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계에서 ‘스피커 도사’로 알려진 일명 스님. 스승의 설법을 녹음해 좋은 음질로 들려줘야겠다는 작은 일념이 지난 27년간 성능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데 몰두하게 내몰았다. 그는 “명품 스피커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고 했다. 소리 안에서 진심을 보고 소리가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소리 연구 역시 수행이라는 그는 “소리라는 줄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 나 자신으로
- 돌아온다”고 했다.
27년간 스피커를 연구해온 일명 스님은 “내가 만든 스피커가 일상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첫째, 자비와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의 인격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는 자비고 하나는 지혜다. 대체로 자비스런 얼굴은 미소를 머금는 경우가 많고, 지혜로운 모습은 냉철한 표정을 띄게 마련이다. 이들 상반된 두 가지 표정과 역할을 충돌 없이 나타내기 위해 양쪽에 두 명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보는 설이다. 오른쪽 불상이 자비라면 왼쪽 불상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식이다.
둘째는 오랫동안 수행에 정진한 노스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도를 닦고 있는 본존불을 양 옆의 두 불상이 시봉(侍奉)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불상이 빨래를 하거나 밥을 짓고 불때는 일을 담당한다면, 왼쪽 불상은 돈을 벌어오는 역할이다. 도를 닦더라도 먹어야 하고, 집세나 전기요금을 내야 하는 게 사바세계의 실상 아니던가. 그러니 자금 공급책도 필요하게 마련이다. 좌우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본존불이 도를 통하면, 이번엔 본존불이 두 사람의 도통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 서로 품앗이를 하는 셈이다.
셋째는 깨달음과 예술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설이다. 가운데가 깨달은 도인이 앉는 자리라면 좌우는 예술가가 앉는 자리다. 도인과 예술가, 깨달음과 예술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상호보완적이면서도 한 걸음만 움직이면 서로 자리를 바꿔 앉을 수 있는 관계다. 즉 예술을 통해서 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수도나 예술 모두 집중을 요구한다. 그만큼 예술가는 깨달음에 접근해 있는 셈이다. 일명(一明·47) 스님을 만난 이유도 이 세 번째의 관계, 즉 예술을 통해서 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노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다.
소리를 통해 도의 세계로
예술도 여러 가지다. 일명 스님은 어떤 장르의 예술을 해온 것일까. 바로 소리(音)다. 그는 지난 27년 동안 소리에 깊이 천착해왔다. 한국 불교계에서 ‘일명’은 ‘스피커 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도의 차원에서 음의 세계에 접근한 인물이다. 별명은 ‘소구산(小九山)’이다. 구산(九山·1909∼83)은 전남 송광사(松廣寺)의 큰스님이었다. 27세 때 폐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어느 거사로부터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면 낫는다는 소리를 듣고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100일 동안 천수주를 독송(讀訟)하고는 기적적으로 완치됐다. 그리고 출가했다. 이렇듯 구산 스님은 천수주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일명 스님도 그 문하였으니 자연스럽게 관음보살과 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 ‘천수주’란 천수천안(千手千眼)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다라니(呪文)를 가리킨다.
일명 스님이 머무는 관음포교원은 서울 구로동에 있다. 구로동 하면 ‘노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치열한 세속도시의 현장이기도 하다. ‘비풍류처풍류족(非風流處風流足)’이라는 한시 대목처럼, 그는 노동의 한복판이라는 비풍류처에서 풍류가 넘치는 관음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나. 불교에서는 소리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성경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나온다. 불교에서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불교에서는 태초의 부처님을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에 의하면 위음왕불은 공겁(空劫) 때에 맨 처음 성불한 부처라고 한다. 공겁이란 태초를 의미한다. 그러니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가 된다. 말씀도 결국 소리로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기독교나 불교 모두 소리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리라고 하는 것이 그만큼 인간의 각성과 정신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물론 사상적으로 그렇지만,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계기도 있었다. 구산 스님의 법문을 녹음해서 신도들에게 들려줬는데, 음질이 좋지 않았다. 음질이 좋아야 더 생생하게 구산 스님의 설법을 들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지만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음질의 육성을 들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향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성능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렇다면 음(音)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이렇게 두 귀에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참구(參究)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불교사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리는 각기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소리로 귀결된다. 결국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서양음악은 분석이 강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음계의 분류를 중시한다. 서양음악은 모든 소리가 음계로 분류되어 표시된다. 반면 불교를 비롯한 동양음악은 음계의 분류를 넘어선 소리를 추구한다. 가령 범종소리를 들어보라. ‘우웅~’ 소리 하나로 귀결된다. 종소리는 하나다. 종소리에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없지 않은가.”
소리에 대한 일명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공감이 됐다. 서양음악이 분석을 통한 음의 다기화(多岐化)를 포착하려 했다면 동양음악은 직관을 통한 통합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화엄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라고나 할까. 이렇게 놓고 보면 다(多)는 서양음악, 일(一)은 동양음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와 일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상즉(相卽)의 관계로 맞물려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종소리가 하나라고 한다면 그 한소리 너머에는 어떤 소리가 있는가. 궁극의 소리는 무엇인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바로 이 대목부터 수행에 들어간다. 화두선(話頭禪) 식으로 표현하면 ‘종소리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냐?’ 하는 화두가 성립한다.”
-어째서 이 물음이 수행에 해당하는가.
“소리를 즐기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존재 그 자체는 빛이고 기쁨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존재는 불성(佛性)이고 신성(神性)인데, 어찌 슬플 수가 있겠는가. 근원적인 존재의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전달매체가 바로 소리다. 존재와 기쁨의 중간에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기쁨을 느낀다. 음악이라는 소리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기쁨을 느끼다 보면 그 기쁨의 근원으로 소급해 올라가게 된다. 즉 소리라고 하는 줄을 따라 올라가면 자기 존재로 들어올 수 있다. 이게 바로 수행이다.”
-판소리에서는 ‘득음(得音)’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소리를 얻었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말하나.
“명창이 되려면 득음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득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서 폭포 근처에서 연습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기 소리가 더 커서 폭포 소리를 제압하는 것을 득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잡소리를 제거하고 자기 소리만 듣는 경지가 바로 득음이다. 즉 폭포 소리가 안 들리고 자기 소리만 듣는 것이다. 자기 소리만 듣는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미세한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면 자기와 소리가 서로 혼연일체가 된다. 자기가 곧 소리다. 자기는 없어지고 소리만 남는다. 득음을 통해서 아상(我相·ego)을 털어내게 된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많은 사람 속에서도 자기 소리만 들린다’고 말한 것을 인상 깊게 들었다. 조수미씨도 득음을 한 것 같다.”
-한번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영원히 그 경지가 유지되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듯 득음 이후에도 수행이 필요한 가.
“필요하다. 명창 임방울도 득음을 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와 다양한 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흐트러진 것 같다. 흐트러지면 다시 산에 들어가서 폐관(閉關)하고 정진해야 한다. 다시 추스려야 하는 것이다. 임방울도 다시 산에 들어가 공부한 것으로 안다.”
소리를 관(觀)한다는 것은?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필자의 전공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불교의 ‘능엄경(楞嚴經)’을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일반적으로 능엄경은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깜깜 기신(起信)이요, 차돌 능엄(楞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기신론(起信論)’은 논리 전개가 복잡해 한번 들어가면 깜깜한 미로에 빠진 것 같고, 능엄경은 차돌처럼 단단해 도대체 이빨로 깨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능엄경의 핵심은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이다. ‘이근(耳根)’이란 귀를 가리킨다. 귀로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을 하면 크게 통한다(圓通)고 설파한다.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에 보면 여섯 감각기관 가운데 이근이 가장 수승(殊勝)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안근(眼根)은 앞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있지만 뒤의 사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근은 뒤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전후좌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눈보다 귀를 사용하는 것이 전천후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능엄경에서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이 여러 수행법 중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소리에 집중하는 이 방법이 바로 관음보살의 수행법이다.
일명 스님은 콘(corn) 형과 혼(horn) 형이 합쳐진 혼형 스피커를 만들어왔다. 그는 한국적인 소리, 즉 한민족의 한과 흥을 표현하는 데 혼형이 가장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해조음, 즉 바닷가의 파도소리다. 파도소리는 항상 들린다. 집중하려면 항상 들리는 소리를 택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관음도량이 모두 바닷가에 자리잡은 것도 해조음을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동해안의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서해안의 강화도 보문사(普門寺), 남해안의 남해 보리암(菩提庵)이 한국의 3대 관음도량이다. 모두 해조음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다.
항상 해조음을 듣다 보면 밤에 잘 때도 해조음이 들리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수면중에도 해조음 소리에 집중하면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모든 의식이 오직 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른 잡생각은 나지 않는다. 소리에 모든 생각이 집중됐는지는 꿈속에서도 파도소리가 들리는지 아닌지에 따라 알 수 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소리를 듣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고 의심을 품어야 한다. 능엄경에서는 이 도리를 ‘반문문성(反問聞性)’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내면의 듣는 성품을 ‘문성(聞性)’이라고 하는데, 이 문성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화두로 표현한다면 이 과정은 ‘이 뭐꼬?’가 될 수 있다.
능엄경에서 말하는 이근원통의 수행과정은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파도소리를 듣고, 파도소리에 의식을 집중하고, 꿈에도 파도소리를 듣고, 마지막에는 반문문성하는 순서다. 필자는 일명 스님과 대담을 나누면서 머릿속에서는 능엄경의 이러한 반문문성 공식을 깔아놓고 있었다.
-스님의 소리 수행은 능엄경의 반문문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가.
“그렇다. 능엄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관음이란 소리를 보는 것이다. 소리를 듣고 듣다 보면 있음(有)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있음’이란 결국 자기이고, 자기는 곧 내면의 진심(眞心)이다. 따라서 소리를 본다는 것은 진심을 본다는 말이다. 목표는 진심을 발견하고 여기에 일체가 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일단 소리를 많이 들어야 할 것 같다. 보통사람이 소리를 좋아하려면 좋은 소리, 즉 기쁜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기쁨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좋은 음악은 이런 측면에서 보통사람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음질, 좋은 소리를 많이 듣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일 것 같다.
“보통사람에게는 먼저 소리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비유하자면 노다지를 제련하는 일과 같다. 진금(眞金)을 얻으려면 잡철(雜鐵)을 떼어내야 한다. 좋은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면서 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다. 잡철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차(茶)도 마찬가지다. 좋은 음악과 차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만든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곧 기쁨이 된다는 의미다. 존재 자체가 기쁨이다.”
화류목으로 만든 명품 스피커
일명 스님은 “좋은 음악과 좋은 소리를 들으려면 스피커가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수준 높은 음질을 접할 수 있다. 음악에서 스피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니 75% 정도라 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 사람도 입이 좋아야 한다. 또 저수지의 수도꼭지와 같다.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수행자가 도를 이루면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표현은 곧 말이고, 말은 곧 소리다. 화엄에서 말하는 사무애(事無碍)도 그 최종적인 실천은 말을 통해서 이뤄진다. 우리가 일을 풀어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고, 소리가 중요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덕을 쌓으면 그 공덕의 결과는 말로 돌아온다.
어쨌든 좋은 스피커는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좋은 스피커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소리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고음부터 저음까지 모두 소화해야 한다. 그런데 국악을 소화하기가 특히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쟁으로 내는 소리는 매우 작지만 나발(호적) 소리는 매우 크다. 즉 소리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것이다. 이러니 국악을 소화할 수 있는 스피커는 좋은 스피커다.
일명 스님에게 “세계적으로 좋은 스피커를 구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오디오쇼’에 가면 된다고 한다. 미국의 ‘LA CES 쇼’와 ‘뉴욕 하이파이 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전자 쇼’, 일본의 ‘도쿄 오디오 쇼’가 유명하다. 오디오 쇼에는 대략 400여 업체가 참여한다. 일명 스님도 자신이 직접 만든 스피커를 가지고 2003년 ‘LA CES 쇼’에 참가했다. ‘구쓰’ 나무로 외장(外裝)한 스피커였는데, 참가자들로부터 엄청난 러브콜을 받았다. 세계무대에 그의 존재를 알린 사건이자 명품 스피커는 서구 선진국에서만 만들 수 있다는 통념을 깬 사건이기도 했다.
일명 스님은 스피커의 외장을 어떤 나무로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인도네시아산 구쓰 나무로 정했다. 구쓰 나무는 독특한 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화류목(樺榴木)’이라고 불렀다. 화류목으로 만든 가구를 화류장이라고 하는데, 최상급의 가구로 취급된다. 중국에서는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만 쓰던 가구다. 그만큼 귀한 구쓰 나무는 묵직하면서도 화려한 진홍색에 무늬가 독특하다. 호랑이 발자국 같은 무늬가 나오기도 한다. 강도도 대패질이 안 될 정도로 매우 단단하다. 그래서 한번 만들어놓으면 대를 이을 정도로 오래간다.
화류목의 산지는 인도네시아나 미얀마 같은 동남아시아의 밀림지대다. 보통 500∼1000년의 수령을 지닌 귀목이라야 가구로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나무의 ‘혹’ 부분이 가치가 있다. 인도네시아 말로 ‘구쓰’는 혹이란 뜻이다. 나무의 혹이 수백 년 된 것을 잘라서 쓰는데, 혹이 자라서 가구에 사용되려면 적어도 나무가 500년에서 길게는 2000년 가까이 자라야 한다.
일명 스님은 화류목을 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화류목 산지를 여러 번 방문했다. 상인들의 농간에 거액을 사기당하는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최상의 음질과 디자인을 구비한 스피커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양질의 화류목을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한 나무로 스피커의 외장을 만들었으니 서구인들이 그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좋은 스피커를 만들 수 있는 요건이 있다면 무엇인가. 음질에 대한 남다른 감식력인가, 아니면 예민한 청각인가.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많다.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소리를 직접 만드는 사람은 적다. 왜 그런가.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무협지에서 말하는 비급을 완성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무림에 나가 잘난 척을 한다. 그러다가 고수를 만나 처참하게 깨진다. 절치부심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절대고수인 사부를 만난다. 사부의 지도를 받으면서 험난한 역경과 수도생활을 거친 후 마침내 비급을 마스터한다. 무협지 시리즈가 대강 이렇다.
내가 스피커를 만들며 겪은 과정도 이와 흡사하다. 처음에는 조그만 지식에 우쭐해서 스피커를 만들었다. 싸구려 스피커보다는 좋은 성능이었으나, 명품 스피커와 견주어보니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런 후 명품 스피커를 가져다놓고 내 것보다 무엇이 좋은지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낮은 단계에서는 높은 단계의 내공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수는 고수의 경지를 모르게 마련이다. 좋은 소리는 낮은 단계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스피커 만드는 기술은 어느 정도 공개되어 있다. 여기서 치고 올라가려면 ‘공덕(功德)’이 있어야 한다. 공덕이 있어야 좋은 스피커를 만들 수 있다.”
-좋은 스피커 만드는 일과 공덕이 어떻게 서로 연결된다는 말인가. 스피커 만드는 일은 형이하학적이고 기술적인 분야고, 공덕을 쌓는 일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분야 아닌가. 이것이 어떻게 서로 연관된단 말인가.
“두 차원이 전혀 관련 없어 보여도 사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좋은 스피커를 만들려면 자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이라는 것도 인연이다.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결국 자본을 대게 마련이다. 자본도 사람이 가지고 오는 것이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이 분야에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팀워크가 잘 이루어져야 좋은 스피커를 만들 수 있다. 인연이 있어야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을 만나려면 평소에 공덕을 쌓아놓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껍데기로 보면 기연(奇緣)이지만 알고 보면 공덕의 대가다. 영감도 같은 차원이라고 본다. 적선과 적덕이 축적되면 영감이 열린다. 홀연히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일명 스님은 공덕을 쌓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 단계는 물질로 타인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장 초보적이자 아래 단계에 속한다. 둘째 단계는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고 되도록 육식을 적게 하며 욕심을 줄이고 하루에 1시간 이상 혼자 있으면서 자기를 성찰한다. 셋째 단계는 선정력(禪定力)이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소위 말하는 기도발(祈禱發)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도를 일심으로 하면 정신통일의 상태에 들어가고 이러면 정신세계에서 응답을 한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다. 또 기도를 제대로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일명 스님은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것은 공덕이라고 강조했다. 공덕을 쌓아야 자본과 인연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 스피커를 만드는 역량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명 스님이 공덕을 쌓기 위해 실천한 방법은 무엇이었나. 우선 보약의 일종인 쌍화탕(雙和湯) 공양을 행했다. 1년에 1000재씩 다려 전국 선방의 스님들에게 무상으로 공양한 것이다. 한약 1재가 20첩 분량이니 1000재면 무려 2만첩이나 된다. 게다가 전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약재를 구해 직접 정성스럽게 다렸다. 약을 다리는 솥단지도 그가 직접 제작했다. 효험이 있으려면 적정 온도에서 끓고 적절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히 제작한 솥의 재료는 구리였다. 구리 300kg을 사용해 만든 솥의 밑바닥에는 1000만원어치의 순금을 사서 붙였다. 그것도 방자(方字)로 쳐서 붙였다. 금이 자연스럽게 녹아나야 약의 효과가 높아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만발공양
그가 설명하는 공양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대중공양은 한 사찰에 머무는 모든 스님에게 제공하는 공양이다. 산중공양은 한 산에 있는 여러 절의 모든 스님 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대중공양보다 범위가 넓다. 산중공양보다 큰 규모의 공양이 만발(滿鉢)공양이다. 전국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모든 스님에게 하는 공양을 가리킨다.
일명 스님은 만발공양을 두 번이나 했다. 그는 만발공양을 실천하기 위해서 솥단지와 쌀, 반찬 등을 직접 가지고 다니며 전국을 순회했다. 장비 일체를 실을 수 있는 래커차를 몰고 다녔다. 보통 차에는 거대한 솥단지를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방문하는 절에 부담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절의 주방기구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만발공양 한 번에 찹쌀만 120가마가 들었다고 한다. 돈으로 환산하면 몇 억원이 들어가는 공양이다. 그가 만든 명품 스피커의 보이지 않는 밑바탕에는 이런 투자와 정성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적 소리’ 내는 혼형 스피커
스피커는 크게 콘(corn) 스피커와 혼(horn) 스피커로 나뉜다. 콘 스피커는 소리를 직접 방사하는 방식으로 증폭장치가 달려 있지 않다. 보통 가정용 오디오에 달려 있는 네모진 스피커다. 반면 혼 스피커는 넓은 공간과 먼 거리에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스피커다. 소리를 드라이브, 즉 증폭시킨다. 마치 입에다 두 손을 모아 말하는 형식이다. 모양은 커다란 나팔과 비슷하다. 일명 스님이 만드는 스피커는 혼형이다. 그는 한국적인 소리를 내는 데는 혼형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지난 27년간 개발해온 스피커는 모두 혼형이다.
오디오에 빠지면 ‘자식들 학비는 못 줘도 오디오는 산다’는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오디오 마니아라 부를 만하다. 이들이 이른바 하이 엔드(high end) 오디오를 만든다. 이는 단순히 기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소리에 미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세계적인 명품 오디오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여성들 중엔 오디오 마니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마니아는 대부분 남자들이다. 일명 스님의 부친도 마니아였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일명 스님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이미 자기 몸 내부에서 소리가 완성되어 있다. 하지만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밖에서 소리를 완성하려고 한다. 오디오에 빠지는 것은 이런 욕구의 분출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한다.
스피커의 품질을 좌우하는 요소를 정리하면 음향공학에 밝아야 하고,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돈이 있어야 한다. 일명 스님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관음음향연구원(觀音音響硏究院)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스피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한다. 사장은 관음포교원의 신도회장이 맡고 있다. 공학박사도 몇 명 포진해 있고, 오디오 마니아도 상당수 참가하고 있다. 또한 오디오에 관련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돼 수시로 정보를 교환한다. 일명 스님이 이 연구원에서 하는 역할은 만들어진 스피커로 소리를 들어보는 일이다. 일종의 ‘스피커 소믈리에’라고 보면 적당하다.
일명 스님은 “각 나라에서 생산되는 스피커는 그 나라 국민의 소리를 담는 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가령 미국의 ‘윌슨’ 오디오는 미국적인 소리, 즉 사실적인 소리를 내는 데 적합한 그랜드슬램 스피커를 만든다. 가격은 2억원을 호가한다. 프랑스에서 유명한 ‘포칼’에서 나온 ‘그랜드 유토피아’ 스피커는 포도주 냄새가 나는 스피커라고 한다. 스위스와 독일이 합작한 ‘골드문트’ 스피커도 유명한데, 자연에 가깝고 투명한 소리를 낸다. 가격은 2억3000만원 정도 한다. 그렇다면 일명 스님이 추구하는 스피커의 스타일은 어떠한가. 한국적인 취향과 에너지를 반영하는, 즉 한민족의 한(恨)과 흥(興)을 표현할 수 있는 스피커다.
관음포교원 옆의 관음문화원에 들어가면 일명 스님이 직접 마련한 음악감상실이 있다. 그가 직접 제작한 스피커를 비롯해 음향시설 일습이 갖춰져 있다. 벽에는 스펀지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스크린이 있어 영화도 볼 수 있다. 이 공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2MF’ 모임이 이뤄진다. ‘Movie and Music Forum’의 약자다. 영화감독들과 오디오 애호가들이 만나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즉 영상과 소리의 배합을 감상하는 모임인 것이다.
필자가 찾았을 때 이곳에서는 중국 장예모 감독의 최근작 영화 ‘연인’을 상영하고 있었다. 남자 무사가 북에다 콩을 튕기면 다시 그 콩이 수십 개의 북에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는 장면과 기녀(妓女)가 소맷자락으로 역시 북을 튕기는 장면이 있었는데, 화려한 색상과 박진감 넘치는 소리의 배합이 인상적이었다. 혼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은 시각과 청각을 온통 화면으로 몰고 가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사운드였다. 매료당해야 번뇌가 사라진다고 했던가. 필자와 같은 범부에게는 바닷가의 해조음보다 DVD를 시청하면서 듣는 박진감 넘치는 음향이 번뇌망상에서 벗어나는 데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과연 스님이 만든 스피커는 사운드가 다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소감이라면?
“소리에 대한 내 느낌을 표현한자면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기분이다. 어느 단계까지는 좋은 오디오와 스피커가 기쁨을 준다. 이 과정에서 좋은 기자재를 구입하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시작된다. 그러다 보면 ‘얼마짜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피곤하다.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면 모든 소리가 음악으로 들린다. 모든 소리가 음악이고 춤이다. 물론 이는 한참 진행된 차원이다.
일상생활에 지친 일반인들에게는 일차적으로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을 들으며 기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다. 삶의 피로를 푸는 데 소리가 좋은 역할을 한다. 소리를 듣다 보면 단순해지고 소박해질 수 있다.”
고수를 만나야 안목이 열린다.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간 소리에도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진리를 확실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