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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몰두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등한시했도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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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왕비가문 사수’ 의지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정조의 화성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능행도).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이후 남인의 재등용은 결사적으로 저지됐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1월에 채제공이 죽자(23/1/18) 남인은 더욱 더 소외됐다. 내가 정승의 천거 없이 이가환 등을 등용하려고 하면 노론과 소론은, 이번 이승훈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제히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와 그 시도를 좌절시켜버리곤 했다. 남인의 소외는 곧 나의 고립을 의미했다.

내가 지난해 세밑에 왕세자의 책봉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움쭉달싹도 않는 정국을 돌파할 계기가 필요했다. 7년 전부터 노론 신하들은 왕세자 책봉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정국이 바뀌기 전에, 국가 중대사의 결정권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을 때 국가혼례[國婚]를 치르겠다는 심사였다. 하지만 나는 원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곤 했다(17/11/19).

더욱 정확히 말하면 100여 년간 노론의 최우선 전략이 돼온 ‘왕비가문 사수(死守)’ 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남인의 세상이 됐고, 장희빈의 아들(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당시는 서인)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노론의 핵심인물 네 사람이 죽어 나가기까지 했다(‘신임사화’). 이후 노론은 ‘국혼의 절대 고수[勿失國婚]’를 당론의 제일원칙으로 삼았다. 왕비가문을 놓치는 것은 작게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맡게 돼 있는 국왕 경호업무 및 그와 관련된 핵심 정보원을 잃는 것이요, 크게는 정권 재창출의 기회(왕자 출생)를 놓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노론은 숙종 29년(1703년)에 연잉군(나중의 영조)의 배필로 군수 서종제의 딸을 고를 때나, 나의 생부 사도세자의 빈으로 홍봉한의 따님을 고를 때, 그리고 지금의 왕비인 김시묵의 여식을 간택할 때도 치밀한 준비와 철저한 대응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요즘 온 나라의 관심은 두 가지에 쏠려 있다. 그 하나는 누가 왕세자의 스승이 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딸이 세자빈이 되느냐다. 이 두 가지는 워낙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에 아마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또는 적어도 노론 내부에 초래될 분열이 그것이다. 그러면 그 틈에 남인의 재기와 같은 정국의 변동 내지 나의 고립 탈피가 가능하지 않을까.

실망스럽게도 나의 이런 기대는 어긋났다. 우선 세자시강원 구성에서 노론과 소론은 예상외로 공동전선전략을 폈다. 최고책임자는 노론이 맡고, 실질교육자는 노론과 소론의 신하들이 교묘히 배분하는 형식이었다. 세자의 사(師)와 부(傅)는 노론의 이병모와 심환지가,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제조는 소론의 홍양호와 이만수가 맡았다. 남인은 철저하게 배제됐다(24/1/1). 도무지 노론과 소론의 강고한 연대를 뚫고 들어갈 길이 없다. 결국 나의 탕평책은 이렇게 무력화되고 마는 것인가.

간택이 아닌 중매로

이제 세자빈 간택밖에는 길이 없다. 오직 하나의 가문만이 채택되는 국혼에서는 배분의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11세에서 13세 이르는 처녀들을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렸다(24/1/2). 그리고 관례에 따라 왕세자는 이홍(李)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24/1/25). 나이 어린 “원자아기”가 드디어 제 이름을 가진 왕세자가 된 것이다. 모두들 나라의 큰 경사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기뻐할 일인가. 겨우 11세의 나이에 성인이 된다는 것은, 더군다나 세자라는 정치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을 떠맡는 일인가. 내 아들에게만은 그 역경을 조금이나마 늦게 겪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고, 다만 그의 곁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돼줄 누군가를 잘 선택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 누군가는 세자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노론의 신하들은 이 과정에 만족한 듯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24/1/25)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기뻐하는 틈을 타 이번 국혼은 ‘간택’이 아닌 ‘중매’ 방식을 택하겠다고 기습적으로 선언했다. 후보자 물색과정에서부터 내 의중이 반영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꾼 것이다. “관례”에 따라 간택으로 세자빈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규수를 간택하는 것은 본디 좋은 제도가 아니다. 우리나라 선정(先正) 중에서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라고 해 내 뜻을 관철했다(24/1/2).

이렇게 되자 도성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임금께서 마음을 정해둔 곳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나는 정민시, 서매수, 이만수를 불렀다(24/1/3). 시파인 정민시와 이만수 외에 요즘 내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한성판윤 서매수를 부른 것은 까닭이 있었다. 그는 세자빈 선발을 위한 유관기관의 장(長)일 뿐만 아니라(한성판윤), 비판세력에 내 의도를 그때그때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서매수는 이후 1월26일에 대사헌으로 전보됨). “바깥 사람들은 내가 정한 사대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지만, 나는 실상 어느 집에 처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하늘이 정하는 일이지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 ‘왕의 의중’을 함부로 넘보거나 경솔히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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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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