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옆 사람 신뢰할 때 내주는 게 옆자리” [+3D]

[6인치 미술관] 보고 있으면 편안해지는 윤형택 작품 세계

  • 구희언 기자, 이진수 기자

    hawkeye@donga.com, h2o@donga.com

    입력2023-06-2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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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지인 모습에서 아이디어 얻어

    • 옆모습 그리는 이유? “‘좋아함’ 담겨서”

    • 우리가 살아가는 데엔 따뜻함 필요하다

    • 그림에서 시작돼 건축으로 완성되는 공간 제작이 꿈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6월 29일 열리는 개인전 ‘Fondness’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윤형택 작가. [지호영 기자]

    6월 29일 열리는 개인전 ‘Fondness’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윤형택 작가. [지호영 기자]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쁜 현대사회에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볼 여유가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 윤형택(37) 작가의 작품을 보며 든 생각이다. 윤 작가는 누군가의 옆모습을 그리는 회화 작가다. 작품 속 피사체들은 혼자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등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산다. 정면이 아닌 옆모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5월 23일 경기 파주시 소재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쪽 벽에 6월 29일 열리는 네 번째 개인전 ‘Fondness’에서 공개할 크고 작은 캔버스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눈, 코, 입을 그리지 못한 미완성 캔버스도 있었다. 윤 작가는 “표정이 있는 그림이 완성작”이라고 말했다.

    윤 작가는 단국대 예술학부 공예과를 졸업했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10년 가까이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공간 스토리텔링 작가로 일했다. 평소 ‘낙서쟁이’라고 불릴 만큼 낙서하길 좋아하던 그는 2018년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아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그림 작업을 맡으며 영역을 조금씩 넓혀나갔다. 이를 계기로 2021년 서울 가나아트사운즈, 2023년 영국 Moosey Art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윤 작가는 하얀 노트를 꺼내더니 굵고 뭉툭한 연필심을 쓱쓱 굴리기 시작했다. 문답이 쌓일수록 종이도 낙서로 가득 찼다.

    https://my.xrview.co.kr/show/?m=77fNsLHJPB4 에서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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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과 계절 따라 달라지는 작품

    작업실을 왜 파주에 뒀나.

    “자연환경이 좋은 지역을 찾아왔다. 2016년 결혼하고 성남 분당구 정자동, 서울 마포구 성산동 등지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강아지를 키우는데, 도시는 강아지와 산책하기에 제약이 있었다. 그러다 파주 타운 하우스를 보자마자 동네 자체에 반했고 작업실도 여기로 정했다.”

    예술가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머무는 도시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들 한다. 파주는 어떤가.

    “아무래도 계절감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순수 회화 작품을 시작한 때가 마포구 성산동 빌라에서 살던 시기였다. 외부 풍경이 차단된 ‘ㄷ’자형 구조로 작은 중정을 품은 건물이었는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밖을 보면 내부만 보이는 단조로운 구조라 계절감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림에서도 컬러가 최대한 배제됐다. 이곳은 창밖으로 계절감을 명확히 느낄 수 있어 작업하면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윤 작가의 그림에는 항상 사람이 나온다.

    “평소 그림을 그릴 때는 아내와 지인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림이 누군가의 집 벽이나 사적인 공간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그림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더라. 그래서 인물 묘사는 최대한 덜어내는 편이다.”

    옆모습 그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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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모습이 아닌 옆모습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누군가의 옆자리에서 바라본 그 사람의 옆모습에 내가 찾는 ‘좋아함’이라는 감정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다. 대중교통 맨 뒷자리에 탈 때를 생각해 보자. 보통 다섯 자리가 있는데 제일 먼저 앉는 사람은 맨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을 때가 많다. 다음 사람은 그 반대쪽에 앉고, 그다음 사람은 가운데에 앉는다. 여기에서 누군가 앉은 옆자리 틈에 들어가 앉는다고 생각해 봐라. 부담스럽지 않나. ‘옆자리는 옆사람을 신뢰하지 않으면 쉽게 앉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Fondness라는 주제로 옆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이야기에 눈길이 가나.

    “모호한 이야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개인전에서 공개하는 신작. 회색 머리를 휘날리며 물 호스를 들고 있는 인물을 그렸다.[ PBG]

    개인전에서 공개하는 신작. 회색 머리를 휘날리며 물 호스를 들고 있는 인물을 그렸다.[ PBG]

    “아까 작업실에서 물 호스를 든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지 않았나. 회색 머리 주인공이 호스를 들고 머리를 휘날리는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꽃을 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총을 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호스만 보면 물 뿌리는 모습이 연상돼 여름의 청량감을 자아내지만, 생긴 것 자체는 총이다. 이 사람이 뭘 들고 있는 걸까 생각하면 그림 속 인물의 표정도 알 수 없게 느껴진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대입해도 이야기가 되는 모호한 지점을 그림으로 그리는 게 재밌다.”

    작업 중 ‘apartamento’라는 분할된 그림이 있다.

    그림이 분할된 것처럼 보이는 윤형택 작가의 작업물. [PBG]

    그림이 분할된 것처럼 보이는 윤형택 작가의 작업물. [PBG]

    “좋아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인테리어 잡지 ‘아파르타멘토(apartamento)’의 일부 사진에서 착안해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 가운데 선을 그리고 싶어서 한 작업이다. 가운데 선 하나로 그림이 완전히 바뀐다. 장면 분할처럼 느낄 수도 있고, 창틀처럼 그냥 공간 분할로 볼 수도 있고. (하나의 그림이) 다양하게 읽히길 원했다. 그 작품 이후에도 분할된 그림을 여러 번 시도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다.”

    작업 재료로 아크릴 물감과 연필을 주로 사용하더라.

    “스케치할 때 연필, 탄(炭), 크레용, 파스텔 같은 건식 재료를 주로 쓴다. 이것들은 마감이 불안한 재료라 (비교적 외부 충격에 강한) 아크릴을 함께 쓴다.”

    건식 재료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평소 생각 전환이 빠르고 손도 빠른 편인데, 이런 속도를 잘 따라올 수 있는 게 건식 재료였다. 물을 쓰는 재료는 농도나 사용법에 따라서 호흡 조절이 필요하다. 그렇게 작업하다 보면 손의 움직임이 머릿속 생각보다 느려진다. 건식 재료는 둘의 속도가 비슷하게 흘러가서 편하다.”

    그림에 온기 불어넣는 비결

    작품에 살구색이 많이 쓰이던데.

    “따뜻함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색이 살구색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살구색은 어떤 컬러를 더해도 따뜻해 보이는 이점이 있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비결이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사실 따뜻함보다 ‘신뢰감’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그 필요성을 알기에 따뜻함 자체를 공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 사회 구성을 보면 예전보다 가족 수도 줄었고, 집 풍경도 전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2018년 한 기업의 TV 프로젝트와 협업하며 ‘따뜻함이 왜 필요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TV는 스마트폰이 나오고부터 집의 중심 제품에서 집을 꾸미는 제품이 되지 않았나. TV를 디자인하며 사라진 집안의 온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온 가족이 소파에 모여 앉은 모습을 그린 작품.[ PBG]

    온 가족이 소파에 모여 앉은 모습을 그린 작품.[ PBG]

    소파에 마주 앉은 가족 그림에도 그런 온기를 담았나.

    “맞다. 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 그림에서 말하는 따뜻함은 상황이 주는 따뜻함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자신을 어른에게 대입해서 볼 거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이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를 대입해 보는 경우가 있어서 신기했다.”

    작가 경력에 반전을 준 작품은 무엇인가.

    “방금 이야기한 가족 그림이다. 부모와 아들까지 총 세 식구가 사는 큰 집에 어울리는 작품을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 그 집은 아이가 1층, 어머니가 2층, 아버지가 3층, 각자 한 층씩 쓰는 구조였다. 주방부터 드레스 룸, 거실까지 모든 방이 층마다 꾸려져 있었다. 그런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구상하는데, (구조상) 세 식구가 모여 앉아 있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큰 공간에 온 가족이 모여 앉은 모습의 그림을 걸어 그 나름대로 유머를 더했다. ‘가족 모두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샤워 후 잠옷을 입고 소파에 모여 앉은 기분으로 이 그림을 봐달라’고 전했다.”

    낙서를 좋아하던 아이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반에 그림 그리는 아이가 하나씩 있다. 윤 작가네 반에서는 그게 윤 작가였다. 그는 “그런데 항상 주변에서 ‘우와’ 하면서도 ‘옆 반 애가 더 잘 그린다’는 말을 꼭 하더라. 학교에서 제일 잘 그리는 애는 아니었다”며 웃었다. 이어 “칭찬받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미술학원에 다닐 때도, 대학 시절에도 항상 제일 잘 그리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림이 좋아서 계속 그리고 있다. 이런 성격은 어머니 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어떤 영향을 끼쳤나.

    “어릴 적 축구 경기를 보면 어머니는 무조건 지는 팀을 응원했다. 그런 영향인지 나도 야구나 배구 등 어떤 스포츠 경기를 봐도 ‘어느 팀이 잘한다’를 따지지 않고, 지는 팀을 응원하고 있더라. 역전의 가능성도 기대되고, 지고 있던 팀이 잘해서 경기 자체가 재밌어지는 게 좋다.”

    작가로서 버킷리스트가 있나.

    “그림에서 시작돼 건축으로 완성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대개 미술관을 떠올리겠지만 그 대신 집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모든 게 완성된 상태에서 공간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림을 먼저 그린 뒤 이것에 맞는 집을 설계해 완성한 공간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

    그림 한 점에서 시작되는 집이라니 기대된다.

    “죽기 전에는 꼭 만들고 싶다. 좋은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웃음).”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

    “7월에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11월 홍콩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를 잘 마무리하고 2024년으로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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