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극우 논객들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특수군 600명이 잠입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일베’라는 얼치기 집단도 헛소리를 하며 젊은 층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극우 논객들은 당시 광주 시가지에서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총을 들고 있던 시민군 사진을 지목하면서 ‘특수하게 훈련 받은 북한 특수군의 체형’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한다.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얘기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1980년 광주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잠입해 활개를 쳤다면 국가 방위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서 당시 최고권력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책임져야 하고, 국방부의 주요 장성 모두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구속돼야 마땅한 일이다. 또한 북한 특수요원 600명이 광주에 침투해 폭동을 조장했다고 주장하려면 주관적 추정과 간접적 개연성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이 요원들의 지휘체계와 내적 구성, 접근방법, 접근로, 광주에서의 활동 내용, 광주시민에게 미친 영향과 효과 등에 대한 사실적 자료를 구체적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참고로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샤록이 1995년 입수한 미국 국무성의 광주항쟁 당시 비밀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광주항쟁에 북한이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염려했고 그것을 방증할 만할 증거와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모니터했는데, ‘개입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광주항쟁 관련 국방성과 군부의 자료를 아직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 자료가 공개되면 북한 개입설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를 공개하기 위한 정부와 민간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한편 앞에 언급한 보수 논객들은 1985년 황석영의 이름으로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북한 책 두 권을 각색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수인이 기록할 경우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중복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작성한 자료와 위의 책 내용에서 동일한 서술 부분이 일부 발견됐다고 해서 북한 책을 각색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필자가 1981년 초 광주에서 기록하고 1982년에 팸플릿으로 제작 배포한 ‘광주백서’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북한의 책들은 1985년이 돼서야 출판된 것이다. 훨씬 뒤에 출판된,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책들을 필자가 베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찢어진 깃폭’ 문건이 북한에서 만들어졌다며 이를 근거로 필자의 ‘광주백서’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북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찢어진 깃폭’ 문건을 쓴 인물은 이미 고인이 된 김건남이라는 광주 출신의 시인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1980년 5월 자신이 당시 광주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광경을 기록해 가톨릭 단체에서 증언했고, 그 제목이 바로 ‘찢어진 깃폭’이었다. 김건남은 1989년 남풍이라는 출판사에서 동명의 책을 ‘김문이’라는 필명으로 공개 출판하기도 했다.
일부 논객들은 당시 필자가 스물두 살의 애송이였다면서 어떻게 항쟁 기록을 남길 수 있었겠느냐며 반드시 북한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젊은이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에너지야말로 우리 인류를 이끌어온 핵심적인 동력이었다. 필자를 민족시인 김소월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김소월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진달래’를 스물한 살에 썼다.
역사 왜곡이 현실 왜곡으로
거듭 밝히지만, ‘광주백서’를 기록하던 당시 필자는 수집된 자료와 증언 가운데 과장됐다거나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긴 내용은 최대한 배제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발행한 ‘투사회보’나 각종 선언문, 재판 기록 등을 꼼꼼하게 정리했고, 이와 동시에 항쟁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다양하게 들었다. 과장된 표현이나 증명되지 않은 소문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은 기록의 가치와 신뢰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결국 군부정권에 이용만 될 뿐이므로 가능한 한 정확성을 기하려 노력했다.
일부 논객들은 지금도 필자를 비롯해 광주항쟁 기록 관련자들을 ‘남한의 반역자’라든지 심지어 ‘간첩’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필자는 1970년대부터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면서 남한 중심의 통일운동을 주장했다.
필자는 김범우라는 필명으로 1989년 쓴 ‘실천적 대중운동론’(도서출판 아침)에서 “통일운동은 남한 대중의 의식 및 역량에 기초해야만 하며 아울러 남한 대중의 이익에 봉사해야만 한다. 북한 측 입장을 반영하는 측면이 아무런 매개 없이 노정될 경우, 일반 대중과 심각하게 유리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남한 대중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북한 측 입장을 배제하는 또 하나의 분열적 사고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한 대중을 위한 길은 반드시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통일운동은 오로지 대중적 결집에 의존할 때만이 발전할 수 있다(189~191쪽)”라고 기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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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중국 유학을 했지만 북한과 가까이 위치한 동북 지방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북한 사람들과 만나지도, 대화 한 마디 하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돼온 ‘종북몰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유신 시절부터 체득한 몸가짐이기도 하다.
역사의 왜곡은 현실의 왜곡을 낳는다. 역사는 주관이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동요돼서는 안 되며, 반드시 진실의 기록으로 구성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