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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35주년 특별기고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광주항쟁 기록의 진실과 논란

  • 소준섭 | 국회도서관 조사관, 국제관계학 박사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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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주백서’ 베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 광주항쟁 기록들이 ‘북한 책’ 베꼈다고?
  • ● 극우파 공격받는 ‘찢어진 깃폭’ 원작자 따로 있다
  • ● 사실 기록한 이들을 ‘간첩’ ‘반역자’로 몰아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시민군이 계엄군에 진압된 뒤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오고 있다

2011년 ‘신동아’ 1월호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필자가 쓴 ‘광주백서’를 윤문하고 가필하고 베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 보도는 ‘광주백서’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문장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반부는 ‘광주백서’에 전적으로 기댔다. 골간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전개 순서, 디테일이 같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엔 ‘광주백서’ 출간 이후 수집한 내용도 섞여 들어가 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후반부에도 ‘광주백서’ 내용이 그대로 담겼으나 전체 내용의 일부일 뿐이다”(신동아 2011년 1월호)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동아의 ‘광주항쟁 기록’ 보도

신동아의 치밀한 분석 보도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를 떠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광주백서’를 토대로 해 씌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필자가 1981년 초에 쓰고 이듬해 전국에 배포한 ‘광주백서’는 1985년 전남대 복적생으로서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이재의 씨가 정상용 전 의원 등 광주 운동권의 요청으로 항쟁 기록을 정리할 때 “(‘광주백서’가) 여러 자료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된 기록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집필을 담당한 이재의 씨 증언).” 이재의 씨가 재구성한 그 기록은 광주백서와 글의 전반적인 틀과 구성이 거의 일치했고, 다만 시민군의 광주시내 장악 이후의 내용이 더욱 충실히 보강됐다. 신동아가 분석한 그대로다.



이렇게 정리된 기록은 이후 풀빛출판사에 넘겨졌고 대중적 명성이나 책의 상업성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황석영의 이름으로 출간하기로 결정됐으며 내용은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서문과 광주 문화운동 그룹의 활동 내용 등이 보강돼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제작됐다.

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나간채 교수도 그의 저서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중 ‘5·18 기록 출판운동’ 부분에서 ‘광주백서’부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했다.

필자는 1980년 서울 학원사태 배후조종자로 전국에 지명 수배돼 그해 겨울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1979년 학생시위 사건으로 성동구치소에서 복역할 때 알고 지내던 조봉훈 선배를 만나 함께 살았는데, 그는 광주에서 항쟁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필자가 집필을 담당해 조봉훈이 수집한 관련 자료를 정독했으며 많은 증언을 들었다. 신영일,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등 10여 명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필자에게 증언했다.

특히 항쟁의 발단이 된 전남대 정문 앞 계엄군과의 충돌은 당시 현장에 있던 박몽구 씨의 자세한 증언을 청취했고, 시민들의 무장 및 이후 중요 과정에 대한 집필 때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접촉해 증언을 들으려 노력했다.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너무 과장됐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최대한 배제했다. ‘최대한으로 확인된’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상황을 취재 보도한 동아일보 등 각 신문 기사도 정독해 참조했다. 당시 필자는 복막염을 앓는 등 몸이 쇠약한 상태였지만 막중한 임무임을 깨닫고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광주시내 곳곳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착검한 총을 든 공수부대원을 가득 태운 군 차량이 질주했다. 한마디로 살풍경이었다.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어서 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했다. 그날의 참상이 꿈에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적지 않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하루에 몇 장씩 조금씩 손으로 써나갔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주백서’의 집필을 완료했다.

바람 새는 골방에 숨어 읽은 책

ⓛ발단(학생시위 : 5월 18일) ②민중봉기로 발전(시민합세 : 5월 19일) ③ 무장봉기로의 전환(5월 21일) ④전남 민중봉기(시외로 확산 : 5월 21일) ⑤시내 장악 및 자체 조직 과정(5월 22 ~26일) ⑥계엄군 무력진입(5월 27일)으로 주요 내용을 구성했고,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찢어진 깃폭’을 발췌해 실었다.

‘광주백서’를 기록할 당시 입수된 자료 가운데 ‘찢어진 깃폭’은 일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비교적 실감 나게 묘사했다고 판단해 4쪽 분량으로 발췌, 백서의 본문 내용과 구분되도록 별도의 부록 형태로 간략히 덧붙였다. 당시에는 아직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민주주의의 횃불은 반드시 ‘광주’로부터 들어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것으로 출발해야 했다.

‘광주백서’를 몸에 지니고 서울로 올라온 필자는 1982년 1월 항쟁 기록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수기로 쓴 ‘광주백서’의 원본은 유인물로 제작, 배포된 후에 필자가 지니고 다니다 수배자 신분으로서 너무나 위험해 결국 태워 없애고 말았다). 인천 구월동 고(故) 김근태 선배 아파트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면서 함께 기거하던 박우섭(인천 남구청장), 민종덕(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고(故) 이범영(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박승옥 등 수배자들과 함께 ‘광주백서’를 타이핑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작업하는 등사기는 남대문시장에서 박우섭 선배가 구입했고, 타자기는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필자가 구해왔다. 서울 중구 인쇄골목 지물포에서 종이를 구입, 재단한 후 인천 구월동까지 아픈 몸에도 지하철을 타고 무거운 종이를 운반한 기억이 생생하다. 타자 작업은 민종덕 형이 맡았다.

추운 겨울 구월동 방에서 재단해 온 종이에 등사기로 일일이 한 장씩 42쪽 팸플릿을 약 120부 인쇄했다. ‘광주백서’ 팸플릿을 완성한 후 필자는 광주에서 제작된 것처럼 꾸미고자 일부러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 현지 우체국에서 원주의 이창복(재야인사) 전 의원 등 20여 명 앞으로 익명을 써서 등기로 발송했다. 뒤이어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서울의 여러 민주화운동단체,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들키지 않으면서도 용이하게 배포될 수 있는 장소에 3~5부씩 놓아두었다.

이 ‘광주백서’ 팸플릿은 배포되자마자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바람 새는 골방에서 비밀리에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광주백서’는 본래 제목도 붙이지 않은 팸플릿이었지만, 사람들에 의해 ‘광주백서’라고 칭해진 것이다. 광주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히 담은 이 팸플릿은 그간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광주의 진실을 복원해 1980년대 학생운동 및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노도와 같이 타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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