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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한국 여배우 열전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남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치명적인 매력의 여걸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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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의 자리는 오랫동안 변방이었다. 남자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제작 환경에서 여배우는 주인공의 상대역만 거듭하다 대중의 눈요깃거리, 가십의 대상으로 소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50~60년대부터 달라졌다. 미모와 재능, 개성을 겸비한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영역을 확대했다.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여성에 대한 인식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를 연출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각본을 쓴 오승욱 감독이 한국 여성의 패러다임을 바꾼 여배우들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 첫 순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우였으며 동시에 떠들썩한 스캔들 메이커였던 여걸 김지미다. 연기·제작·영화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녀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눈부신 미모와 연기력, 당당한 매력으로 시대를 풍미한 배우 김지미.

1961년 새해 벽두. 알리와 포먼의 권투 대결만큼 세기의 대결은 아니지만, 구경꾼의 흥미가 동하는 사건이 생겼다. 두 편의 춘향전이 동시에 개봉한 것. 광복, 6·25전쟁, 4·19혁명이라는 격랑을 헤치며 지친 민중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가벼운 오락거리였다. ‘홍 코너’는 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조를 이룬 ‘성춘향’.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동양적인 미모와 섬세한 연기력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정취와 신여성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남성 관객에게 영원한 모성을 느끼게 해 준 광복 후 최초의 톱스타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감독인 신상옥은 데뷔하자마자 세련된 연출력으로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지적인 영화를 만들어내 평론가들의 상찬을 받았고, 자신의 프로덕션까지 갖춘 한국 영화계의 신성이었다. 이에 맞서는 ‘청 코너’는 김지미·홍성기 감독 조의 ‘춘향전’. 1958년, 데뷔 1년 만에 극장 안을 눈물바다로 만든,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과 장기 개봉 기록을 세운,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 ‘별아 내 가슴에’의 주연 배우 김지미와 ‘별아 내 가슴에’로 한국 최고의 흥행 감독이 된 홍성기 부부의 작품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한 해 전인 1960년 3월 춘향전의 영화화를 기획한 신상옥 감독은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화면과 총천연색 영화를 시도하기 위해 컬러 필름으로 테스트 촬영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흥행 감독 홍성기가 뒤늦게 춘향전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할 것을 기획하고 신상옥보다 먼저 영화제작자협회에 촬영신고를 내버린 것이다.

세기의 대결

지금도 그렇지만 같은 아이템과 같은 내용의 영화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서로 피한다. 도의상 문제도 있지만, 대결에서 실패하는 쪽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심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춘향’과 ‘춘향전’양측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먼저 기획을 했다는 신상옥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홍성기 측은 “무슨 말이냐 내가 먼저 시작했다”며 버텼다. 제작자협회장은 홍성기 편이었고, 회원들은 “홍성기 감독과 회장이 밀실에서 협약을 맺은 것 아니냐”며 회장을 규탄했다. 협회가 둘로 나뉘어 싸움을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촬영을 진행했고 남은 것은 관객의 심판뿐이었다.

먼저 승리한 듯 보인 것은 홍성기의 ‘춘향전’ 쪽이었다. 앞서 개봉한 것이다. 3일 뒤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은 같은 제목으로 상영불가하다는 판정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성춘향’이란 제목을 달아 개봉했다.



먼저 김지미·홍성기 조의 ‘춘향전’을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4대 3 화면비의 영화에 익숙하던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운동장처럼 넓은 화면의 시네마스코프에 울긋불긋한 총천연색 화면이 펼쳐진다. 단옷날 활쏘기에서 우승한 이 도령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방자와 사령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도 술을 먹으려다 술잔을 멈춘다. 저 멀리 누군가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도령이 홀린 듯 바라보는 그네 타는 처녀는 누구인가?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술잔을 마다하고 넋을 잃는가? 화면이 이 도령 시점으로 바뀌면, 아뿔싸. 저 멀리. 너무 멀어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다 그림자가 져서 시커멓기까지 한 물체, 그 누군가가 그네를 타고 있다. 이 도령이 반했다고 영화 속에서 감탄을 하는데 관객에게 보이는 건 시커먼 점 하나다. 이 도령과 관객 모두가 반해야 할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에서부터 홍성기·김지미 조는 관객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관객은 그래도 기다렸다. 홍성기·김지미 조가 춘향이 옥중 장면에서 극장 안을 홍수로 만들어줄 것을 굳게 믿으며.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1975년 영화 ‘육체의 약속’으로 제1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지미.

똑같은 이야기의 또 다른 영화 ‘성춘향’으로 가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방자 역의 허장강이 특유의 능글거리는 몸짓과 말투로 오작교를 걷는 향단이와 춘향이를 불러 세우고 농을 지껄인다. 방자의 농지거리를 향단이가 척척 받아낸다. 향단이는 천하의 도금봉이다. 어라, 허장강·도금봉의 능청이 눈길을 잡기 시작한다. 이 도령과 춘향이가 만나기도 전부터 영화가 재미있다. 게다가 춘향이는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시장 통의 점쟁이 앞에 앉아 “내가 누군지 맞혀보라”며 연애운을 본다. 이 한 장면에서 최은희는 자기 의지가 확고하고 세상풍파에 때 묻지 않은 발랄하고 자신감 있는 처녀라 선언하는데 여간 매력적이지 않다. 드디어 광한루. 홍성기의 ‘춘향전’과 똑같이 ‘성춘향’의 이 도령 김진규 역시 저 멀리 누군가를 홀린 듯이 바라본다. 광한루 난간에 기대어 넋을 잃어 혹시 난간에서 떨어질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그녀는 누구인가? 저 멀리 다홍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여자가 보인다. 신상옥은 이 도령의 시점에 망원경을 달아 관객에게 보여준다. 자태도 고운 최은희를 보고 이 도령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반하게 만든다. 방자 허장강이 춘향이의 신발을 빼앗아 오고 이 도령은 짐짓 점잖은 척 신발을 돌려준다는 구실로 춘향이에게 접근한다. 이 도령의 뻔한 수작을 다 아는 최은희.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무 뒤로 숨어 이 도령을 속 타게 만든다. 최은희는 생기발랄하고, 게다가 귀여운 교태까지 부린다. 하하, 이쯤이면 관객들은 신상옥·최은희 조의 ‘성춘향’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한다.

홍성기의 몰락

자, 다시 고개를 돌려 홍성기의 ‘춘향전’으로 가자. 춘향이 김지미가 그네를 타는 현장으로 달려온 방자. 이 도령의 미팅 신청을 향단이에게 전하며 수작을 부리는데, 그들 뒤 배경으로 김지미가 너무나 힘들게 그네를 탄다. 다홍치마를 공중에 훨훨 날리며 새파란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시원한 맛이 있어야 그네타기 아닌가? 김지미는 고작 3~4m를 힘들게 왔다갔다 할뿐이다. 그네 줄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고, 그네 끝에 매달아놓은 붉은 비단은 물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져 영화를 보는 나는 방자와 향단이의 능청스러운 수작에 집중을 못하고 김지미가 그네에서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춘향이 옥중 장탄식 장면도 역시 최은희의 완승. 김지미·홍성기 조는 ‘별아 내 가슴에’에서 선보여 당시 최고의 흥행카드가 되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어머니와 이모, 누나, 여동생들까지도 막장 드라마라 욕을 하면서도 끝끝내 TV 앞에서 본방사수를 하게 만드는 “내가 네 아비다” “아버지, 우리는 오누이 사이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나요?” 신공을 안타깝게도 춘향이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사용한다면 그것은 춘향전이 아니니, 오호통재라. 그들의 춘향전은 흥행에 참패하고, 대한민국 영화계를 뒤흔든 세기의 대결은 최은희·신상옥 조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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