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이 종종 논란을 빚는 것도 기존 관념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거부감 때문이다. 새로운 사고나 혁신체제도 마찬가지다. 관성의 법칙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이를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혁은 혁명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정신과학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1980년대 초 소설 ‘단’의 출판을 계기로 무르익은 수련에 대한 신비함과 호기심이 어느새 ‘웰빙(참살이)’이란 사회문화 코드로 모습을 바꿔 자리잡고 있는 현상을 볼 때 앞으로 인간 관념의 변화는 시간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볼 때 국선도, 단월드, 마음수련원 등 수행단체를 만들어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신성을 끄집어낸 선지자들의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일반인이 수련을 하면서 수련의 끝이 어디일까 하는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몸의 변화와 신비한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우주란 무엇이며 창조와 소멸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늘 꿈틀댄다. 이른바 철학과 종교의 최종 단계인데, 이는 학문적인 호기심보다 존재론적 성찰에 따른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거나 수련을 완성한 경지에서 설명을 해준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찍이 예수와 부처가 그리 했지만 오래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므로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체험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문화가 자리잡은 오늘날, 체험을 유도하고 인간 내면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수행의 살아 있는 완성자를 탐구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사람을 자신을 검증하는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도인
불가에 ‘육통(六通)’이란 말이 있다. 천리 밖의 소리를 듣는 천이통(千耳通), 천리 밖을 보는 천안통(千眼通), 타인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 등 수행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의 능력을 일컫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알고 난 후 나타나는 최후의 깨달음 상태를 무불통지(無不通知)라 한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땅에는 숱한 기인이 다녀갔고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지만 단지 죽은 자의 소리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만일 현존하는 자 중에 무불통지의 경지에 이른 자가 있다면 그는 마땅히 도인으로 추앙받아야 하고 우리는 그에게 가르침을 청해야 할 것이다. 물론 천하의 대(大)사기꾼에게 속임을 당할 수도 있다. 현존하는 무불통지의 인간이 대(大)도인인지 아니면 대사기꾼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필자가 이 사람을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단전호흡을 강의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던 중 특이한 책을 발견했다. 이 책에는 ‘천지창조는 불완전의 완전 지향’ ‘인류의 첫 주기와 지구 최초의 전쟁’ ‘창조와 생명력의 원천인 에테르’ 등 흥미진진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행의 재미에 푹 빠져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던 터라 ‘고감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겠다 싶어 정독해보았다. 그리고 필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추천해 독후감을 받아보았다.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현존하는 사람 중에 이만큼 ‘구라’를 잘 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구라 대마왕’이다.”
“이거, 유(儒)·불(佛)·도(道)를 ‘짬뽕’해 공상의 세계를 펼쳐놓은 것이 아닐까. 그의 종교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래도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암이란 원치 않는 상상임신’이라든지, ‘꿈은 생각의 배설작용’이라든지, 아토피 치료라든가 가위눌림에 대한 해석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학생들뿐 아니라 10년 이상 수련을 해온 필자로서도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상상만 해온 터라 수련자의 자세와 학문적 호기심으로 그를 찾았다. 그리고 그를 직접 만나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