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뚱한 사람은 못하는 게 너무 많다. 번지점프도 못하고, 기성복도 못 입고, 수영장 미끄럼틀을 타려면 각서를 써야 한다. 뚱뚱한 것도 죄인가. 생명보험 가입마저 거절당한 130kg짜리 청년이 분노의 다이어트에 돌입, 1년 만에 자그마치 52kg을 감량했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게으름을 치유하는 일”이라 설파하는 정찬민의 ‘살 덜어내기’ 비법.
‘130kg이라는 거구의 몸을 건사하며 살아가던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어느 날 무슨 일엔가 충격을 받고 살을 뺄 결심을 한다. 그리고 1년 후 52kg을 감량해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이 단순한 시나리오에 동의할 수 없다.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30kg의 그 사내는 한순간에 충격을 받고 다이어트를 결심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갑자기 52kg을 감량해서 나타나지도 않았다. 어떤 복합적인 사연들이 내가 다이어트를 결심하도록 만들었는지, 사람들이 짧게만 여기는 1년 동안 내가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고백하려 한다.
번지점프장에서 뒤돌아서다
일러스트·정훈이
드디어 매표소에 이르렀다. 이제 돈을 내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서 폴짝 뛰어내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지갑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던 중 갑자기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 허약자나 임산부 등은 번지점프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임산부는 할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밑의 내용을 마저 읽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몸무게 제한이 있었다! 몸무게의 하한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몸무게의 상한선이다. 숫자에 약한 내가 왜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확히 120kg이었다. 그 이상인 사람은 번지점프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단 입구에는 체중계까지 놓여 있었다. 그것도 정밀한 전자체중계였다. 나는 그만 기가 팍 죽어버렸다. 당시 내 몸무게는 130kg 정도였다. 한계 체중보다 무려 10kg이나 많이 나갔던 거다.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매표소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친구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들떠 있다. 결국 나는 머리가 아프다고, 아니 멀미가 난다는 핑계를 댔다(사실 난 멀미를 하지 않는 체질이다). 아무도 나에게 멀미를 참아가며 번지점프를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래, 어차피 하고 싶지 않았잖아, 안 그래? 그렇다. 분명 나는 조금 전까지 번지점프를 안 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왁자지껄 계단을 올라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미묘한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난 그 순간 번지점프를 못하게 된 것을 분명 억울해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살이 쪘다는 이유로 번지점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창피했다. 진행요원의 눈을 슬쩍 교란시키고 올라갈까 싶기도 했지만 친구들이 “찬민이가 번지점프 하다가 줄이 끊어져서 죽었대” 하며 떠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 옥주현이지…”
여자들은 우리에게 핑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라고 했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배역을 정하는 시간. 남자 네 명 앞에 몰려온 여자들은 남자들의 얼굴과 몸을 찬찬히 뜯어보며 누구에게는 누구 역할이 어울린다는 식의 논쟁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내가 무슨 배역을 맡을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구는 피부가 희니까 성유리를 하라든가, 누가 이효리 역할에 더 어울릴 것 같다며 마치 핑클의 공연 기획자라도 된 양 모두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던 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누구 할까요?”
아주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선배 한 명이 뻔한 걸 물어본다는 어조로 답했다.
“넌 옥주현이지. 왜? 혹시… 딴…거 하고 싶어?”
이럴 수가! 언제나 그랬듯이 내 배역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뭐, 기분이 나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 내 사진을 본다면 옥주현씨가 기분이 나쁠 것이다. 내가 옥주현이라는 가수를 싫어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난 항상 친구들에게 핑클 멤버 중에서 실제로 보면 옥주현이 가장 예쁠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어색해한 건 배역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처럼 내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다른 배역을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서다. 연극을 하거나 장기자랑, 혹은 운동회를 할 때마다 나의 배역은 뭔가 ‘크다’ 혹은 ‘뚱뚱하다’는 이미지와 관련이 있었다. 내게도 뚱뚱한 사람이 아닌 무언가 다른 배역을 해볼 기회를 달란 말이다!
하고 싶은 역할이 있어도 사람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내 인생의 무대를 자기들 멋대로 재단했다. 인생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마음에 드는 목표가 있어서 달려가고 싶을 때도 언제나 나를 막아섰던 것은 ‘그건 너한테 안 어울린다’는 사람들의 충고였다.
이보다 더 심각했던 건 내 겉모습만 보고서 나도 모르는 나를 그들 속에 입력시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면접관이나 업무상 만난 사람들에게 나는 절대 지적이거나 명철한 이미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나는 조용히 시키는 일이나 하는, 앞에는 절대 나서지 않고 나설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비춰질 때도 있었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을 뺄 생각도 안 했고, 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살을 뺀 데에는 세상이 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포함돼 있었다. 모두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 혼자 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당신은 오래 살 수 없습니다’
2년 전, 주위 사람들이 당뇨병이나 불의의 사고 등으로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죽음에 대한 나의 불안감은 나날이 커졌다. 특히 비만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내가 선택한 것은 운동이나 생활습관의 개혁이 아닌 생명보험이었다.
이런저런 보험회사들을 알아본 후 보험회사 직원에게 연락을 했다. 질병·상해·생명보험이 한꺼번에 되는 보험상품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자 직원은 친절하게도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다.
보험사 직원이 사무실에 찾아온 후에야 나는 보험에 들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명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가입을 위해 체크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나 많았다. 신체관련 사항은 물론이고 병력(病歷)에서부터 심지어 취미까지 적어야 했다. 수없이 많은 V표를 한 후, 보험사 직원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러자 계약 한 건을 성사시켜 즐거워해야 할 그의 얼굴에 일순간 난처한 표정이 감돌았다. 내가 솔직하게 적어놓은 몸무게가 문제가 된 것이다. 직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체중이 100kg 이상이면 보험 가입이 어렵다고 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어려울 때 힘이 돼준다던 광고 문구는 다 어쩌고 겨우 그깟 몸무게 때문에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니. 그의 말인즉 보험 가입 여부는 확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므로 회사에서 위험부담을 가질 확률이 높은 고객은 가입을 거절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내가 보험금을 탈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더할 수 없이 우울했다. 보험회사 직원으로부터 ‘당신은 오래 살 수 없습니다’라는 판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죽음이나 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완장치를 만들어두려 했지만, 살을 빼기 전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무엇보다 살을 빼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을 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홈쇼핑 TV의 광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먹기만 하면 체지방이 뭉텅뭉텅 줄어든단다. 평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던 나는 그날만은 웬일인지 다른 채널로 돌릴 수가 없었다. 대학교수의 인터뷰가 나오고 연구원들이 체지방 감소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까지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단 몇 달 만에 완벽하게 살을 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효과가 없으면 100% 환불까지 해준다지 않는가!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짧은 기간에 나는 비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물건은 직접 사야 제 맛이며, 홈쇼핑 회사의 물건을 어떻게 믿고 구입할 수 있냐’는 평소의 생각, ‘운동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을 빼는 것이 과연 과학적으로 가능하냐’는 평소의 의문과는 반대로 홈쇼핑 회사의 주문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저 약만 사면 큰 고통 없이 살을 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하지만 세상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거의 몇십분간 전화와 씨름하다 지쳐버린 나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노력을 통해 살을 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살펴보니, 전날 홈쇼핑에서 봤던 상품은 의약품이 아닌 식품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결국 거짓말처럼 살을 빼는 신약이 아니라 식품보조제에 불과했고, 그나마 아직 실험중이었다. 역시 믿을 만한 것은 운동뿐인가?
떡볶이, 만두, 튀김…. 엄청난 칼로리의 음식을 먹어댔던 130kg 시절의 정찬민씨.
나름대로 짜낸 아이디어가 세 끼니마다 밥 대신 과일을 하나씩 먹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끼니마다 과일 한 개만 먹었다. 식당에 가지 않는 나를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 청승맞게 과일을 먹었다. 과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씩 베어 물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첫 시도 아닌가.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효과는 빨랐다. 첫날 몸무게를 재어보니 무려 0.7kg이나 빠진 게 아닌가. 이거다 싶었다. 하루에 0.7kg씩만 빠지면 얼마 안 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 여기다가 약간의 운동만 해준다면 정말로 일이 쉽게 진행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점심시간 후 30분씩 산책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 한 끼에 과일 하나를 먹고 30분 동안 산책하기를 계속했다.
당시 내 관심사는 오직 몸무게였다. 건강이나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몸무게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수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체중계의 수치는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몸을 망친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몸무게가 조금씩 줄고 얼굴이 까칠해지는데도 내 외형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약간의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무작정 굶어서 몸무게가 줄어들 경우 몸속의 지방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근육과 수분이 파괴된 결과라고 한다. 그래서 몸무게가 줄어가는데도 넉넉한 몸매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던 것 이다.
정씨는 다이어트 이후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게 됐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체중계에 올라섰다. 경악 그 자체였다. 일주일간 힘겹게 뺀 몸무게에 약간의 몸무게가 더해진 것이다. 그간의 고생이 말짱 ‘꽝’이 되고 만 것이다. 이후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도전을 해봤지만 3일간 굶고 한 번 왕창 폭식하는 식이었다. 다시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기로 했다.
점심 폭식, 밤 11시 야식
대신 등산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먹는 것을 조절하지 않고 등산을 해봤자 모든 것이 허사였다. 줄넘기도 해봤지만 무릎과 발목이 너무 아파서 계속할 수 없었다. 실패를 거듭한 후에야, 살을 빼기 위해 중요한 몇 가지 요소들이 내 생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내게는 규칙적인 운동 시간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점심시간도 좋았고 저녁도 좋았다. 꼭 운동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결국 저녁 때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갑자기 약속이 생겨버리면 그날 운동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한 운동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이나 할 정도였다.
둘째, 규칙적인 운동시간이 있다고 해도 내 생활이 그 리듬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이틀에 한 번꼴로 여전히 저녁 약속이 있었고, 약속이 없더라도 밤늦게 잠드는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늦잠 때문에 아침 운동은 할 수 없었고, 저녁 운동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런저런 약속 때문에 거르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꼭 운동해야겠다는 정신자세를 갖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셋째, 나는 여전히 운동량에 비해 많이 먹고 있었다. 한 끼에 과일 하나만 먹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몸에 좋지도 않았다. 물론 그마저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비록 다이어트 전문가는 아니지만 살을 빼기 위해서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사량도 조절할 수 있고 규칙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했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내 생활방식은 대학원 시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학생 시절보다도 자유시간, 즉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대개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9시나 10시에 일어나다 보니 자연히 아침을 먹지 않게 됐다.
2001년 여름 130kg이 나가던 정찬민씨.
점심을 많이 먹으니 남들이 저녁을 먹는 시간에는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러다 밤 11시가 넘어서 야식을 먹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내 생활은 점점 더 망가져갔다.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학교 다니던 시절의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려한 저녁’과 작별
과거를 돌아보고 또 현재의 내 모습을 살펴보니, 내 생활을 망치는 대부분의 원인은 저녁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만약 저녁에 일찍 잠들 수 있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훨씬 쉬울 것이다. 저녁에 일찍 자는 것은 화려한 저녁 생활을 청산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여유시간을 만들다 보면 운동도 규칙적으로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일찍 잠들수록 야식을 먹는 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궁리를 거듭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저녁에 일찍 잠드는 생활을 정착시켜보자! 나에게 강제성을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은 역시 학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조사 끝에 집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그 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교과과정이 길고 엄격하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학원을 수료하려면 모두 6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단계마다 2개월씩 꼭 1년을 다녀야 모든 과정을 끝낼 수 있다고 했다. 규칙적으로 살을 뺄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학원을 다니려고 한 내게 특별히 매력적이었던 점은 2개월 동안 7회 이상 결석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고 유급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냉큼 학원으로 달려가서 새벽 6시 수업을 등록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은 운동이나 음식 문제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학원을 빼먹지 않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커다란 자명종 시계부터 샀다. 감미로운 멜로디 알람시계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어 그야말로 무식하게 ‘따르릉 따르릉’ 울려대는 시계로 골랐다.
시계를 놓는 장소는 화장실로 정했다. 시계가 울리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알람을 끄고 세수를 한다는 치밀한 작전까지 세웠다. 문제는 저녁에 일찍 잠드는 일이었다. 저녁 9시30분이 되면 잠이 오든 오지 않든 간에 무조건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물론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한 일주일간은 1시간 정도를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5시면 화장실에서 울려대는 끔찍한 시계소리에 잠을 깼다. 처음 몇 번은 불이 난 줄 알았다. 재빨리 세수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수월해졌다. 저녁 시간에는 일부러 휴대폰을 꺼놓았다.
가끔 낮 시간에 전화하는 친구들에게는 “새벽에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해. 만약 제 시간에 잠을 자지 못해서 아침 수업에 지각하거나 결석할 경우 똑같은 단계를 다시 등록해야 하는 재정적 손실까지 감수해야 한다니까” 하면서 엄살을 떨었다. 2단계에 이르니 가끔 자명종이 울리기 전에도 눈이 떠졌다.
반대로 저녁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다. 학원 수업을 위한 예습 시간이 단축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예습을 끝내고도 한두 시간이 더 남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를 놀러가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문득 이 시간이야말로 운동을 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시간임을 깨닫게 됐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한두 시간 영어공부를 한 뒤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들면 그만이었다. 일단 시간은 확보됐다. 그러나 무슨 운동을 할 것인가가 새로운 숙제로 떠올랐다. 등산도, 줄넘기도 모두 실패하지 않았던가.
고민 끝에 헬스클럽으로 향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운동을 안 할 핑계를 없애기 위해서다. 야외에서 운동할 수도 있지만,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이라도 날씨가 춥거나 우중충하면 나는 이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아낼 것이다. 둘째로 러닝머신 같은 기구가 있어서 속도나 시간을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등산도 해봤지만 쉬고 싶을 때 쉬고 속도도 제 맘대로여서 운동 계획을 세우기 어려웠다.
헬스클럽을 가기로 결심했지만, 휘황찬란한 피트니스 센터는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격도 비싸고 너무나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주눅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네의 작은 (비교적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가는) 헬스클럽을 찾았다. 그곳에서 내가 아는 기구는 러닝머신뿐이었다. 내키는 대로 뛰다가 힘들면 걸었다.
러닝머신에 올라가면 최소 40분 이상 쉬지 않고 운동해야 한다. 20분 운동하고 쉬는 패턴으로는 몸속의 지방이 타지 않기 때문이다.
현미밥 + 2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
간식이나 야식 문제는 대충 해결됐지만 나의 식생활엔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양의 문제. 나는 식사 때마다 뱃속이 꽉 찬 느낌이 들 때까지 먹었다. 다음으로는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의 종류가 문제였다. 제때 밥을 먹기는 했지만 나는 몸에 좋은 음식보다는 입에 좋은 음식만 먹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와 고기, 라면이나 자장면 빵 같은 밀가루 음식, 혹은 자극적인 찌개 종류, 튀김 등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똑같은 양을 먹어도 더 자극적이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만 골라 먹었던 것이다.
첫째 문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해결됐다. 열쇠는 금식이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금식기도였다. 금식기도는 정해놓은 기간에는 물 외의 것을 전혀 입에 대지 않으면서 오직 기도에만 집중하는 의식이다.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일주일간 물만 마셨다. 사실 금식기도 후에는 죽같이 연한 음식을 먹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충고에 따라) 현미밥 두 숟가락을 먹었다. 단 그 두 숟가락의 현미밥이 물이 될 정도로 천천히, 아주 많이 씹어서 넘겼다. 놀랍게도 배가 불렀다. 힘이 솟았다. 그리고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그 이후로 양이 조금씩 늘어나긴 했지만 예전 식사량의 50%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현미밥을 아주 오랫동안 꼭꼭 씹어먹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 흰쌀밥을 먹어 보았지만 현미밥이 주는 포만감을 따라오지 못했다. 흰쌀밥과 현미밥을 똑같은 양으로 먹어도 더 든든한 것은 현미밥이었다. 밥 먹는 속도를 빨라지게 만드는 국이나 찌개 같은 것들도 멀리하게 되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따뜻한 물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패스트푸드와 청량음료는 내 생활에서 사라져갔다.
생활습관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식생활도 자리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더 체계적인 운동을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니 정보는 많았다.
오랜 자료수집 끝에 내키는 대로 뛰다가 걷는 나의 운동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뛰거나 걷기에 상관없이 최소 20분 이상은 쉬지 않고 운동해주어야 체지방이 연소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20분이라는 긴 시간 쉬지 않고 운동한 적은 없었다.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체계적인 운동 방식을 구상했다. 물론 방식은 걷기였다. 내 무릎 관절을 위해 걷기가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정을 짰다.
혹 신체 건강한 분들은 “애걔걔, 저 정도도 운동이야?”하고 되물으실지 모르지만, 이 정도 속도도 나에게는 벅찼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한 방법은 아니었기에 적응하기가 쉬웠다. 몇 번이고 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운동이 끝나면 몸은 땀으로 젖었고 기분은 상쾌했다.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 쉬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있었다. 무작정 운동할 때보다 더 많은 양의 땀이 나는 것도 느껴졌다. 몸이 제대로 달궈진다는 의미일까. 그럼 지방도 탔을까.
몸은 이런저런 궁금증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몸무게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평균 일주일에 1kg씩 살이 빠졌다. 한 달 동안 4kg의 몸무게를 뺄 수 있었던 것. 물론 매일 몇 그램씩 정확히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조금, 또 어떤 날은 많이 빠졌다. 그렇지만 일주일 단위로 봤을 때 1kg씩은 꼭 빠졌던 것 같다. 매일 몸무게를 재봤기 때문에 조금 빠지는 날은 굉장히 우울했다. 매주 체중감량이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술술 앞으로 나아갔던 건 아니다. 음식을 아예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이어트를 할 때 너무 자주 몸무게를 재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옷이 점점 커지고 있는가다. 그것이야말로 체지방이 줄어든다는 가장 건강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약으로 뺄 수 있는 건 몸무게뿐
나는 한 번도 기성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러닝머신 위에서 땀 흘리며 걷는 것이 지칠 때면 가장 많이 상상한 것도 ‘살을 빼면 어떤 옷을 입을까’였다. 살이 조금씩 빠지면서 38인치 바지와 105 사이즈의 폴로셔츠를 샀다. 몇 번이고 입어봤지만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감이 좋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으로 갔다. 신성한 제사라도 드리는 양 옷을 꺼냈다. 바지에 다리를 넣었다. 가뿐히 들어간다. 허리를 채웠다. ‘철컥’ 하고 채워진다. 셔츠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쫄티’ 같았던 사이즈다. 옛날처럼 어깨도 안 들어가면 어쩌나 했지만 몸이 술술 들어간다. 나도 이제는 기성복이 맞는다.
우여곡절 끝에 더욱 살이 빠졌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했던 영어학원 코스도 마쳤다. 체중은 어느새 약 78kg으로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때문에 미국 비자 심사를 위해 대사관을 찾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 문제 없이 미국 비자를 받지만 간혹 심사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 차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를 앞에 두고 영사는 2000년도, 즉 살이 쪘을 때 찍은 나의 여권 사진과 살이 빠진 뒤 찍은 비자 심사 서류의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살을 어떻게 뺐느냐고 질문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걸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이던 영사는 급기야 심사대 뒤에 있던 자신의 동료들을 소리쳐 불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몰려드는 대사관 직원들. 내 사진을 돌려보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결국 다이어트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만 받고 나는 미국 비자를 받았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살이 빠진 덕에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비자를 받은 것은 아닐까.
텔레비전에서 과학자들이 비만을 유발하는 유전인자를 찾아냈다고 한다. 아무 부작용 없이 손쉽게 살을 뺄 수 있는 약이 개발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내가 예전처럼 뚱뚱하다면 나도 그 약을 살까. 아니, 그렇지 않다. 약으로 뺄 수 있는 건 고작 몸무게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통해 약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었다. 게으름을 날려버렸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매사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으로 변했을뿐더러 운동을 통해 흥분과 분노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살이 빠진 것은 보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