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별로 살펴보면 런던 시장 1일 거래량이 전체 41%인 2조7630억 달러로 1위를 차지했으며, 2위는 뉴욕(1조2630억 달러)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3위는 싱가포르(3830억 달러), 4위는 도쿄(3740억 달러)였으며 홍콩과 스위스가 뒤를 이었다. 외환시장의 트레이딩은 대개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 도쿄→홍콩→싱가포르→스위스를 거쳐 런던→뉴욕으로 24시간 내내 진행된다. 런던에서 오전에는 아시아 및 중동 지역 거래 수요를, 오후에는 미국과 유럽을 커버하기 때문에 중개 기능의 완결성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런던 시장은 또 달러나 유로에 편중되지 않고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 개별 통화의 유동성도 강하다. 2000년대 들어 유로화 경제권의 본격화, 정보통신(IT) 기술 발달, 위안화 시장 확대 등의 여파로 인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뉴욕, 홍콩으로 금융시장의 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경제권이 G5, G7에 이어 G20으로 더 다각화하면서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걸쳐 전 방위적인 통치 및 외교 경험과 정보, 네트워크를 축적해온 런던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1986년부터 영국은행협회에서 매일 공시하는 리보(Libor · 런던은행 간 제공금리) 역시 2012년 은행 간 담합 이슈가 불거지며 위상이 꺾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으나, 대체재가 마땅치 않은 까닭에 여전히 수백조 달러 규모의 전 세계 파생상품 및 은행 간 대출금리를 결정해주는 기준금리 노릇을 하고 있다.
‘강대국의 자유’
한국도 이명박 정부 때 서울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나온 바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금융산업은 휴대전화나 자동차산업처럼 땀과 의지만 가지고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기 어려운 분야다. 글로벌 시장에서 어느 정도 ‘편하고 신뢰할 만한 시장’으로 체급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현재 세계 18위 수준인 원화의 통화 거래량, 남북한 대치 상태, 소통 언어, 이슈 등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영국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팍스 브리태니카(영국에 의한 평화 시대)’의 패권을 통해 무역과 금융에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규정이나 이론을 구축해온 선두주자였다. 일찍이 17세기 청교도혁명, 명예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배경을 마련한 뒤 18세기부터는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력을 급증시켜 국력을 키웠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상품 운송에 적합한 안전한 무역 거래의 장을 마련해준 것도 영국이다.
당시 영국은 ‘강대국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며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문명사회라고 판단한 국가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시장을 개척했고, 아시아와 같은 ‘전근대적’ 국가들에 대해서는 식민지 제국주의를 앞세우는 등 제 입맛에 맞는 공략법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適者) 생존’이라는, ‘강자로의 흡수 진화’ 논리를 뒷받침했고,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체제를 유지해준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유방임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식량 증산을 순탄하게 하려면 농지를 제공해주는 지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영국 위정자들의 통치철학을 견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으로 유명한 미시경제학, 정부의 ‘유효수요 창출’을 통해 불황을 타개하는 메커니즘을 소개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케인스의 거시경제학도 영국의 패권 시대와 함께 주목받은 경제이론이다.
중세부터 꽃피운 모직물산업에 이어, 18세기에는 인구 증가에 맞물려 병행된 농업혁명으로 각종 식 · 음료 제품의 증산이 이뤄졌다. 영국은 또 아메리카 대륙에 필요한 노동력을 아프리카에서 착취, 흑인노예 거래의 무대를 만들어주며 중개무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자본의 축적’도 생겨났다.
‘젠틀맨 자본주의’
모직물 제작 · 가공 등 경공업의 기술혁신을 골자로 한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영국은 자체 생산한 모직물을 수출해 점차 국부를 늘려갔다. 인구, 경지 면적, 생산량(GDP), 세수(稅收), 무역수지, 군사비의 계량화도 이 시기 영국을 기점으로 체계화했다. 19세기 후반 화학과 석유, 전기 등 중공업이 부상한 2차 산업혁명은 미국과 독일이 중심이 됐다. 토머스 에디슨의 백열전구(1880) 발명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영국은 이미 산업이 고도화하면서 2차산업(공업) 중심에서 은행업, 증권업, 보험업, 해운업 등 유관 3차 금융서비스업으로 진화해나갔다. 모두 지금껏 영국의 기간산업이라 할 수 있는 업종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왕족과 귀족에 이은 하급 귀족이자 중산층인 젠트리(Gentry), 혹은 젠틀맨(Gentleman) 계층이 활발히 부를 축적했다. 생산력 향상과 무역 노하우를 먼저 접한 계층이라 선험(先驗) 지식을 다른 나라에 적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젠틀맨들은 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가 ‘시티’를 시작으로, 미국과 독일 등 2차 산업혁명 선도 국가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세계의 공장이 바야흐로 ‘세계의 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젠틀맨 자본주의’라 하기도 하는데, 특히 유대인 자본으로 각광받은 젠틀맨 가문 ‘로스차일드’는 미국 월스트리트에 대한 선제적 투자로 명성을 얻는다. 그들의 막대한 자금력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더욱더 왕성해져 1920년대 미국 번영을 이끄는 마중물이 된 것과 동시에,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을 맞이하는 거품경제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환전상이었다. 유럽 각국의 귀족에게 융자를 해주며 수수료와 이자를 챙겼는데, 초대 창업주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자녀들을 런던, 파리, 나폴리, 빈 등의 지점 대표로 내보내 세계화를 꿈꿨다. 런던을 맡은 3남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세기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군의 패배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한 뒤 런던 금융시장에 역정보를 흘려 영국 채권 가격을 폭락시키고 낮은 가격에 매수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당시엔 구전(口傳) 말고는 효율적인 통신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인적 네트워크, 날씨에 관계없이 항해를 강행하는 선박 등을 적절히 활용해 정보전(情報戰)에서 승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DNA의 유산이 훗날 런던의 독보적 금융시장 구축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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