개발할 장비가 있어야지. 경기도 부천 10평짜리 아파트 팔아 전세 옮기고 남은 돈 4000만원이 전부였거든요. 한데 수소문해보니 한독시계에서 통신사업 한다고 나섰다 접게 돼 남아도는 장비가 있다는 거예요. 가보니 벌써 10명은 더 줄을 서 있어. 담당 직원을 찾아 진솔하게 매달려서 어렵게 공장장님을 소개받았죠.”
나를 지워 상대를 움직인다
여기서부터가 제대로 ‘박병엽 식’이다. 먼저 들어보자.
“정자세로 만나 뵙고 절절하게 말씀 드렸어요. ‘사업을 정리하게 돼 얼마나 맘이 아프십니까. 외람되지만 혹여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갈고 닦고 소중히 다뤄 국산 기술 개발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가격이라도 말씀하시는 대로 받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동을 받았던지 먼저 온 사람들 다 제치고 우리한테 장비를 팔더군요.”
이것은 또 어떤가.
“물건을 만들었으면 팔아야 하잖아요. 한 달 가까이 최적의 유통망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가장 큰 유통대리점부터 뚫기로 했어요. 그게 부산에 있었는데 연 매출이 80억원이나 되는 데였죠. 가서 주욱 설명하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저를 못 잡으신 게 천추의 한이 될 겁니다, 그러고는 냉큼 서울로 올라와버렸어요. 그런데 그쪽도 장사꾼이라 천추의 한 운운한 게 아무래도 맘에 걸리거든. 다음날 아침에 바로 전화하더라고. 대놓고 그랬죠. ‘이미 경쟁업체랑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내 참, 계약은 무슨 놈의 계약…. 하지만 그쪽이야 사정을 알 리가 있나, 몸이 달 대로 달아 그날 저녁 바로 비행기 타고 올라왔습디다. 뭐 마지 못해 하는 듯 도장을 찍어줬죠.”
협상은 밀고 당김이다. 자리 가늠하기다. 어디서 엎어져야 하고 어디서 배짱을 튕겨야 하는지, 솔직함의 미덕을 발휘할 순간과 엄포를 놓을 순간은 언제인지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완벽하게 연기(演技)해야 한다.
또 하나, 범부들이 의외로 적응 못 하는 것이 사심 없이 허리를 꺾는 일이다. 오기나 뒷계산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주는 일이다. 자신감과 자긍심이 충만한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비굴한 자의 고개 숙임에는 무게가 없고 향기도 없다. 박 부회장은 자신을 지움으로써 상대를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를 ‘별 생각(욕심) 없는 사람’으로까지 끌어내릴 줄 아는 듯했다. ‘방심’과 ‘갑(甲) 의식’은 협상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들이다. 그는 상대로부터 그렇듯 치명적 실수를 이끌어낼 줄 알았다.
-협상할 때 허풍 치는 경우가 많나요.
“허풍이라기보다,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포인트’가 나오잖아요. 쭉 듣고 있다 그 부분을 콕 찌르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포인트’란 바로 ‘약한 고리’다. 예를 들면 방심, 예를 들면 갑 의식, 예를 들면 지나친 욕심, 예를 들면 허약한 논리.
-대화를 주로 어떤 식으로 풀어가나요.
“저쪽에서 막 쏟아부으면 일단 들어요. 첫 대화는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거니까요. 일단 그렇게 많이 들은 뒤, 뭔가 주입해야 할 것이 있을 땐 이쪽에서 아주 제대로 쏟아붓죠. 누군가와 어떤 합의에 도달하려면 먼저 비전과 목표를 공유한 다음 진득하니 이해를 구해야 해요. (상대가) 필요로 한다면 따뜻하고 진심어린 위로까지 담아서요.”
이렇듯 합의를 이끌어내고 총의를 모으는 그의 능력이 절정의 빛을 발한 것이 2001년 11월 ‘현대큐리텔’ 인수 합병 때다.
1991년 회사 설립 후 팬택은 탁월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1997년 매출은 762억원. 그러나 박 부회장은 ‘삐삐’ 시장이 오래 가지 못하리란 걸 직감했다. 사업 방향을 재빨리 휴대전화 쪽으로 돌렸다. LG정보통신(현 LG전자)으로부터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계약을 따내 1997년 5월부터 휴대전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8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고전하던 미국의 모토롤라가 인수 제안을 한 것이다. 박 부회장은 “대단히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라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내 꿈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모토롤라 쪽에 거꾸로 합병이 아닌 투자를 요구했다. 협상은 잘 마무리돼 1998년 팬택은 모토롤라로부터 1500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팬택은 2000년 매출액 2871억원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이 세 번째 도약을 계획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현대큐리텔 인수를 결정한 것이다. 하이닉스전자(전 현대전자) 휴대전화 사업부가 분사한 현대큐리텔은 당시 10년 연속 적자에 2001년 한 해에만 순손실 1427억원을 기록한 골칫덩어리였다. 650명이던 연구개발진은 350명으로 줄었고, 인수합병(M&A) 시장에선 “1원 주고 가져가라 해도 안 받을 것”이라는 노골적인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보고서는 무조건 다 읽는다
그러나 박 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현대큐리텔은 문제가 많은 회사였지만 잠재력도 크다고 봤어요. 남아 있는 연구인력만 해도 현대그룹에서 뽑은 인재인 만큼 기본기가 탄탄했거든요. 특히 분사 직전 경영권을 넘겨받은 송문섭 사장(현 팬택앤큐리텔 사장)은 삼성그룹 근무 당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어요. 송 사장이 계속 경영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인수를 결정했죠.”
이렇게 해서 (주)팬택과 함께 팬택계열의 양대 산맥인 (주)팬택앤큐리텔이 탄생했다.
-인수 후 일화가 많지요. 출근 첫날 여비서 한 명만 데리고 나타났다거나, 3개월 간 임직원 1100명을 팀 단위로 모두 만나 독려했다거나. ‘1등 회사를 만들고 싶은 만큼 먼저 1등 대접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지켰고요. 해서 박 부회장을 ‘인덕(人德)경영’ ‘감성경영’의 표본이라 칭하기도 하는데요.
(책상으로 가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어 보이며) “직원들이 저한테 제출한 숙제입니다. 출장 가기 전 ‘상품개발력을 기른다’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라 그랬거든요. 이게 모두 200명분인데 오는 일요일 집에서 다 읽을 겁니다. 여섯 시간쯤 걸리겠죠. (오너가) 이렇게 열심히 읽고 그중 인상적인 부분에 대해선 코멘트까지 하는데 어떤 놈들이 하나로 뭉치지 않겠어요. 경영자에 대한 신뢰도 절로 생기지 않겠어요. 물론, 그러느라 내 인생은 드럽게 힘들지만(웃음).”
-한 인터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욕심 내면 위험하다는 건 내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겠죠.
“욕심 때문에 한번 작살날 뻔한 적이 있어요. 7년 전 삐삐를 만들 때였는데 원가 절감과 사이즈 축소를 위해 새로운 반도체를 설계했지요. 성공을 자신하고 국내에서만 선주문을 60만대나 받아놨는데, 완성 후 작동을 해보니 수신율이 95%밖에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합니까. 200억원어치를 다 버렸지. 그때가 매출액이 1100억원이던 때였어요. 정말 망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인터뷰 준비하면서 몇몇 인사들에게 ‘박병엽 부회장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발이 정말 넓던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또 사업하는 분이 그렇게까지 각계각층의 인맥 관리에 골몰할 필요가 있는 건지요.
“6, 7년 전부터 내가 굉장히 발이 넓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대부분 오랜 세월을 두고 신뢰가 쌓인 경우죠. 10년 이상씩 된 사람도 많아요. 저한테는 나름의 사람 사귀는 원칙이 있어요. 하나는 자질구레한 부탁은 하지 않는 거고, 또 하나는 ‘끈 떨어졌을 때 더 잘한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제가 사람들을 무척 많이 만나고 다니는 줄 알아요. 사실은 아니거든요. 어디 사람 많이 모이는 자리 가서 명함 교환하고 하는 발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벤처기업인이니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하잖아요. ‘벤처’에 덧씌워져 있는 부정적 이미지, 그런 것들이랑 나는 정말 거리가 멀거든. 전 아침 9시에 출근하면 오후 6시까지 웬만해선 회사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점심도 대충 사무실에서 김밥 사 먹고 자장면 시켜 먹고. 그래야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몰려다니면 뭐 합니까.”
지난 1월21일 팬택 관계자들이 서울 상암동 DMC에서 팬택계열 R&D센터 기공식을 갖고 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긍정하는 거예요. 늘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도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랑 단둘이, 또는 서너 명 모여 같이 밥 먹고 소주잔 기울이고. 제가 좀 사람이 둥글둥글해요. 내 생각과 의견을 상대 기분 안 나쁘게, 정확히 전달하는 법도 알고 있고요.”
-사내에서는 어떻습니까. 상당히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일 거란 생각도 드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임원들에게 물어보세요. 회의를 하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럼 전 우선 이의를 제기하는 그 사람 면부터 세워줍니다. 이어 제 생각을 둥글둥글하게, 여러 가지 기술을 써서 아주 부드럽게 흡수시켜요. 오늘 바로 결론이 안 날 것 같으면 다음날로 미루죠. 쉽게 결정을 안 내리고 ‘형,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이런저런 문제가 있겠는데’ 하면서 시간을 끌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갈등을 최소화하는 게 제 방식입니다. 제가 의외로 자제력이 있는 편이거든요(웃음).”
-인사 청탁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요.
“친인척은 절대 안 돼요. 그게 우리 회사 원칙이죠. 하지만 다른 쪽에서 사람 써달라는 건 받아줄 때가 간혹 있어요. 우리 회사 교육 시스템이 좋으니까. 하지만 납품 부탁은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친한 사람이 많다는 게 사업에 도움이 되던가요.
“그런 경험은 많이 못 했어요. 하긴, 지난번 대우종기(대우종합기계) 인수 때 보니 내수 시장에서 뭔가 하려면 (인맥 도움이) 있기는 있어야 되겠습디다. 하지만 그건 지난 일이고, 다 잊어버렸어요. 정부가 결정해 갈 곳이 다 정해진 회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건 옳지 않지요.”
2004년 박 부회장은 대우종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한때 대우종기 우리사주조합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입찰에 나서는 등 성공이 점쳐지기도 했으나 결국 두산중공업의 자본력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대우종기는 2003년 매출액이 2조3140억원, 2004년 상반기 매출액만 1조4836억원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건설중장비 기업이다. 팬택이 대우종기 인수에 성공했다면 박 부회장은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 그룹의 오너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그의 심정을 알 듯도 했다.
“친한 걸 안 친하다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박 부회장과 권력층, 정확히 말해 몇몇 여권 핵심 인사들과의 친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제법 많은데요. 지난 대통령선거 직후에도 박 부회장이 여권에 수백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먼저 유명 인사들과의 친분으로 말하자면, 일단 그들과는 사귄 지가 7, 8년이 다 넘어섰어요. 고향이 전북이니까 전 정권에도 아는 사람이 꽤 많았고, 이번에도 어쩌다 보니 여럿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그 덕분에 뭐 하나 도움 받은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지난 정권에서만 세무 조사를 다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무슨 인허가 관련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팬택계열은 거대 재벌들과 경쟁하며 오직 수출로 커온 기업이거든요. 그러니 참, 친한 사람들을 안 친하다 할 수도 없고…,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그 인간들이…(웃음).”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전에 야당에서 그 얘기를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기에 제가 그 의원을 직접 찾아갔어요. 우리 회사 성장 과정을 쭉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죠. ‘내가 돈 줬다면 우리 회사에 비자금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수출로만 돈 번 회사에서, 그것도 심심하면 세무조사 대상이 되는 회사에서 무슨 수로 비자금을 만드나. 그리고 팬택이 정권의 수혜를 받은 사례가 있으면 하나라도 이야기해달라…’. 그 의원이 그러데요. 직접 찾아와서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아닌게아니라 박 부회장 말대로 팬택계열은 2002년 내수시장 진출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벌기업인 삼성전자, LG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3강 구도의 시장 원리가 항용 그러하듯, 1위인 삼성전자와는 때로 협력적 관계가 된 적도 있었으나 2위 LG전자와는 감정 싸움에 가까운 갈등을 빚어온 지 오래다. 그 절정이 바로 인터뷰 들머리에 언급된 이른바 ‘기밀 유출’ 건이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가 구속한 팬택의 과장급 연구원 구모 씨는 LG전자 출신이다. 검찰은 구씨가 LG전자의 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를 진행중이다. 그러나 팬택측은 “구씨가 유출했다는 자료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개 프로그램이며 회사 차원에서 개입한 바도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조기 석방을 자신하고 있다. 이에 반해 LG전자측은 “검찰이 별것 아닌 일로 구속까지 했겠냐, 두고 보면 알 일”이라며 자신만만하다. 박 부회장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진 못하나 아쉬움이 큰 듯했다.
“우리 회사가 이 비슷한 일로 지난 1년 반 새 압수수색을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첫 번째는 저쪽에서 연구원 5명을 문제삼았는데 무혐의로 결론 났고 이번이 두 번째인 거죠. 원론적인 얘기만 하겠습니다. 팬택계열은 이직률이 1년에 1%가 채 안 됩니다. 사람을 중히 쓰면 나가지를 않아요. 연구 자료 빼오라고 종용했냐고요? 무슨 말씀, 반대로 입사할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사람이지 ‘자료’가 아니에요.”
박 부회장은 “이번 건은 하여튼 뭔가를 가져 나왔으니 불법은 불법이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마치 글쟁이가 자기 글을 챙기듯 제 작업을 보관하려는 습성이 있다. 잘못된 관행이긴 하되 기밀 유출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경쟁사간 흠집내기는 이쯤에서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무거운 맘을 털어놓았다.
-경쟁사 연구원들을 저인망식으로 훑어간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인망식이라면 ‘뒤로 빼간다’는 뜻인가요? 어디 봅시다, 우리 회사가 지난 4년간 공개 채용한 인력이 600여명입니다. 그 대부분이 연구 인력이고 회사는 그들을 관리·지원하기 위해 매년 매출액의 10% 이상을 과감히 쏟아부었어요. 혹자는 연구개발비 부담이 너무 커 주가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걱정합니다. 연구원 평균 연봉도 삼성전자보다 높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높은 연봉 주고 정중히 잘 대접하면 연구원들이 딴 회사로 옮겨가지를 않겠지요? 그들이 있기에 우리 회사는 늘 희망이 있고 높은 성장을 자신할 수 있는 겁니다.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 우리는 인재라는 말보다 사람이란 말을 좋아해요.”
-실제로 팬택계열은 임직원들의 결속력이 강하고 충성도가 높은 기업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노조에서 ‘회사 실적이 안 좋으니 임금인상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오히려 박 부회장이 나서 10% 인상을 관철(?)시킨 사례도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현실을 무시한, 지나치게 인기 영합적인 결정 아니었냐는 비난도 없지 않습니다.
“타당한 문제 제기입니다만 월급과 관련해서는 뭐랄까…, 가장 좁고 드라이하게 말해 회사라는 게 결국은 뭐냐, 구성원들이 먹고사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죠. 직원들이 그 월급을 받아 유난히 집값 비싸고 물가 높고, 옷이고 음식이고 뭐고 평균을 유지하려면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의 이 나라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하거든요.
물론 회사 이익이 줄어든 건 안타깝지만 근로자들의 유일한 꿈이 임금 인상인 걸 생각하면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결정은 6시간 마라톤 회의를 해가며 ‘과연 올릴 수 있겠나, 얼마까지 올리는 게 가능한가’를 주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였어요.”
“합작이건 인수건 문 열려 있다”
-그럼 이제 돈 버는 얘기로 좀 넘어가보죠. 2004년 초 팬택계열은 국내 시장 점유율 25%를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18% 선에 머무르고 말았어요. 휴대전화 시장은 몹시 거친 동네지요. 안 그래도 ‘글로벌 시장에서 5등 밑으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데요. 박 부회장의 복안은 무엇입니까.
“일단 올해는 출발이 좋습니다. 지난해 12월부터 국내 시장 점유율 20% 선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LG텔레콤 사용자의 65%가 LG전자 제품을 쓰는 걸 고려하면, 공정하게 평가했을 때 이미 우리는 (내수 시장) 2위라고 할 수 있죠. 세계 시장에서도 지난해 12월 미국 휴대전화 유통업체인 오디오박스와 자가브랜드 1000만 대 수출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물론 압니다. 지금 팬택계열의 세계 시장 순위는 7위, 남들이 ‘신화’라 부를 만큼 초고속 성장을 해왔지만 이대로 멈춰 서선 안 된다는 걸요. 그런 만큼 올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 브랜드로의 도약입니다. 미국은 물론 러시아, 멕시코, 중동, 유럽 등 전략 지역에서 자체 브랜드에 대한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죠. 기술 개발에도 전력을 다해 소비자 편의를 극대화한 혁신적 멀티미디어 폰, 프리미엄 폰을 대거 선보일 겁니다.”
이 참에 민감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SKY’ 휴대전화로 유명한 SK텔레콤의 자회사 SK텔레텍에 대한 팬택계열의 M&A설이다.
-지난해 12월 주식시장에 그 같은 소문이 돌자 팬택앤큐리텔은 ‘사실무근’이라는 공시를 냈지요. 하지만 취재 결과 매우 신빙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노 코멘트로 해둡시다.”
박 부회장은 극구 언급을 회피했다. 한편 한창 이 소문이 돌던 지난해 12월21일 박 부회장은 갖고 있던 팬택앤큐리텔 지분 12.2%를 자신이 지분 100%를 갖고 있는 팬택씨앤아이에 넘겼다.
이에 대해 팬택계열 측은 “그간 팬택앤큐리텔 최대주주가 개인(박 부회장)이란 점 때문에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있었고, 장기적으로 글로벌 사업 확대 및 해외 자본 확충을 위해 행한 작업”이라 설명했다. 박 부회장이 M&A, 외자 유치 등 회사의 장기 발전을 위한 다양한 포석을 마련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박 부회장도 “2년 안에 세계 시장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거다. 합작이건 인수건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상류층 0.001%의 역설
-돌이켜보면 ‘성공해 보이겠다, 잘살아 보겠다’ 그렇게 오기로 버텨온 세월이었나요.
“오기란 말보다는 근성이 더 어울리겠네요. 모든 일에서 근성 있게 1등을 해 보이겠다…. 제게 꿈이 하나 있습니다. 세대를 뛰어넘는 기업을 해보고 싶어요. 앞 세대보다 뭐 하나라도 더 나은 시스템, 기업문화, 부의 분배. 그렇게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가진 기업을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고픈 꿈. 존경받고 사랑받는 기업 말이에요.”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와 있는 듯하다고 했다.
“노련미도 좀 생기고 사업 보는 눈도 생기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이 느껴져요. 제가 자부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연간 30억달러 수출하는 회사가 많지는 않거든요. 또 지난 20여년간 제조업 분야에서 새로 조 단위 매출을 달성한 인물도 제가 처음인 것 같고요.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 경계인가 봅니다. 쉽게 뚫을 수 없는 어떤 막 같은 게 있어요.”
그 막은 웃목, 아랫목 확실히 나누는 편견에 찬 사회일 수도 있고, 50년 넘게 고착돼 온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박 부회장은 “일종의 ‘커가는 회사 손봐주기’ 분위기인 것 같다”며 “이래서야 사람들이 뭐하러들 열심히 살겠느냐”고 반문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그래요. 위 아래 물길이 꽉 막혀 있으면 안 돼요. 누구든 노력에 따라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어야죠.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도, 뿌리 깊은 가문의 자손 따위 아니어도 어쨌거나 기회는 줘봐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 이건 좀 우스운 얘기다. 박 부회장도 “간혹 이런 얘기를 하면 친구들이 ‘넌 이미 대한민국의 0.001% 상류층에 합류했으면서 왜 그런 생각에 골몰하느냐’고 의아해한다”고 털어놓았다. 어쩌면 그는 회사를 키우고,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더 나아가 ‘없는 놈’도 열심히만 살면 대한민국은 아직 기회의 땅일 수 있다는 것을 만인 앞에 온몸으로 증명해 뵈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이 맞다. 기회의 평등은 보장돼야 하며, 열심히 일한 사람은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존경 받는 기업이 더 늘어야 하며, 그의 생에는 짊어져온 꼭 그만큼의 꿈과 책임감, 사명감이 뒤따라야 한다.
박병엽 부회장이 자기 자신과 임직원 앞에서 한 약속을 잘 지켜 세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기업인’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