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파벌 얼룩진 CEO 선발史
임종룡 “분열·관행·불공정 반드시 바꿔야”
‘보여주기’ 비판도… “지속해야 의미 있어”
[Gettyimage]
파벌 싸움은 우리은행의 탄생 배경과 관련 있다. 우리은행의 전신 한빛은행은 한국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합병을 통해 1999년 출범했다. 한빛은행은 2001년 우리금융 산하로 편입돼 이듬해 우리은행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금융그룹의 최대 리스크로 지적돼 왔다. 통합 이후 공채 출신 직원들이 차·부장급에 오른 시기를 기점으로 파벌 싸움의 기세가 약해졌지만 여전히 임원들에겐 ‘한일’ 혹은 ‘한국상업’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줄서기·줄대기 문화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우리금융그룹이 환경 변화를 위해 새로운 실험에 돌입했다. 투명·합리적 경영 승계 프로그램을 구축해 자회사 CEO뿐 아니라 회장 선임에도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미 한 번 실험했다. 최근 우리은행장 선임 과정에서 선보인 ‘은행장 선정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4단계 오디션 거쳐 행장 선발
서울 중구 회현동 우리금융그룹 본점. [동아DB]
이번엔 한국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출신 각각 2명으로 구성된 총 4명의 후보를 2개월 동안 4단계에 걸쳐 적합성 평가를 받게 했다. 선임 과정에서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4단계는 구체적으로 외부 전문가 심층 인터뷰, 평판 조회, 업무 역량 평가, 심층 면접이다. 1단계에선 외부 평가단 4명을 구성해 1인당 8시간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2단계 평판 조회에선 후보자의 상사와 동료·부하 직원의 인터뷰를 통해 다면 평가를 시행하고, 3단계에선 사외이사 대상 업무 보고를 하게 했다. 4단계 자추위 심층 면접을 거쳐 최종 후보를 낙점했다. 조병규 우리금융캐피탈 대표가 차기 은행장으로 내정됐다. 조 대표는 7월 공식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5월 31일 우리금융그룹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번 프로그램 운영 결과를 총평했다. 이날 이정수 우리금융지주 전략부문 상무는 “1단계 외부 전문가 심층 인터뷰에서 외부 전문가의 주관에 치우친 평가가 이뤄지지 않도록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다”며 “각 전문가가 수일간 인터뷰를 거쳐 객관적 자료를 자추위원들에게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2단계 평판 조회에선 통상 진행되는 기업의 임원 선임 과정에 들어가는 인터뷰 대상보다 두 배 많은 인원을 인터뷰하는 등 표본을 확대했다”며 “은행 내부 시스템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룹 주요 리더가 될 본부장급부터 평가와 연수 등을 거쳐 CEO를 선발하겠다고도 밝혔다. CEO가 되기 4~5년 전부터 최소 연간 50시간 이상 리더 역량 연수를 실시하고 평가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골자다. 이렇게 육성한 임원들 중 자추위를 통해 CEO 후보군을 추리고, CEO 선정 프로그램을 거쳐 최종 CEO를 선발한다는 계획이다. 이 상무는 “한순간 우연히 후보가 돼서 리더가 되는 방법을 지양하고, 전문 역량을 훈련받은 인재들이 리더가 되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과정을 설계하겠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지속해야 의미 있어”
3월 3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금융지주회장 간담회에서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다만 우리금융그룹 CEO 선발 과정에서 공정성·투명성에 대한 비판이 지속돼 왔다는 점에서 어차피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시각도 많다. 또 임 회장은 기획재정부 차관을 지내고 국무총리실장과 금융위원장 등을 거친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이다. 낙하산, 모피아(옛 재정경제원 출신 관료 집단) 논란 속에서 그룹 수장이 됐기에 세간의 시선은 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 금융 당국은 손태승 전 회장에게 라임펀드 불완전 판매 등을 이유로 중징계를 내렸다. 직·간접적 압박으로 손 전 회장의 연임을 막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우리금융그룹 회장 선출 과정을 두고 “쇼트 리스트(후보군)가 일주일 만에 결정되는 과정에서 적정한 시간이 확보됐는지 걱정스럽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오디션을 통해 세간의 부정적 시선을 환기하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선 “우리금융그룹의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사 관계자 A씨는 “CEO 선임 체계를 명확히 만들고 실행했다는 것 자체가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앞으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낙하산 논란이나 계파 갈등이 확연히 줄어들 수 있다”고 평가했다.
회의적 시선도 있다. 이번 시도가 일회성 이벤트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금융은 프로그램을 매뉴얼화해 지속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정관에 반영해 공식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다. 또 조병규 차기 우리은행장이 한국상업은행 출신이라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손태승 전 회장과 이원덕 우리은행장은 한일은행 출신이다. 한일은행 출신과 한국상업은행 출신이 번갈아 행장을 맡는 관례가 바뀌지 않은 셈이다. 그간 우리은행장은 7대 이광구(한국상업) 행장 이후 손태승(한일), 권광석(한국상업), 이원덕(한일) 행장 등이 번갈아 오르며 균형을 맞춰왔다.
임 회장이 전임 경영진 색깔 지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우리은행장 최종 후보군 2인으로 이석태 우리은행 국내영업부문장과 조 신임 행장이 모두 한국상업은행 출신으로 나란히 오른 것이 근거다. 이미 행장을 정해놓고 ‘보여주기’ 이벤트를 한 것 아니냐는 것.
금융권 관계자 B씨는 “애초에 임 회장 선출 과정에서 나왔던 잡음을 이번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불식하려 했다는 점에서 보여주기라는 지적을 피하긴 어려웠다”면서도 “앞으로 이를 장기간 이어간다면 훗날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