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론 쪽 신하들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중에 노론의 영수 김종수는 “화성 성역은 진나라의 축성(築城)이나 한나라의 매관매직과 다를 바 없다”(20/7/2)고 비난했다. 서울 시전상인들의 독과점 폐해를 막기 위해 내린 시장 직거래[通共] 조치에 대해 그들은 “시장 질서를 혼란시킨다”며 반대했다(15/2/12).
입으로만 개혁을 떠들었단 말인가
이런 비난과 반대는 올 들어 더욱 심해졌다. 새해 첫날 나는 국가의 큰 경사인 왕세자 책봉식을 맞아 정치범을 사면했다(24/2/3). 그러자 대사헌 서매수는 자기들을 “그렇게까지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느냐”고 대들었다(24/2/5). 국왕의 “일시동인(一視同仁)”도 좋지만 아직 형량이 많이 남아 있는 중죄인까지 모두 사면하면 그동안 사헌부가 기울인 노력은 뭐가 되느냐는 항의였다.
그가 말하는 중죄인이란 이승훈을 겨냥한 것이리라. 정약용의 매부이자 이가환의 외조카인 이승훈의 석방은 곧 남인의 정계복귀를 뜻하는 신호탄이라 본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대부 가문 중에서 어둠에 묻혀 버려진 사람도 없고, 애매하게 폐쇄된 가문[廢族]도 없게 할 것이다.”(24/2/5) 나는 그에게 이번 사면이 ‘대화합’을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다시 말해주었다.
이에 대해 좌의정 심환지는 “전하께서 애당초 신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게다가 일국의 공론까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대뜸 사면 명령을 반포하셨으니, 이는 결국 파괴를 가져올 것”(24/2/8)이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국왕의 고유한 권한 행사인 사면조차 저들은 ‘무시’와 ‘파괴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서운한 것은 바로 나의 측근세력인 이른바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다. 사면조치를 반대하고 나선 서매수도 그렇거니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자결한 정동준은 일찍이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도 나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화성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며 신도시 건설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다녔다. “건설 공사비를 횡령한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해 그나마 나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19/1 /11).
사도세자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같은 노론의 김종수와 대립각을 세워 ‘시파’인 양 행동했던 이병모는 나의 수원행차를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21/8/7), 나를 가리켜 “한·당시대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다”(18/5/25)고 폄훼하기까지 했다. 아! 그들은 입으로는 “개혁이야말로 시대적(‘時’) 과제”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실제로는 시류(‘時’)를 따라 움직이는 한낱 정치적 부초(浮草)에 불과했던 것인가.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남인 쪽 신하들이다. 나의 정치 이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 따라주었던 그들이 지금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다. 생각해보면,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한 것이(19/7/25) 잘못이었다. 당시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노론과 소론의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잠시 도성을 떠나 있으라 명했다. 충주목사(이가환)로, 그리고 금정찰방(정약용)의 직위에서 충청도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으면 자연스레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가환과 정약용을 동시에 내려 보낸 것이 큰 실수였다.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뛰어난 지식과 고급 정보를 가지고 채제공을 좌우에서 보좌하던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안 돼 채제공은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금년이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가버렸다(2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