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네 양조장은 극히 폐쇄적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는커녕 뭐 하나 들킬세라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반면 일본의 양조장은 개방적이다. 주조 과정부터 시음과 판매까지 한눈에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축제 분위기도 크게 다르다. 우리의 축제는 술 마시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일본의 축제는 술 만드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사이조 카모츠루 양조장에서 술을 빚을 때 부르는 노동요를 선보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인사동에서도 막걸리 축제가 열리는데 상황은 비슷하다. 막걸리 축제의 주인공인 막걸리 제조업체의 참여율이 매우 저조하기 때문이다.
농림부는 지난해 제1회 우리 술 페스티벌을 인사동에서 개최했다. 또 전주 전통술 박물관에서도 전주 풍남제 행사의 일환으로 술 축제를 열었다. 하지만 두 행사 모두 너무 서둘러 치르는 통에 많은 양조장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어디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좀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던 차에 일본에서 술 축제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일본행을 감행했다. 지난 가을의 일이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에 내렸다. 한국에서 일본까지 가장 가까운 항로라 3시간쯤 걸렸고, 뱃삯도 7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먼 나라 일본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술 축제가 열리는 곳은 후쿠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해야 하는 히로시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지점의 참상을 보여주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40km 떨어진 동히로시마의 사이조(西條) 마을이다. 동네는 그리 크지 않지만, 15년째 계속되는 술 축제 때문에 유명해졌다.
사이조로 가기 전에 후쿠오카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큰 동네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가 서운해서다. 더욱이 동행한 이가 후쿠오카의 한 양조장 주인을 잘 안다고 했다.
양조장 주인은 히로(40)씨다. 아버지는 와인 양조장, 할머니는 소주 양조장을, 자신은 청주 양조장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안에서 양조장을 처음 시작한 것은 무려 300년 전 일이라고 한다. 히로씨가 14대째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30분쯤 차로 이동하자 히로씨가 운영하는 와카타케야 양조장이 나왔다. 검은색 판자를 덧댄 외벽이 3층 높이쯤 돼 보였다. 양조장과 살림집이 2층에 함께 있고, 1층은 음식점이다.
히로씨는 필자를 공장의 발효실에서부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코오지(일본의 쌀알누룩) 제조장까지 안내했다. 근처 산자락에 있는 아버지의 와인 양조장과 할머니의 소주 양조장도 보여줬다. 소주양조장 앞에는 관광버스가 한 대 와 있었고, 관광객들이 전시장에서 시음도 하고 술도 사고 있었다.
히로씨의 할머니는 올해 여든이 넘었는데, 젊은 시절 “우리 집안이 술 만드는 회사인데, 소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직접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말이 있다. “빚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빚을 많이 지라는 얘기가 아니라, 빚을 내서라도 회사를 지키라는 뜻이란다. 그 말에서 14대째 양조장을 지켜낸 힘이 느껴졌다.
히로씨의 양조장을 살펴보면서 처음 든 느낌은 매우 개방적이라는 것. 양조장에는 일반인들이 들어와 관람할 수 있는 자그마한 전시장이 있다. 양조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며 이제는 임무가 끝난 발효통과 술병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든 술들이 전시돼 있다. 물론 술을 살 수도 있다.
시음은 주로 식당에서 이뤄진다. 식당은 그리 크지 않다. 주 고객은 밥해 먹기가 귀찮은 동네 사람이나 부근의 회사 사람들이다. 일반 식당과는 차이가 있다. 점심 때는 정해진 양만 팔고, 저녁 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다. 식당은 사람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양조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양조장은 어떠한가. 개방적인 곳이 별로 없다. 대형 주류회사들은 더러 견학코스를 만들어놓기도 하지만 수박 겉핥기식이고, 작은 양조장은 문을 꼭꼭 걸어 잠궜다. 작은 양조장들은 “매일 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 보여줄 게 없고, 술을 만들 때는 청결 문제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이 디자인한 상표를 보고 즐거워하는 술 학교 수강생들.
히로씨와 함께 후쿠오카의 다른 양조장에 가보았다. 양조장 간판에는 옛날식 여과 방식을 쓰고 있다고 적혀 있다. 히로씨가 처음 찾아가는 곳인데도, 양조장을 지키던 여주인이 공장 안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게 안내해줬다. 양조장의 초입에는 작은 전시 공간이 있다. 일반인들이 술을 시음하기도 하고 살 수도 있는 곳이다. 시음장에서 돌아서면 양조장이다. 양조장 문틀 위에는 주신(酒神) 마츠오(松尾)를 모신 작은 제단이 있다.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여과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시소처럼 생긴 나무기둥을 천장 높은 대들보에 연결해놓았는데, 한쪽에는 장정 혼자서는 들 수 없는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여럿 매달고 반대쪽엔 여과 틀로 압착하는 장비가 연결돼 있다. 지금은 전기와 엔진의 힘을 빌려 술을 짤 수 있을 텐데도 여전히 옛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기계로 짠 것과는 맛이 다르다는 게 이유다. 옛 방식을 보려고 찾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일본 술의 기원, 백제인 ‘수수거리’
양조장에서 나오는 길에 히로씨에게 수수거리(須須許里)를 아냐고 물었다. 수수거리는 3세기경 일본에 건너가서 술을 빚었던 백제인이다. 일본 ‘고사기(古事記)’에도 나오는데, 일본 술의 기원을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수수거리 때문에 ‘일본 술은 한국 술’이라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과장된 논리다. 한반도의 술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은 나름의 술을 만들어왔다.
히로씨에게서 뜻밖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수수거리’라는 이름의 술을 자신의 양조장에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1700여년 전의 백제인을 기려 술을 빚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의 양조장에서 수수거리 술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상표에는 ‘고주(古酒)’라 새겨져 있었다. 오래 숙성시킨 술이라는 뜻이다.
술 이름 옆에는 수수거리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있었다. ‘고사기’ 내용도 인용되어 있고, 그를 기려 후쿠오카의 양조장들이 똑같은 이름으로 저마다 술을 빚고 있다고도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잊어버린 이름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수수거리 술 한 병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히로씨와 헤어지려는데, 히로씨가 저녁에 후쿠오카양조협회에서 주관하는 ‘술의 학교’ 수료식이 있다고 했다. ‘술의 학교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히로씨는 기꺼이 동행을 허락했다. 술의 학교 프로그램은 2개월 코스로,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있었다. 제2기 수강생은 20명 남짓.
마지막 수업은 수강생들의 상표 디자인 발표회로 진행됐다. 일본 청주병은 우리 소주병처럼 크기나 모양이 거의 동일하다. 물론 회사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의 술병을 쓰기도 한다. 일본 양조장의 특징 중 하나는 한 회사에서 한두 가지 제품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양조장이라도 열 가지 이상의 상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보통 50가지는 만들어낸다.
수강생들이 디자인한 상표는 700ml 술병에 붙일 수 있는 크기였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서 디자인한 이유와 작명한 술 이름에 대해 설명했다. 강의가 끝나고 뒤풀이가 인근 레스토랑에서 이어졌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수강생들이 디자인한 상표들이 술병에 붙여져 전시돼 있었다. 수강생들이 이동하는 사이에 협회에서 준비해둔 것이다. 수강생들은 마치 자신이 술을 만들기나 한 것처럼 자신의 상표가 붙은 술병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면서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일본에선 개인이 술을 만드는 것이 불법이다. 후쿠오카양조협회가 술의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술 빚기 체험 과정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에선 개인이 술을 빚는 것은 자유롭다. 다만 그 술을 남에게 주거나 팔면 위법이다.
행사의 마지막 건배 구호는 “후쿠오카 사람은 후쿠오카 술로!”였다. 애향심에 호소하기는 우리나 그네들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지역 농산물로 빚은 술은 지역특산품일 테니 영 어긋난 상술은 아닌 셈이다.
술 축제 행사장에 마련된 시음코너. 술 이름을 지목하면 자원봉사하는 공무원들이 그 술을 따라준다.
축제의 첫발은 신사(神社)에서 내딛는다. 예전 우리의 성황당처럼 일본의 오래된 동네에는 어김없이 신사가 있다. 경사가 가파른 지붕의 목조건물, 사자갈기를 하고 있는 ‘코마이누(고구려의 개라는 뜻)’가 지키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이 흡수되거나 사라졌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천황 제도를 고수하고 있듯, 옛것을 쉽게 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용광로처럼 녹여낸다. 백제인 수수거리를 포함해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많은 문물이 전해졌지만 일본은 자신의 용광로 속에서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일본의 주신 ‘마츠오’와 ‘미와’
이곳 신사에 모신 주신(酒神)은 후쿠오카에서 만난 마츠오였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주신으로 마츠오(松尾)와 미와(三輪)가 있다. 마츠오의 총 본산은 교토의 마츠오대사(松尾大社)이고, 미와의 총 본산은 나라(奈良)의 대신신사(大神神社)다. 사이조의 마츠오 신사는 교토 신사의 말사(末社)인 셈이다. 일본 양조장에서 가장 많이 모시는 신이 마츠오다.
축제 행렬은 주신을 상징하는 삼나무 가지와 잎으로 만든 둥근 장식물을 가마에 싣고 양조장 앞길을 지나 사이조의 중앙로로 들어섰다. 축제 행사의 본 무대는 중앙공원. 행사 주최측은 이곳에 울타리를 치고 출입구를 만들어서 입장객을 받았다. 입장료 1000엔만 내면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다. 입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술잔이 하나씩 주어진다. 공원 안은 각종 술들로 넘쳐났고, 자원봉사하는 공무원들이 그 술을 따랐다.
인산인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입장하는 바람에 술을 마음대로 받아 마실 수 없었다. 술을 받으러 길게 줄을 서고, 다시 앉을 자리를 찾느라 고작 대여섯 잔밖에 맛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술 축제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이 부러웠다.
일본 대부분의 양조장에는 주신을 모신 신단이 있다. 카모이주미 양조장 한켠에 모셔진 신단.
일본에는 청주회사만 1500개 가량 있다. 그 청주회사들이 몰려 있어서 유명해진 술 동네가 여럿 있다. 10년 전에 큰 지진이 일어났던 고베(神戶)시 효코(兵庫)의 나다(灘)가 첫손에 꼽히고,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가 그 다음으로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니이가타(新潟縣)현, 아키타(秋田)현, 히로시마의 사이조가 어슷비슷하게 꼽힌다. 밀집해 있는 것으로 치자면 사이조가 그중 첫 번째다.
히로시마 사이조가 술 동네로 유명해진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물속에 칼슘과 마그네슘의 함량이 높으면 경수(硬水)이고, 낮으면 연수(軟水)로 분류하는데, 술 빚기에는 경수가 좋다. 효모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 있는 효모일수록 알코올을 잘 생성해낸다. 일본 최고의 술 동네로 꼽히는 효코현 나다의 물이 바로 경수다.
그런데 히로시마의 물은 대체로 연수다. 이 약점을 획기적으로 극복한, 연수 양조법을 개발해낸 이가 히로시마의 양조인인 미우라(三浦仙三郞·1847~ 1908)씨다. 이 연수 양조법으로 빚은 히로시마의 술은 향 좋고 맛이 풍부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5년 무렵에는 히로시마가 긴조주(吟釀酒) 바람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히로시마에서 개발한 긴조주는 양조용 쌀로 널리 알려진 야마다니시키(山田錦)를 35%로 도정하고, 향이 풍부한 구마모토(熊本) 효모를 사용해 만든 술로 맛이 진하고 향이 풍부하다.
일본에서는 양조용 쌀 품종을 별도로 개발해 빚는다. 값싼 수입쌀이나 상품화하기 어려운 침수미(浸水米) 또는 묵은쌀(古米)로는 술을 빚지 않는다. 밥 지어 먹는 쌀보다 더 비싼 쌀을 한번 더 깎아서 사용한다. 통상 30% 정도 깎아내는데, 쌀알 겉면의 단백질과 지방질이 술맛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히로시마 긴조주는 65%를 깎아내고 남은 35%의 쌀로만 술을 빚는다. 35%로 깎으면 쌀은 심백(心白·쌀의 가운데 반투명한 부분)만 남아 보석처럼 윤기가 난다.
사이조 술 축제의 거리 행렬.
사이조 양조장을 들여다보고, 사이조 양조장 골목길을 걸으면 이런 일본 술의 역사가 보인다. 그리고 사이조처럼 양조장들이 모여 있는 동네 풍경은 우리에게는 참 낯설다.
우리 정부는 지역을 쪼개서 양조장 면허를 내줬다. 소주회사는 서울과 부산, 그리고 도별로 하나씩, 막걸리 회사는 면 단위로 하나씩. 그래서 양조업자들은 경쟁하기보다 자기 울타리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욕심도 내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동네엔 다른 술이 못 들어오니까.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관행 속에서 술은 경쟁과 협력의 논리보다는 배타적인 독점의 논리에 익숙한 상품이 되어왔다.
술집이 모여 있어야 손님을 끌듯이, 양조장도 모여서 건강하게 경쟁해야 더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 나 혼자서만 하겠다고 나서면 갈 길이 멀다. 일본 청주가 세계 명주의 반열에 오른 것은 양조업자들이 수평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사이조의 술 축제도 양조장 사람들이 추동해 치러지는 행사다. 후쿠오카 술의 학교도 젊은 양조장 사람들이 진행하는 행사다.
술 축제는 물과 땅의 잔치
그에 반해 우리의 술 축제가 빈약한 것은 양조장 사람들이 함께할 여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어찌 술 만드는 장인들 없이 술 축제가 열릴 수 있단 말인가. 술에 심취한 장인들이 더 많이 생기고, 그 장인들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술 축제가 가능할 것이다.
술의 축제는 술의 이름을 빌린 주당들의 잔치가 아니다. 물론 축제의 장이 술의 전시장도 판매장도 아니다. 사람몰이 많이 하는 가수들에게 판을 내주는 자리도 아니다. 좋은 술을 지키려면, 좋은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을 지키려면 땅이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술의 잔치는 물의 잔치이고 땅의 잔치라야 한다. 그리고 술 속에 녹아든 이 땅의 쌀과 농산물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술의 축제가 성대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염원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