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의 ‘애마 예찬’

“할리 타고 세상 달리면 눈물이 솟는다”

  • 장세진 자유기고가 sec1984@hanmail.net

    입력2007-03-08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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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걸한 음성, 듬직한 체구, 강렬한 블랙 컬러…남성의 상징
    • 헬멧, 선글라스 쓰면 알아보기 어려워 유명인들 선호
    • 국내 할리 마니아 3500명…40대 전문직이 주류
    • “우리는 ‘경계’ 지키는 자유인”
    • 아산방조제 - 선운사, 치악산, 한계령 코스 인기
    • 2000만원대 넘는 바이크, 가죽옷, 액세서리…만만찮은 초기 투자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의 ‘애마 예찬’
    ‘아무나 해병대가 될 수 없기에 해병대가 되었다’는 자부심처럼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까다로운 2종 소형면허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통장에 고이 모셔둔 몇천만원을 눈 한번 질끈 감고 인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아내를 설득해야 하고, 무엇보다 달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여기에 자연과 사람을 사귈 준비는 기본.

    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침내 자신의 ‘애마’를 보유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세상을 얻는다. 그들은 돌아오는 주말에도 그들만의 세상을 향해 칼바람 맞으며 길 위로 나설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은 남성적이다. 걸걸한 음성(엔진소리)부터 육중한 몸체와 강렬한 블랙 컬러까지, 어느 하나 섬세한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조차 정교한 바이크는 아니라고 인정할 만큼 그 작동 메커니즘도 투박하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투박하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수많은 디자이너가 연구대상으로 벤치마킹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니 말이다. 다만 253.6∼370kg에 달하는 무게와 몸체가 너무 커 그 자체로 거대한 남근(男根)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할리데이비슨은 그렇다 치고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가. 기다란 부츠, 이런저런 엠블렘 장식을 꿰매붙인 가죽 재킷과 가죽 팬츠, 짙은색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패션은 터프하다 못해 불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잘 봐줘야 ‘양아치 사촌’쯤이다. 그런데 귀밑머리가 허옇거나 반질거리는 앞이마 평수가 넓은 중년남자들의 표정은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상기돼 있다.

    이런 표정은 대개 열정적인 연애에 빠진 남자에게서 발견되는 것이다. 도대체 할리데이비슨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메마른 고목 껍질 같은 중년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뒤흔들고 애달게 할까.



    ‘마흔 즈음의 꿈’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같은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 서른셋에 요절한 천재가수 김광석에게 할리데이비슨은 ‘꿈’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듯 세상을 떠난 해에 가진 콘서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 꿈 중 하나는요, 마흔 살쯤 됐을 때 오토바이 한 대 사서 세계일주하는 거예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요. 다리가 닿겠냐고 주위에선 걱정들을 하세요. 불안해서 충무로 매장에 가서 앉아봤어요. 그랬더니 다리는 닿아요. 팔도 닿고요. 근데 진짜 문제는 몸무게더군요. 몸무게가 오토바이를 이겨야 한다는 거예요.”

    김광석은 하고많은 모터사이클 중에 왜 굳이 할리데이비슨을 지목했을까. 그의 방백처럼 가냘픈 체구의 김광석이 감당하기에 할리데이비슨은 너무 육중한데 말이다. 누군가가 타는 것을 보고 매료됐든지, 음악인이라 거칠 것 없는 엔진 굉음을 사랑했든지, 그도 아니면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가 열연한 영화 ‘이지라이더’(1969년)를 보고 젊음과 자유분방함에 동경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추측건대 마지막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약을 팔며 미 대륙을 횡단하던 두 젊은 히피의 목적 없는 방황,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구를 보며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영화 ‘이지라이더’의 히트는 주인공들이 탄 할리데이비슨을 자유, 일탈, 젊음의 방황을 풀어줄 통로로 치환했다.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도 한몫했다.

    그러고보면 ‘터미네이터2’에서 아놀츠 슈워제네거가 타던 날렵한 할리데이비슨도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터미네이터’에서 할리데이비슨은 도망자와 추격자의 도구였다. 그 라이더는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들이다. 여기서 할리데이비슨은 현대문명의 맹렬한 공습을 연상케 하는 상징이었다.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이미지를 간추려보면 후하게 평해도 그리 긍정적인 것이 못 된다. 그런데도 할리데이비슨에 열광하는 마니아는 날로 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인이 갖고 있는 할리데이비슨 이미지는 왜곡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그 매력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든 편견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간추린 이미지에서 먼저 편견의 실체를 알아보자. ‘반항을 숙명처럼 잉태한 젊은이의 것’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일탈과 방황의 상징’ ‘파괴적인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는 폭주의 도구’ 정도일 것이다.

    젊음, 일탈, 방황, 폭주?

    할리데이비슨은 과연 젊은이의 전유물일까. 할리데이비슨을 수입해 판매하는 (주)할리데이비슨코리아의 마케팅팀 김윤영 대리에게 어느 연령대가 주로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하는지 물어봤다.

    “지난해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한 분들의 평균 연령은 42세였어요. 올해는 이보다 연령이 낮아지겠지만 아무리 낮아져도 30대 후반대를 유지할 겁니다. 직업은 의사 변호사 카피라이터 등 전문직이 가장 많고, 사업을 하시는 분도 많아요. 연예인도 더러 있고요.”

    할리데이비슨은 출력이 최저 883cc에서 1690cc에 이르는 헤비급 모터사이클이다. 가격은 배기량이 가장 적은 스포스터883 모델이 1100만원으로 가장 싸고, 최고급형인 울트라 클래식 일렉트라 글라이드(1690cc)는 3500만원대에 달한다. 한국 고객들은 대개 과시욕구가 강해 대형을 선호한다. 가격만 보더라도 젊은 사람이 즐기기에는 부담스럽다. 레저 비용으로 3000만원을 선뜻 쓸 수 있는 젊은 층이 얼마나 되겠는가.

    두 번째 편견인 일탈과 방황은 고객 평균연령에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이들이 방황이나 일탈을 꿈꾸며 할리데이비슨을 사지는 않을 테니까. 한때 퇴계로5가를 중심으로 모터사이클 문화가 생기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의 이미지가 곡해됐다. 장발, 찢어진 청바지, 심지어 대마초까지 즐기며 분출하는 젊음을 과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광고회사를 경영하는 할리데이비슨 2년차 이근상(44·K·S파트너스 대표)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자유이지 일탈이 아닙니다. 그 자유란 일상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이며,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배려가 있는 자유입니다. 한때 잘못된 문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은 경계를 지키는 자유인들입니다.”

    굉음을 내며 도시를 질주하는 모터사이클, 차와 차 사이를 곡예주행하는 일단의 무리, 스피드 경쟁을 벌이는 레이스에서 연상되는 것은 폭주족이다. 그렇다 보니 할리데이비슨과 폭주족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할리데이비슨은 스피드를 즐기기에 적합한 바이크가 아니다. 강렬한 소리와 진동을 느끼는 쪽으로 발달한 바이크다. 최고시속이 20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낮고 푹신한 시트에 퍼져 앉은 채 시속 80km 안팎의 속도로 주행하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맛으로 타는 바이크다. 상체를 꼿꼿이 세운 라이딩 포지션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빨리 달리려고 하면 바람의 거센 저항을 받는다. 게다가 차체까지 커 속도에 비례해 바람의 저항은 곱절로 강해진다. 폭주와 할리데이비슨은 이웃한 이미지가 되기 어려워 보인다.

    할리를 타는 사람들

    할리데이비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라이더가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이다. 그는 특별 주문한 할리데이비슨을 갖고 있다. 자동차와 바이크 수집광이기도 한 정 부회장은 일반인이 참여하는 동호회 활동을 하진 않지만, 재계 인사들끼리 어울려 할리데이비슨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멤버 가운데는 모 재벌그룹의 회장도 포함돼 있다는 전언이다. 할리데이비슨이라는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기업가의 이미지가 상충되고, 안전 문제 때문에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재계 인사가 할리데이비슨을 즐긴다는 것.

    연예계에서는 배우 최민수씨가 대표적인 할리족(族)이다. 얼마 전 드라마 소품으로 쓰기 위해 스포츠카를 구입도 한 배우 박상민도 열렬한 할리 애호가로, 2005년 2종 소형면허를 취득한 뒤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있다. 그룹 캔의 배기성과 이종원, 그룹 신화의 김동완, 아나운서 윤인구, 스케이트 선수 김동성, 영화배우 이성재도 할리족이다.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의 ‘애마 예찬’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말을 이용해 함께 바이크 여행을 한다는 것. 이들은 미국 대륙 횡단 투어도 서슴지 않는다.(왼쪽 위) 2006년 미국 대륙 횡단을 한 한국 H.O.G 동호회 회원들.(왼쪽 아래) 할리데이비슨 마니아인 탤런트 김성택.(오른쪽)

    아나운서 윤인구씨는 일요일 아침마다 연예계와 광고계 사람들이 결성한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크롬 윙스’ 회원들과 투어를 즐긴다. 지금은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팔고 잠시 할리족 대열에서 이탈한 탤런트 김성택도 한때 ‘크롬 윙스’에서 활동했다. 김성택이 소유했던 모델은 할리데이비슨 100주년을 맞아 특별 제작한 팻보이 2003년형. 가격은 2800만원이다. 김성택은 세계적인 연대를 가진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H.O.G (Harley Owners Group,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소유하고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 행사인 미국 대륙횡단 투어에도 참여한 바 있다.

    이렇게 동호회 활동을 하는 연예인도 있지만 ‘나홀로’ 즐기거나 동료 연예인들끼리 어울려 투어를 나가는 이들도 있다. 헬멧에다 선글라스나 고글을 착용하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기 레저로 떠오르고 있다. 여자 연예인 중에는 팔등신 미녀가수 김현정이 한때 할리데이비슨을 탔다.

    성악가 김동규(42)씨도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꿈의 대화’로 대상을 차지한 가수 출신 신경정신과 의사 이범용(48)씨도 할리족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서 오는 중압감을 이기기 위해 할리족에 입문한 이씨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면서 삶의 활력을 얻었다고 한다. 그도 일반적인 할리족처럼 40대 이후에 모터사이클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는 “40대가 모터사이클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나이”라고 했다.

    가수이자 DJ에다 연기 영역에서까지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는 산울림의 김창완(53)씨도 소문난 할리족이다. 한때 산악자전거에 심취해 방배동 자택과 방송국을 자전거로 오가던 그가 요즘은 소프테일 스프링거 클래식 모델(3000만원대)의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여의도를 오간다. 라디오 생방송 도중에 모터사이클 얘기를 늘어놓기도 한다.

    할리맨들의 형제의식

    할리데이비슨은 해가 다르게 더 많은 할리족을 끌어모으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할리데이비슨을 즐기는 할리족은 3500명 정도. 갈수록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어 할리족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할리데이비슨 매장에서 팔려 나가는 바이크도 교체하는 사람보다 신규 구입 고객이 두 배 정도 더 많다고 한다. 노인까지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일본에서는 할리데이비슨이 매해 1만대씩 팔린다.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하면 자동으로 가입되는 H.O.G(Harley Owners Group) 멤버는 전세계적으로 1400개 지부(Chapter)에 걸쳐 130만명 정도다. H.O.G는 단순한 모터사이클 동호회라기보다는 할리데이비슨을 매개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공통된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다. 한국에선 1999년 처음 코리아챕터가 결성됐고, 8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H.O.G가 처음 결성된 것은 1983년. 할리데이비슨 본사가 경영악화로 도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다. 할리 마니아들은 자발적인 모임을 갖고 ‘할리데이비슨 구하기’에 나섰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알리고 구매운동을 전개했고, 1984년에는 처음으로 H.O.G 랠리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미국민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며 할리데이비슨 회생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 랠리를 계기로 할리데이비슨의 인기가 되살아났고, 판매도 활발해지면서 파산 위기를 벗어났다.

    전세계 H.O.G인들은 해마다 미국 밀워키에 모여 랠리를 펼친다. 이슬람교도들이 메카 순례를 평생의 의무로 여기듯 할리족이 밀워키에 가는 것은 성지로 떠나는 일이 됐다. 1988년 할리데이비슨 창립 85주년 홈커밍 행사에 6만명의 라이더가 참가한 것을 필두로 1993년 90주년 행사에는 10만명, 95주년이던 1988년에는 14만명의 라이더가 밀워키를 찾았다. 창립 100주년이던 2003년에는 세계 10대 도시 투어랠리를 열고, 밀워키에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H.O.G 코리아챕터의 안민성(53·부영판지 부사장) 이사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의 유대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형제 같아요. 국내에서 투어를 다닐 때 다른 그룹을 만나도 반갑게 수인사를 나누죠. 외국 투어를 나갈 때도 할리를 탄 사람을 보면 서로 다가가 포옹하고 인사하고 한참씩 수다를 떱니다. 할리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 같은 것이 흐릅니다. 다른 브랜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정서죠.”

    ‘최대 장벽’은 아내의 반대

    국내에서 활동하는 할리데이비슨 동호회는 수백개에 이른다. 그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GGR(Good Guys · Riders, cafe.daum.net/goodguyriders) 동호인들을 만났다.

    “매주 투어를 하는 회원이 많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주중에 번개 투어를 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은 한 달에 두 번 이상 투어에 참가해요. 주말 투어는 그때그때 다른 장소를 선택합니다. 가깝게는 강화도나 유명산 퇴촌 코스 등 서울 근교에서 설악산까지 다양해요. 미국 서부 4개주 투어, 제주도 투어, 남해 등 특별 투어 이벤트도 매년 기획하고 있습니다.”

    H.O.G 코리아챕터 이사이기도 한 GGR 안민성 부회장의 말이다. 1999년 (주)할리데이비슨코리아가 창립되기 이전부터 퇴계로5가의 모터사이클 거리에서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해 타고 다닌 올드 마니아인 그는 국내에서 좋다 하는 코스는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는 지난해 가을 박투어(1박2일)로 다녀온 선운사 코스를 추천했다.

    “과천, 안양, 군포를 거쳐 39번 국도를 타고 아산만방조제를 건널 때는 바람과 한바탕 힘겨루기를 합니다. 이후 아산 23번 고속화도로를 타고 공주, 온산, 익산, 김제, 부안까지 시원하게 뻗은 길을 달리다보면 가슴속의 응어리 한 톨까지 다 사라집니다. 선운사에 도착해 여장을 풀면 산장회관의 풍천장어와 잘 익은 복분자주가 먼길을 달려온 라이더들을 기다리고 있죠.”

    당일치기로는 치악산 코스나 설악산 한계령을 넘는 코스도 추천할 만하다고 한다. 두 곳 모두 구리, 덕소, 두물머리, 양평으로 이어지는 서울 근교 라이딩의 백미 코스를 포함하고 있어 투어의 묘미가 이만저만하지 않다는 것.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니만큼 매주 사랑하는 애마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누구와 타느냐도 중요하다. 동호회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모임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그래서인지 GGR의 입회 기준도 까다롭다.

    “최소한 네 번 이상 함께 투어를 다녀야 하고, 입회를 요청할 경우 운영진이 먼저 회의를 거쳐 입회투표 여부를 결정한 뒤 온라인 투표를 실시하는데, 회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입회가 허락됩니다.”

    로드킹 클래식을 타며 GGR의 로드캡틴(투어 때 선두에서 행렬을 인도하는 리더)을 맡고 있는 정허헌(45·주식회사 인산 대표이사)씨는 회원들의 성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족을 맞아들일 때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씨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모터사이클 키드’였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며 모터사이클을 더 이상 타지 않다가 4년 전인 2003년에야 다시 바이크에 올랐다. 당시 아내의 반대가 여간 강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비 할리족들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높은 장벽은 아내의 반대다.

    “처음 석 달은 할리를 산 사실을 숨겼습니다. 아내 몰래 회사 주차장에 가져다놓고 주말마다 투어를 나갔죠. ‘주말에 무슨 일이 그렇게 많냐’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아내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어요. 비 오는 주말에는 회사 지하주차장에서 세차를 하며 어루만지기라도 해야 라이딩에 대한 욕구를 풀 수 있었습니다.”

    할리데이비슨 100년

    ‘미국적 성공 스타일’의 전형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의 ‘애마 예찬’
    나이는 올해 105세. 현존하는 모터사이클 중 가장 오래됐다.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할리데이비슨은 모터사이클 제작자인 윌리엄 할리(William Harley)와 아서 데이비슨(Arther Davidson)의 성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대형 모터사이클의 원조인 할리데이비슨은 미국의 상징적 상표로 입지를 굳혔는데, 처음 제작 당시(1903년)에 만들어진 것은 단 3대에 불과했다. 그리고 100여 년이 흐른 2005년 할리데이비슨의 매출액은 53억4200만달러(약 5조원)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한때 날씬하고 소음 적고 성능 좋은 혼다, 야마하 등 일본 모터사이클에 밀려 도산 위기도 겪었지만, 2000년 이후 모터사이클 분야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자리잡았다. 1986년 주식시장에 상장된 할리데이비슨의 주가총액은 미국의 대표적 자동차 기업 GM의 그것을 앞질렀다.

    한국에 할리데이비슨이 처음 들어온 것은 6·25전쟁 때다. 당시 미군은 할리데이비슨을 군용 모터사이클로 채택하고 있었다. 이후 역대 대통령 취임식과 VIP 경호 때 경찰청과 헌병대에서 많이 사용됐다. 할리데이비슨은 1994년 특유의 배기음에 대한 특허출원을 했다. 2001년에는 마케팅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할리를 소유한 사람의 90% 이상은 또 다른 할리데이비슨 모델을 구입하고 싶어한다.

    할리데이비슨은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다.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한 외국의 마니아들이 꿈꾸는 것이 미국 대륙 횡단이라고 하니 브랜드가 가진 ‘미국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 가족이 모여 만든 작은 기업에서 출발해 인수합병, 파산 위기 등 갖가지 역경을 딛고 성장한 과정은 미국적 성공 스토리의 전형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데 한몫한다.

    1994년 고든 비튼이 컨티넨탈항공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하던 해 이 회사는 2억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며 도산 직전에 있었다. 비튼은 경영에 참여하면서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았고, 회사는 놀랄 만한 경영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직원들과 경영진의 관계계선을 위해 힘쓰면서 고객 서비스도 개선되어 매출과 수익증가로 이어졌다. 그 결과 취임 이듬해인 1995년엔 2억200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회사를 살리고 놀라운 변화를 이끈 비튼 회장에게 감동한 직원들은 돈을 모아 감사의 선물을 전한다. 그 선물이 바로 2만2000달러짜리 할리데이비슨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을 받은 비튼 회장은 1996년에는 5억5600만달러의 흑자로 직원들에게 화답했다.

    미국에서 최고의 선물로 선택할 만큼 할리데이비슨의 브랜드 인지도는 높다. 미국인에게도 할리데이비슨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고가의 상품이면서, 언젠가는 꼭 갖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다.


    다행히 아내들의 반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할리데이비슨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할리데이비슨을 타면서 활기가 넘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변한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지지자로 돌아서기도 한다. 다음은 안민성 부회장의 말이다.

    “할리는 가족문화로도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기를 쓰고 반대하던 아내들이 남편의 바이크에 동승해 투어를 나가보면 얼마나 안전한지를 알게 된다. 달리는 할리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아내도 있다. 그만큼 라이딩이 편안하다는 얘기다. 1년에 몇 번씩은 가족동반 특별투어를 가기 때문에 가족끼리 더 친해진다.”

    당구를 처음 배운 사람들은 불을 끄고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그 안에서 상상의 게임을 펼치느라 잠을 설치곤 한다. 할리데이비슨에 중독되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둥근 것은 무엇이든 할리데이비슨의 바퀴로만 보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주말은 멀기만 하고, 친구모임이나 동창회에 발길이 뜸해진다. 2년차 이근상씨는 할리 중독 초기 단계다.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하고 심장박동 소리 같기도 한 사운드에 먼저 매혹됐습니다. 1단에서 5단까지 서로 다른 엔진음을 내는 할리는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죠. 새로운 아이디어를 뽑아내야 하는 광고쟁이인 내게 할리는 훌륭한 동반자입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가 아니라 잡념을 깨끗이 사라지게 할 정도로 내 안의 낡은 것들을 청소해주거든요. 할리를 타고 길 위에 서면 다른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골프나 등산도 좋다지만 할리데이비슨에 비할 바가 아니에요. 또한 자연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을 통해 인생을 배웁니다.

    지난해 제주도 투어에 갔을 때는 자동차로 몇 번 갔던 길인데도 전혀 다른 감흥이 밀려왔습니다. 나의 할리가 숨가쁜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1100도로의 나무터널을 지나쳐 갈 때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질러댔어요. 10여 대의 할리가 목청을 한껏 돋아 퉁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내가 지르는 소리는 명료하게 내 고막을 파고들었어요.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매력

    할리 라이더들은 다들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정허헌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2005년 미국 서부 4개 주 투어 때 원래는 그랜드캐니언을 지나 갭이라는 지역에 숙박할 계획이었지만, 숙박시설이 전혀 없어 50마일쯤 떨어진 페이지라는 마을로 이동해야 했어요.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인 대평원을 지나는데 석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대평원의 언덕 하나를 넘자 협곡이 나타났죠. 협곡의 바위가 스러지는 태양 빛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인적도 없고 모든 소리가 사라진 가운데 7대의 할리 소리만 들려오는 대자연 속. 그때 나는 대자연의 일부였습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어요.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까닭 모를 눈물’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죠.”

    할리를 타는 라이더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상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할리교의 신도가 된 것이다. 그것은 천국을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의 신념과는 다르다. 그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 광신도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미국 히피문화의 소품으로 취급된 나머지 할리의 이미지는 왜곡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할리를 즐기는 사람들은 할리 문화의 장점을 알리고 많은 사람을 그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애쓰고 있다. 잠깐 동안 ‘길 위의 인생’에서 누리는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할리족들은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지킨다. 안민성 부회장의 말이다.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요란한 복장, 제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즐기는 사람도 있죠. 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사이렌에다 경광등을 단 할리도 심심치 않게 보죠. 할리는 여가시간에 타는 것인데, 왜 그런 비상상황에나 쓰일 액세서리를 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진정한 할리족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공공의 선을 지키며 라이딩을 즐깁니다. 할리 문화는 결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할리에는 금도가 있다

    GGR은 수없이 투어를 나갔지만 다른 차량과 시비가 붙은 적이 없다. 간혹 강짜를 부리는 이들이 있지만 조용히 지나치면 그뿐이다. 할리 라이더들이 대부분 자제력이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연령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GGR의 이부영 회장은 올해 61세이고, 최연소 회원은 올해 만 30세로 세대간 스펙트럼이 넓다.

    “모터사이클은 마흔 넘어서 탔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바이크를 타던 때를 생각하면 너무 위험했어요. 40대는 돼야 자기를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리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를 경험으로 아는 세대니까. 또한 가능하면 동호회 중심으로 즐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독립군(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고 홀로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을 하면 바이크를 오래 못 타요. 혼자 다니면 일단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쉽게 싫증을 내게 되죠.”

    정허헌씨는 동호회 중심의 할리문화를 강조했다. 같이 다니다보면 말로 다 옮기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생기고 그것은 그들만의 소중한 추억이 된다. 다음은 안민성 부회장의 체험담.

    “몇 차례 미국 대륙 횡단 기회가 있었는데, 할리에 태극기를 달고 달릴 때 어느 때보다 행복했습니다. 미국 투어에서 만난 교포들의 따뜻한 환대, 인디언 소녀의 해맑은 눈동자, 시골 소읍에서 할리가 고장나 쩔쩔매고 있을 때 슈퍼맨처럼 나타나 도움을 준 친절한 경찰관, 그랜드캐니언에서 관광 온 교포들을 만나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던 일, 모두 가죽재킷을 챙겨 입고 달리는 쌀쌀한 날씨에 앞서 달리는 일행이 도무지 서지를 않아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온몸이 꽁꽁 얼었던 일 등이 떠오릅니다.”

    할리 라이더는 중년 이후에 추억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추억 만들기’의 대가는 그리 만만치 않다. 2000만∼3000만원대의 바이크도 사야 하고, 비싼 가죽옷, 이것저것 욕심나는 액세서리도 갖춰야 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할리 그룹에 들기 어렵다. 그래서 할리는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에게선 특권의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설사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이에게 할리의 문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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