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10월 영국에서 열린 EU 25개국 비공개 정상회담.
‘유럽 동맥경화증’의 시대
1970년대 유럽 경제통합의 최대 걸림돌은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서유럽을 강타한 석유파동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정도를 무역에 의존하던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은 유가 급등으로 수출경쟁력이 하락했고 많은 실업자를 떠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회원국들은 범유럽 차원에서 실업률 감소와 경제성장 회복을 공동으로 대처하기보다 개별 회원국 차원에서 해결했다. 이미 무너진 관세장벽 대신 각종 비관세장벽을 높게 쌓음으로써 시민의 자유왕래와 자본, 노동의 자유이동을 막았다.
이때부터 유럽통합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은 바라볼 수 없게 됐고, 회원국들의 경제성장률은 일본이나 미국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유럽통합사에서 ‘유럽 동맥경화증(Eurosclerosis)’이라고 부르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러나 이런 정체시기에도 일부 성과는 있었다. 유럽정치협력(EPC·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과 유럽통화체제(EMS·European Monetary System)라는 협력체제가 구축된 것. 유럽정치협력은 경제 동맥경화시대의 서막이 오른 1970년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회원국들은 주요 국제 문제에 있어 협력을 강화하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를 위해 회원국 외무부 정책국장들이 정기적으로 만났고 외무부 장관들도 수시로 얼굴을 마주했다. 각국 외무부 사이의 의견조정을 위한 비밀 팩스도 설치됐다.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유럽경제공동체 9개국(1973년 1월1일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가 회원국이 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해결원칙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의 생존권과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동시에 인정하자는 안이었다. 이 안은 유럽정치협력의 공동의견으로 채택됐다. 당시 9개 회원국은 공동의견에 합의하기까지 수십차례 논의를 하는 등 심한 진통을 겪었다.
유럽통화체제는 1979년에 시작됐다. 회원국 경제력을 기준으로 통화 바스켓을 정하고 회원국 화폐 가치의 안정을 위해 환율 변동폭을 상하 2.25%로 규정했다. 당시 독일이 경제 규모가 가장 컸고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안정돼 있었기에 독일 마르크화가 기축통화 노릇을 했다. 환율 변동폭이 정해져 있어 회원국 내 기업들은 상거래를 할 때 환차손(換差損)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회원국들은 관세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관세정책에 대한 모든 결정권한을 집행위원회에 넘겼으며, 이 덕분에 집행위원회는 통상정책에 있어 배타적인 정책·입법 제안권을 지니고 유럽경제공동체를 대표해 통상 문제를 협상하고 조약 체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EPC와 EMS의 행정부 격인 유럽경제공동체 집행위원회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회원국들은 외교정책이나 통화정책의 권한은 집행위원회에 이양하지 않았다. 그저 상호조정과 협조를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국경 없는 단일시장
유럽 동맥경화증을 극복하기 위한 회원국 간의 정책수렴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우선 1979~1984년 유럽공동체를 거의 마비시켰던 영국 예산 문제가 이때 해결됐다.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당시 9개 회원국 가운데 7위의 경제규모를 가졌던 영국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회원국이 유럽공동체 예산에 너무나 많은 돈을 납부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자체 예산(own resources)’이라고 하는 유럽공동체 예산은 비회원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농산물에 부과되는 관세가 주 수입원이었다. 영국은 공동체 비회원국인 영연방과의 교역, 특히 농산물 수입이 많아 유럽공동체 예산에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납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혜택은 적었다. 당시 유럽공동체 예산의 70%가 농민 지원에 사용됐는데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한 나라여서 지원할 농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런 문제를 시정해달라고 유럽경제공동체에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1984년 공동체 예산 명목으로 낸 비용의 3분의 2를 돌려받는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