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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③

“한 번도 겪지 못한 정신적 위기 온다”

  •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한 번도 겪지 못한 정신적 위기 온다”

  •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
    ●나는 속아 살아왔다
    ●정신적 위기가 제일 큰 문제
    ●한 번도 겪지 못한 어려움 온다
201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2’를 찾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201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2’를 찾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삼성그룹은 사사(社史)인 ‘삼성 60년사’에서 1993년을 ‘분기점이 되는 해’로 기록한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나온 해이니 그럴 만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93년일까. 

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 1993년은 미증유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국제 정치·경제 질서가 대변혁의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인 1991년 옛 소련, 동유럽 등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념과 냉전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한국은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세계 무역 질서의 대변동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로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는 등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을 목표로 설립된 GATT(가트·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제를 이어받은 우루과이라운드는 원자재나 공산품 차원의 개방을 넘어 농산물, 서비스 분야, 지적재산권, 투자까지 문을 여는 전(全)방위 무역 개방 협상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의 법적 토대는 세계무역기구(WTO)였다. 유명무실하던 나라 간 무역분쟁 조정 과정에 개입해 판결권과 판결에 대한 강제집행권을 갖는 명실상부 세계무역사법부가 출범한 것이다. 시장경제와 사회주의경제로 양분됐던 세계시장은 이념과 국경이 없는 무한경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국도 이때 쌀을 비롯해 영화, 유통시장 등 전방위적 개방 압력에 직면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1993년 12월 15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을 ‘제2의 개국’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는 이런 급진적 변화를 ‘세계화’로 이어지는 담론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연일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을 어떻게 달랠 것인지에만 정치·사회적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정치는 지금도 그렇듯 허둥댔고 지리멸렬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 ‘쌀 시장 개방 반대’를 외친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연말에 가서야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고립보다 경쟁과 협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며 비록 유예기간을 두긴 했지만 쌀 시장 개방을 공식화했고, 1994년 11월에 가서야 ‘세계화’를 선언했다. 그것도 해외 순방 중에서였다. 대통령 참모들은 갑자기 나온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에 영어에 적합한 말이 없으니 ‘SEKYEHWA’로 표기해 달라고 언론에 부탁했을 정도였다.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한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한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기업인들은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말한 ‘냄비 속 개구리론’은 그런 위기의식을 상징적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우리가 맞을 경제전쟁은 무력전과 다르다. 자기가 전쟁을 하고 있는지, 전쟁에 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망해간다. 끓고 있는 냄비 속에 갇힌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무기력하게 당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전쟁의 패자(敗者)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 회장으로서는 우선 삼성부터 살리는 게 급했다. 1993년만 해도 삼성전자는 국내 1등 기업이긴 했지만 독보적이지는 않았다. 주력인 가전 분야에서 금성사(LG전자)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세계시장에서도 ‘세계경영’을 앞세운 대우와 건설과 중화학공업으로 도약하고 있던 현대에 비해 역동성 면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당시 가전제품, 정보통신, 컴퓨터, 반도체 4개 분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중 가전제품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유통시장 개방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소니, 산요 등 일본 가전 업체들이 동남아시아 공장에서 만든 저가품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해 들어왔다.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2년 매일경제 11월 20일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삼성이 처한 경영 환경은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다. 삼성전자는 그런 저런 회사 중 하나였다. 회사 이름으로 제품을 못 내고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OEM)으로 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농심 회장을 지낸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은 40년간 ‘삼성 맨’으로 살았다. 삼성전자 엔지니어로 시작한 그는 1993년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당시 수행팀장으로서 경영철학 구축 과정을 지켜봤다. 경기 용인시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나 당시 삼성전자의 위상에 대해 물으니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70년대 말까지는 삼성이 단연 재계 톱이었다. 삼성은 농사짓던 사람들을 산업화 일꾼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관리의 삼성’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거였다. 그 덕택에 1970년대 말까지는 모직, 제당, 가전 분야에서 막강한 1등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현대가 조선과 자동차를 무기로 떠올랐고, 대우가 세계경영 기치를 내걸었다. 당시 대학생 입사 선호도를 조사하면 현대와 대우가 1, 2등, 삼성이 3등이었다. 그룹 매출 규모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에 따른 무한 경쟁, 내부적으로는 임직원들이 과거 성공의 기억에 안주해 변화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하던 즈음에 이 회장이 취임한 거다. 선대 이병철 회장 시절만 해도 이 회장은 장인 홍진기 회장과 아버지 옆에 앉아서도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삼성이 점점 내려간다. 이 문화와 체질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고심했던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후부터 변화와 개혁을 주문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1993년 9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직원들에게) 속았다”고까지 했다.


나는 속아 살아왔다

1980년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1980년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에요. 1979년인가 공식적인 후계자로 정해지고 영감(이병철 회장) 돌아가시고 회장 자리에 앉으면 당연히 선대 영감하고 사무실이 늘 붙어 있었으니까 임직원들이 나를 따라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장기 이식 수술 거부 반응 같은 거였죠. 요새 내가 비로소 고함지르고 하는데 지난 5년간은 완전히 속았어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일하기가 어렵다”는 하소연까지 한다. 

“삼성의 일에 내가 손댄 이래, 나는 수백 번도 더 속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지난 5년간 쌔가 빠지게(입이 닳을 만큼) 무진장 얘기를 했는데도 변화의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회장인데도 모든 조직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일하기가 어려운가.” 

그가 느꼈던 긴장감은 공허한 메아리로 회의실에서만 맴돌 뿐 제대로 전파되지 못하고 있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 부회장(전 삼성생명 부회장)은 1978년 삼성전관에 입사했다. 1987년 회장 비서실 운영팀에서 과장으로 근무할 때 이 회장이 취임하면서 ‘이건희 회장 비서실 1기’ 멤버가 됐다. 그는 “당시 삼성 임원들은 긴장감은커녕 회장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두 발 앞서가는 내용을 말한 탓도 있었지만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디지털 인력이나 소프트 경영이란 표현을 자주 썼는데 ‘디지털’이라는 말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들이 막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인공지능(AI) 시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디지털 시대를 준비해야겠구나’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프트 경영이라는 말은 상당히 생소해 ‘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같은 ‘졸병’들은 ‘(현장 경험 없이) 부회장에서 바로 회장에 취임했으니 뭐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시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고, 당시 사장들도 ‘저러시다가 말겠지’ 했던 것 같다.” 

손욱 전 원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1980년대 말 ‘소프트웨어 인재 1만 명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인사팀에 강제로 명령해 소프트웨어 인력을 잔뜩 채용했는데, 몇 년 뒤 추적해 보니 다들 엉뚱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다. 돌이켜보면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이미 1980년대부터 내다보고 있었던 거다.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뛰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회장이 생각했던 ‘소프트’의 개념은 무엇이었을까 짚고 넘어가자. 지금이야 누구라도 어렴풋하게 감이 오는 말이지만 이 회장의 말을 듣다 보면 지금 시점에도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키워드들이 있어 인용해 본다. 

생전에 펴낸 그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미국 ‘비즈니스 위크’라는 잡지를 읽다 보니 기술이나 생산력 같은 하드(Hard)의 가치는 앞으로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한다. 놀랄 이야기도 아니다. 기술 진보가 빠르다는 컴퓨터만 해도 5년 사이 가격이 40% 떨어졌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우선 드는 느낌은 이 회장이 생전에 가졌던 통찰력과 예지력의 토대가 막연한 감이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부력(力)’이었다는 말이 실감 난다. 

그는 ‘(향후 경쟁력을 잃어갈) 하드의 가치를 보완할 것이 바로 소프트 경쟁력’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소프트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거나 그것을 기획 가공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요즘 TV에는 VCR라는 소프트 기능이 당연히 부가되고 있는데 VCR는 테이프가 있어야 한다. 테이프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이 영화라는 소프트다. 영화를 만들려면 작가의 창의력이라는 소프트가 또 있어야 한다. 이렇게 소프트를 찾아 들어가면 갈수록 투자비보다 이익이 더 커지고 그만큼 창의력도 더 많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소프트의 실체다. (…) 소프트 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후발 주자라도 핸디캡이 없다. 핵심 경쟁력을 모방당하거나 쉽게 잃지도 않는다.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고부가가치를 가져다준다. 이런 시대에 무형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면 시대 흐름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소프트적 상상력을 이렇게 적시한다. 

“전자제품을 홈오토메이션과 결합해 패키지 상품화한다든지 카메라를 팔면서 필름을 생각하고 오디오를 생산하면서 음반을 생각하는 것이 소프트를 중시하는 출발점이다.” 

소프트적 창의력은 사물이나 어떤 상황을 깊게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말을 청소년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어려움 온다

흔히들 이 회장에 대해 ‘위기 경영’의 화두를 던진 기업인이라고 한다. 생전에 고인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가 되고 사회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가 단지 삼성의 위기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산업계의 위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까지 고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3년 8월 5일자 조선일보 ‘삼성의 신사고 경영’ 제목의 사설 한 대목을 읽어보자. 

“지난 30여 년의 기업사와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 경제가 빠져버린 최대의 함정은 ‘성장의 환각’이었다. 물산(物産)은 더없이 풍성하고 입성(‘옷’을 속되게 이르는 말)은 날마다 더욱 화려하게 변모했지만 산업과 기업을 활기 있게 끌어갈 동인(動因)은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세계시장 곳곳에서 우리 상품이 밀려나도 그것을 뛰어넘을 기술도, 솜씨도, 그나마의 의지도 바닥난 형국이 바로 적나라한 현실이다. 정부는 옛날식의 ‘하면 된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업은 정부만 쳐다보거나 좁아터진 집안 마당에서 서로 다투고 근로자는 제 몫 늘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진정한 개혁은 위기와 한계의 실체를 바로 보는 데서 출발돼야 한다. 삼성의 신경영이 그런 인식의 반영이라면 적어도 문제의 핵심에 한발 다가선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경제에 대한 기대와 낙관이 너무 지나치다. 1990년대는 1980년대와는 환경이 아주 다르다. 이번에 대비를 못하면 아주 심각하다. 구체적으로 ‘수치상 뭐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업가적 육감으로 볼 때는 심각해 보인다. 한두 개 시장을 개방하고, 한두 가지 생산성을 개선하고, 한두 가지 외교 정책만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힘들 것 같다.”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반도체를 예로 든 이런 구절도 나온다. 

“과거 5000년의 변화보다 최근 100년의 변화가 더욱 무쌍했고 그 100년보다는 지금부터 5년, 10년 동안의 변화가 더욱 심할 것이다. 반도체 혁명이 급격한 변화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수년 내 1기가 반도체가 상용화된다. 1기가는 트랜지스터 10억 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에 드는 전력량은 10w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 용량을 진공관으로 연결해 가동하려면 230만kw가 소비된다. 만약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1기가 반도체가 들어간다면 원자력발전소 2기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 중요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경영환경과 경쟁 상대자들은 이 변화를 느끼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초음속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일류기업들에 비해서 경쟁력이 턱없이 약한데 이제 그들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하는 시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큰 문제를 “정신적 위기”로 꼽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정신, 환경, 제도, 시간의 위기라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적 위기가 제일 큰 문제다. 기업가는 투자의욕을, 근로자들은 근로의욕을 잃고 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나 사회의 리더들은 앞장서서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구심점 없이 표류하고 있다. (…) 시대는 급변하는데 아직도 낡은 옷을 걸치고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 얽매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1993년 1월 11일 사장단 회의에서 “21세기를 대비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맞고 있다는 각오로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 미국 LA로 날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몇 달 뒤 나올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전초전이 될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신동아 2021년 1월호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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