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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癌” 이건희가 LG창원공장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영상]

[Special Report | 이건희 新경영 30년 시점에서 대한민국 ‘미래 30년’ 보다]

  • 허문명 기자 ‘경제사상가 이건희’ 저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6-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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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 전 “이미 망한 회사”라고 호통

    • 신경영 선언은 ‘의식개혁운동’

    • ‘품질경영’에서 ‘품’을 뺀 이유

    • “불량은 암, 100만분율로 관리하라”

    • 품질 부서 아닌 전 직원의 문제

    • 대한민국이 3류로 떨어진다는 위기감

    • 문제의 본질을 향한 집념, ‘5why’

    • ‘장인의 예술화’로 이끌어낸 ‘상생’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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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5월 19일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세 시간여 달려 도착한 창원중앙역. 대한기계학회(회장 윤의성) 초청으로 LG전자 창원공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공장이 있는 창원국가산업단지(산단)는 역에서 차로 2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창원산단은 현대로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두산에너빌리티 등 대한민국 방위산업 및 원자력산업의 메카다. LG전자 공장 건물 맨 위층에 올라가니 산을 병풍 삼아 펼쳐진 산단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굴뚝은 사라지고 깨끗하게 늘어선 공장을 한눈에 조감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산업 현장의 힘이 느껴졌다.

    로봇·AI가 지배하는 ‘등대 공장’

    1958년 ‘금성사’로 창립한 LG의 냉장고 공장은 원래 부산에 있었다. 그러다 1976년 창원으로 옮겨왔다. 이후 창원 공장은 ‘골드스타(Goldstar 금성)’ 로고를 단 냉장고·세탁기·식기세척기 등 LG 생활 가전 최대 생산기지가 됐다. 사명이 LG로 바뀐 때가 1995년이니 이제 ‘골드스타’ 브랜드를 기억하는 MZ세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등이란 건 많은 사람이 알지만 가전까지 세계 1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주인공이 LG다.



    LG전자 생활가전(H&A) 사업본부는 2021년 미국 기업 월풀을 제치고 매출 기준 세계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세계 1위로 올라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 월풀 냉장고나 세탁기가 있으면 잘사는 집 소리를 듣던 때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LG 창원공장은 2022년 3월 국내 가전업체로는 처음으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WEF)이 매년 선정하는 ‘등대 공장’이 됐다. [LG전자 제공]

    LG 창원공장은 2022년 3월 국내 가전업체로는 처음으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WEF)이 매년 선정하는 ‘등대 공장’이 됐다. [LG전자 제공]

    명실상부 세계 1위 가전의 산실인 창원공장이 요즘 또 다른 면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다름 아닌 로봇과 AI(인공지능)가 일하는 이른바 ‘스마트 공장’이어서다. 창원공장은 지난해 3월 국내 가전업체로는 처음으로, 또 포스코(2019) LS일렉트릭(2021)에 이어 세 번째로 다보스포럼으로 유명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WEF)이 매년 선정하는 ‘등대 공장’이 됐다.

    등대 공장이란 말은 영어 ‘라이트하우스 팩토리(Lighthouse Factory)’를 직역한 것인데 밤하늘에 불을 비춰 길을 안내하는 등대처럼 최첨단 기술을 생산 공장에 도입해 제조업의 미래를 비추는 미래 공장이란 뜻이다. 인건비 상승으로 가전에서 마진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LG전자는 해외 이전 대신 2017년 총 8000억 원을 투자해 창원공장을 로봇과 AI가 지배하는 스마트 공장으로 혁신했다.

    공장은 냉장고를 만드는 1공장과 세탁기·에어컨 등을 만드는 2공장으로 나뉘어 있다. 이날은 냉장고 공장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1공장은 전체 4층 규모다. 1, 2층에서 부품을 조립해 3층 메인 라인에서 생산하고, 4층에선 완성된 냉장고의 품질을 검사하고 있었다. 먼저 3층으로 올라갔다.

    반도체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청결이듯 스마트 공장도 청결이 생명이다. 로봇들이 바깥세상을 인식하려면 QR코드나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먼지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직사각형 모양의 기계 장치들이 로봇청소기처럼 바닥을 쓸고 다니는 게 먼저 눈에 띄었다. ‘운반 로봇(AGV·Automated Guided Vehicle)’이라고 한다. 부품을 여기저기 싣고 옮기는 물류 로봇인데 모두 50대가 무인 운행 중이라고 했다.

    최대 무게 600㎏까지 실을 수 있으며 자석이 아니라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된 6000여 개 QR 코드를 인식해 돌아다닌다고 한다. 사람이 하루에 수천 번 오가며 할 일을 로봇이 대신하는 것이다. 와이파이가 아니라 5G로 움직이기에 통신이 갑자기 끊겨버려 정지하거나 오작동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한다. 배터리가 소진되면, 충전대로 자동 이동한다.

    로봇 도입 후 생산성 30% 향상

    LG 창원공장은 로봇 근로자 및 디지털 트윈 도입 후 공정 속도가 47% 개선됐고, 그 결과 생산성은 30% 이상 향상됐다. [LG전자 제공]

    LG 창원공장은 로봇 근로자 및 디지털 트윈 도입 후 공정 속도가 47% 개선됐고, 그 결과 생산성은 30% 이상 향상됐다. [LG전자 제공]

    갑자기 어딘가에서 경고음이 들리면서 로봇 한 대가 멈췄다. 누군가 QR코드를 밟은 것이다. 잠시 후 로봇은 다시 움직였다.

    서서히 작업장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 대신 거대한 로봇 팔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 촬영장 같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고공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각종 부품을 담은 물류 박스들이 1층과 3층을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자동화로 자재 공급 시간은 기존 대비 25%, 물류 면적은 30% 줄었다고 한다. 근로자들은 로봇들이 일을 잘하는지 화면을 모니터링하거나 복잡한 배선을 설치하는 라인에만 보였다.

    공장 안에서 일하는 키 2m정도 되는 로봇 팔 136대는 냉장고 문 부착이나 고주파 용접, 부품 조립, 포장 등 ‘인간 근로자’가 힘들어하는 공정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이 중에서 제일 신기한 건 냉장고 문을 붙이는 로봇이었다.

    문짝 하나 무게는 20㎏. 냉장고 한 대에 총 4개가 들어가니 총 80㎏을 들어 올려야 한다. 20㎏짜리 문을 번쩍 들어 올려 작은 구멍에 끼워 맞춰야 해 힘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공정인 터라 근로자들의 퇴사율이 제일 높았다고 한다. 작은 실수에도 스크래치가 생겨 불량이 나올 수 있고, 힘이 요구되다 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오후가 되면 불량률도 높았다.

    지금 이곳에는 사람이 없다. 본체가 라인에 도착하면 로봇 팔이 1,2초 만에 문을 붙인다. 더 대단한 것은 각각 종류와 모양이 조금씩 다른 58종이나 되는 냉장고를 한 라인에서 만든다는 것. 로봇들은 크기가 제각각인 문짝을 척척 빠른 속도로 붙이고 있었다. 팔 위에 붙어 있는 3D 카메라가 냉장고 본체를 촬영해 결합할 본체의 위치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덕분이라고 한다. 로봇들은 A4용지 세 장 두께인 0.25㎜ 정도의 미세한 차이까지 반영해 문짝을 붙이고 있었다. 이런 식의 냉장고 문짝 붙이기 기술은 세계 최초라고 한다.

    다음으로 힘든 일이 화염이 튀는 용접 공정이다. 산화가스도 나와 위험도가 높았지만 이제는 로봇들이 고주파로 13초 만에 용접을 해내고 있었다. 로봇들은 수십만 번의 ‘머신 러닝’을 통해 얻은 최적의 각도와 온도로 라인 위에 있는 본체에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용접을 하고 있다고 했다.

    3층 견학을 마치고 1층으로 안내받아 내려오니 로비 벽면에 대형 모니터 두 개가 보였다. 자동화를 넘어선 지능화의 현장이었다. 다름 아닌 ‘디지털 트윈’으로 실제 공장과 똑같은 쌍둥이 공장을 가상공간에 재현한 것이다. 생산공정마다 설치돼 있는 바코드와 센서, 운반 로봇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지금 이 시간 실제 공정이 어떻게, 어떤 속도로 돌아가는지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 어느 공정에서 어떤 부품이 부족해진다는 걸 예측하고 미리 부품도 옮겨놓는다.

    디지털 트윈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런 미래 예측을 통한 사고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 예를 들어 사출 라인의 경우 사출 온도가 900℃를 유지해야 하는데 920℃, 940℃로 올라가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미리 알려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식이다. 오세기 부사장은 “30초마다 공장 안에서 보내오는 데이터를 모두 수집 분석해 라인에서 향후 10분 뒤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려주는 시스템”이라며 “이런 시스템을 통해 공장 내 모든 상황을 10분 일찍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소개했다.

    로봇 근로자들과 디지털 트윈이 도입된 후 공정은 놀랄 만큼(47%) 개선됐다. 스마트화 이전엔 한 달에 10시간 정도 라인이 멈췄다면 지금은 24분가량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결과 창원공장 생산성은 30% 넘게 향상됐다.

    사실은 의식개혁운동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신경영 선언 30년을 되돌아보는 기사를 쓰면서 LG의 첨단 스마트 공장 이야기부터 언급한 것은 ‘만약 이회장이 이 공장을 보면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6월 7일이 신경영 선언 30주년이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말로 대표되는 1993년 6월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위기의식과 변화를 강조한 메시지라고 우리 대다수는 기억한다. 이는 사실 ‘품질경영’ 선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제조업의 생명은 품질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제품을 싸게, 좋게, 빨리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이 회장은 ‘제품의 품질을 높이려면 어떻게 할까’ 하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다름 아닌 ‘인간의 의식과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데서 찾았다. 로봇 근로자가 없던 시절인 30년 전 삼성의 신경영 선언은 그런 의미에서 의식개혁운동이자 문화운동이었다.

    이 회장은 세탁기 뚜껑을 칼로 조립하는 삼성의 공장 근로자를 보고, 또 먼지가 쌓여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있던 LA 가전 매장에서 충격을 받고 임직원들을 대거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한다. 그러면서 “불량은 암이고 이것은 암적인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일갈했다.

    생전 이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량제품이 단지 고객을 잃는 차원에서 그친다면 굳이 암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실 어느 회사 제품의 질이 좋지 않다고 하면 그 소문은 급속도로 번지게 되어 있다. 암세포의 분열과 전이를 그대로 닮은 것이 바로 불량제품에 관한 소문이다. 초기에 발견해서 잘라내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그냥 버려두면 사람을 죽게 하는 것까지 똑같다. 불량이라는 암도 내버려 두면 기업을 죽게 한다. 암적 증상의 조기 발견과 퇴치가 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비행기는 100만 개 이상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불량률이 1%라고 한다면 무려 1만 개 이상의 불량 부품을 달고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비행기가 제대로 작동하면 아마 기적일 것이다. 그래서 항공산업은 보잉사 등 품질 수준이 극도로 높은 소수의 기업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품질을 관리하는 단위로 당연히 PPM을 사용하고 있다.

    PPM은 ‘Parts Per Million’의 두음자를 딴 것으로 100만분율을 나타낸다. 100분율보다 정밀성이 1만 배나 높다.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유무를 가릴 때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 정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신 분야에서 세계 초일류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모토롤라는 품질 수준의 극대화를 경영 이념으로 정하고 ‘6시그마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6시그마란 통계학 용어로 100만 개 중 3~4개 정도의 불량을 허용하는 고도의 품질 수준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회사 제품이 세계적 품질 수준을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불량 개념조차 잘 몰랐던 것이 우리 기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생활의 질이 달라졌고 소비자의 의식이 달라졌다. 더구나 세계와 경쟁하는 국제화 시대다. 제품의 질은 더 이상 퍼센트로 관리하기가 불가능해졌다. 퍼센트로 불량을 관리하는 기업은 조만간 말기암 증상으로 쓰러진다.

    말기암 증상은 보험 창구나 슈퍼마켓에서도 생길 수 있다. 품질 불량이 제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비스업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불량률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것은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까지 전 산업에 걸쳐 각오해야 한다. 우리 기업들도 이제는 PPM 단위로 품질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세계 무대에서 명함을 내놓을 수 있다.”

    사람에 집중한 선구적 기업인

    지금이야 구구절절 당연한 말 같아도 ‘만들기만 해도 팔리던 시절’이던 30년 전에는 ‘품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차기 경영학회장인 김연성 인하대 경영학과 교수는 품질관리 분야 전문가다. 1985년 삼성에 입사해 삼성물산에서 1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가 석·박사 과정에서 품질관리를 전공할 때만 해도 당시 경영학에서는 연구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품질관리 분야 전문가인 김연성 인하대 경영학과 교수는 “좋은 제품이 나오려면 회사 전체, 종업원 전체가 바뀌어야 하고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품질관리 분야 전문가인 김연성 인하대 경영학과 교수는 “좋은 제품이 나오려면 회사 전체, 종업원 전체가 바뀌어야 하고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품질이란 것이 너무 중요한 주제이긴 했는데 당시 경영학에서는 제일 인기 있었던 전공 분야가 재무였고 다음이 마케팅, 인사관리 순이었다. 품질이나 생산성 같은 주제는 주로 산업공학이나 통계학에서 다뤘다. 샘플링이나 관리검사 같은 것이 다 통계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에 대학원(서울대 경영학)에 들어갔는데 석사 과정에도 품질을 전공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박사과정에 있을 때 삼성경제연구소 혁신팀과 경영품질아카데미라는 것을 했는데 이후 품질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점점 품질 연구를 파고들게 됐다. 미국에 맬컴 볼드리지 국가품질상(MBNQA·Malcolm Baldrige National Quality Award)도 그때 접했는데 품질경영이 뭔지, 품질향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주었었다.”

    그가 언급한 MBNQA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상무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정부의 생산성 향상에 큰 기여를 했던 맬컴 볼드리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세계시장에서 급속히 밀려나고 있던 미국이 자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상무부가 만든 품질 표준이었다. 훗날 이 상이 제시하는 평가 기준은 기업 경영의 질을 평가하는 데 신뢰성이 높은 척도로 공인받아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자국의 품질경영 기준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 상이 어떻게 품질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는 건가”라고 묻자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품질개선이라고 하면 불량품을 없애는 것만 생각해 공정 개선에 집중하는데 이 상의 평가 기준은 첫째가 리더십, 둘째가 회사의 전략, 셋째 고객 및 시장 중시, 넷째가 직원 중시, 다섯째가 정보시스템과 지식관리 시스템, 여섯째가 프로세스(생산, 고객관리, 인사관리 업무)였다. 즉 좋은 제품이 나오려면 회사 전체, 종업원 전체가 바뀌어야 하고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이 회장은 품질경영을 외치면서 제품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사람’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선구적 기업인이었다. 품질이 좋으려면 단지 품질개선 담당 직원만 잘해서는 안 되고 회사 전체의 프로세스를 다 고쳐야 한다는 깊은 뜻이 있었던 거였다. 당시 함께 일한 삼성경제연구소 직원들이 품질경영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회장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애를 먹는 모습을 옆에서 본 기억도 있다.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된 세탁기 뚜껑 조립 사건이랄지, 일본인 기술자들의 보고서는 불량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회사 전반의 모든 프로세스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정신 상태가 불량을 만든다고 생각한 거였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이 회장이 ‘품질(品質)경영’이 아니라 ‘질(質) 경영’이라고 화두를 던진 것도 매우 깊은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했을 당시 한국 대기업 안에서 품질 부서는 대개 ‘발목 잡는 부서’로 통했다. 직급으로 따지면 대리급이 품질 담당, 부장급이 생산 담당, 임원급이 재무 담당, 부사장급이 마케팅 담당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회장이 ‘품질경영’이라고 했다면 다들 맨 하위 부서, 아웃사이더 부서만 변하면 된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질 경영’이라고 함으로서 품질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만들어버린 거다. 제품의 완성도에 대한 합격과 불합격을 따지기 전에 설계와 구매, 조립 등 전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량이 발생할 여지를 남기지 말라는 뜻으로 ‘품’자를 떼어낸 것이다. 이런 철학은 ‘리더십부터 경영 성과까지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개선해 나갈 때 품질 수준이 올라간다’는 미국의 MBNQA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 삼성은 국제적으로 2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하며 ‘신경영 선언’을 했다. 삼성은 이후 ‘질적으로 대전환’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하며 ‘신경영 선언’을 했다. 삼성은 이후 ‘질적으로 대전환’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내건 ‘질 경영’에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었다. ‘천하의 삼성’ ‘최고 기술의 삼성’이라는 안팎의 평가를 근본적으로 뒤집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를 향해 ‘이미 망한 회사’ ‘2류 기업’이라고 혹독하게 깎아 내렸다. 선진국과 일본 기술을 모방하는 데만 급급하고 세계시장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는 현실을 뼈아프게 짚은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이 한 말이다.

    “국내에서 그래도 낫다는 삼성전자를 보자. 상품 수는 수천 가지, 계열사는 30여 개다. 이 중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제품은 반도체, 그것도 메모리 하나다. 분명히 말하지만 삼성은 국제적으로 2류다. 내가 회장이 되고 입버릇처럼 불량 없애라, 질(質) 위주로 가자고 했는데 아직도 양(量)에 매달리고 있다. 만들기만 하면 팔 수 있다는 건 구 시대적 얘기다. 오그라지고 망가지는 게 눈앞에 보이는데 (여러분은) 눈 하나 까딱 안 한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들을 조목조목 중환자에 비유했다.

    “삼성전자는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 2만 번씩 고치고 다닌다. 쓸데없이 자원 낭비하고 페인트 낭비해 공기 나쁘게 하고 나쁜 물건 만들어 나쁜 이미지를 갖게 한다. 이런 낭비적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 암(癌)으로 치면 2기다. 제일 급하게 손을 써야 한다. 기회를 놓치면 3기에 들어간다. 누구도 못 고친다.”

    그는 삼성전자가 만들어내고 있는 불량제품들도 암세포에 비유했다.

    “삼성이 파는 전자제품, 중공업 제품에는 회사 로고가 분명히 박혀 있다. 그런데 고장이 나면 울화통이 터진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VTR 같은 경우 아끼는 테이프를 넣었는데 고장이 나 다 갉아먹었다. TV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데 휴즈가 똑 떨어져나가 꺼진다. 이러면 당연히 그 회사 욕이 나오지 않겠는가. (소비자들은) 안 잊어버린다. 그 회사 제품 절대 안 산다. 안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쁘다’고 떠들고 다닌다. 이것이야말로 몸에 암세포가 번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삼성전자 제품 불량률이 현재 수준(3~6%)이라면 망조다. 나는 일본 제품들을 보면 삼성은 이대로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문 닫는 것이 명예롭게 닫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삼성전자가 6%씩 불량을 내면서도 작년에 250억 이익이 났는데 불량률을 2%로 내릴 경우 얼마나 이익이 날지 한번 생각해 보라. 불량을 줄이는 건 ‘경영을 잘해라’ ‘이익을 더 내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과 양심 불량의 문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도화선이 된 세탁기 뚜껑 조립 사건에 대해 이 회장은 현지에서 이런 참담함을 토로한다.

    “감정의 표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쓸쓸함, 씁쓸함, 허무함, 화가 나는, 울화통 터지는, 한심한, 체념하는. 개인이나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감정은 ‘포기’다. 나는 평생 두 번의 포기를 했다. 오늘 아침 불량제품 만드는 비디오를 보고 한 번 더 하려 했다. 전자는 물론이요, 전관·코닝·중공업·물산·모직·제당도 다 양으로 채워가고 있다. 완전 포기 상태다. 3년 전보다 더 허무하다. 이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직장이냐?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이 개인의 부귀영화를 하자는 것 아니다. 현재 내 재산 충분하다. 명예 때문이다. 성취감이다. 성취감은 여러분, 삼성그룹, 우리나라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질을 키우면 양이 커진다. 질이 높아지고 탄탄해지면 우리와 후손들이 잘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별별 어려움, 허무, 슬픔, 화, 울화통, 울고, 웃고 다 겪었다. 포기하기는 싫다. 한번 포기하면 회복 불가능이다.”

    질이 되면 스케일은 얼마든 가능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질 경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었을까. 생전에 한 말이다.

    “회의 방식에서 보고, 목표, 관리, 평가에 이르는 모든 일을 질 중시로 바꾸자는 거다. 질 중시라는 건 형식보다 본질과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것이다. 질 없는 양(量)은 알맹이 없는 빈 껍질뿐이다. 질을 높이면 저절로 양을 넘어 ‘스케일’이 나온다. 고가, 무재고, 판매 확대로 이어지면서 근무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 이는 삼성인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것이다. 질 위주 경영을 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이 변해야 삼성이 변하고 삼성이 변해야 다른 그룹도 변하고 정부도 변한다. 이기주의와 과거 습성을 버리고 인간성, 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스케일’이라는 개념이다. 회장은 질이 우선돼야 규모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질을 중심으로 작은 단위로 만들어서 이것을 블록같이 붙이기만 하면 된다. 스케일 개념이 없으니 전부 불안한 것이다. 질이 되면 스케일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질로 가면 전부 줄어들 것만 같아 겁이 난다고 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스케일 개념을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스케일 개념은 양하고 좀 다르다. 스케일을 키워라, 질을 철저히 하면 스케일은 질의 노하우만 있으면 국제적으로, 동남아로, 북미로, 남미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호소한다.

    “모든 종업원이 ‘불량은 적이다, 불량은 악의 근원이다. 불량 세 번 내면 퇴직이다’ 이렇게 가야 한다. 정말 같이 한번 해보자. 지금 우리는 양과 질의 비중이 1% 대 99%도 안 된다. 0대 100이다. 10대 90이나 1대 99로 생각한다면 이것이 언젠가는 5대 5로 간다. 한쪽을 0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절대로 못 간다. 이렇게 안 가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얼마든지 돌아간다. 이걸 나밖에 바꿀 사람이 없고 내가 바꾼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협조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 전자 라인에 있는 모든 사업부장급 이상, 아무리 내려가도 상무 이상까지 이걸 참고 견딜 결심을 하지 않고는 탈피할 수가 없다.”

    사실 그의 불안은 현재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불만족이나 걱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변화하는 안팎의 국내외 상황에 대한 면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그의 말이다.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선대(先代)가 경영했던 1987년 이전과 현 경영 상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치 외교 첨단기술 등 모든 분야가 급변하고 있다. 과거 50년의 변화보다 향후 10년에 있을 변화의 양과 질이 훨씬 더 많고 클 것이다. 기업조직, 연구소, 생산방식, 사고의 틀 모든 게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전 세계가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있고 중국 같은 후발 개도국이 추격해 오고 있다.”

    이 회장은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을 넘어 대한민국이 3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갖고 있었다.

    “우리는 1960년대에 경제 기초를 닦았고, 1970~80년대에 경제의 틀이 잡혔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모든 것이 쉬워서 단순 조립 사업으로 수출도 하고 먹고 살았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성공한 대표 나라가 한국이었다. 옛날에는 행정부와 전 국민이 위기의식과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눈이 반짝반짝했는데 요즘은 모든 게 어려워졌는데도 그저 잘되겠지, 몇 가지만 개선하면 옛날같이 되겠지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제품이 복합화 시스템화 차별화되지 않으면 팔기도 어렵지만 팔 수도 없다. 물건 하나 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국가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국가·국민·재계 다 합쳐도 될동말동 어려워졌는데 (상황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 조금만 정신 차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다. 삼성은 물론 나라 전체가 이 시점에서 정신 안 차리면 인도네시아처럼 3류국으로 떨어진다. 난 이것이 눈에 보인다.”

    이건희 회장은 제품의 불량은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의 불량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시종일관 변화를 강조한 것은 ‘삼성 제품의 질’이 아니라 ‘삼성인의 질’이었다. 생전 고인의 말이다.

    삼성인의 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촉발한 1993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베스트바이 어바인 매장 모습. 소니(438달러), 필립스(418달러) 아래쪽에 삼성전자(348달러) TV 가격표가 배치돼 있다. [삼성전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촉발한 1993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베스트바이 어바인 매장 모습. 소니(438달러), 필립스(418달러) 아래쪽에 삼성전자(348달러) TV 가격표가 배치돼 있다. [삼성전자]

    “버젓이 불량품을 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없는 양심 불량, 삼성 이름이 들어간 불량품을 보고도 분한 마음이 들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 일하는 사람 뒷다리 잡는 풍토와 집단 이기주의 등 정신문화의 불량이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다. 질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회사 조직도, 삼성 조직 전체도 질로 가야 하고, 여러분 개개인의 인생도 질을 추구해야 한다. 자녀 교육도 질로 가야 이 나라가 질적인 일류가 되며 질적인 삶의 개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삶의 질이 바뀌어야 제품의 질이 바뀐다는 그의 말은 매우 본질적이다. 생전의 그가 기업의 목적을 단지 이윤 추구에만 두지 않았다는 사상가적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무려 세 챕터에 걸쳐 ‘질 경영’에 대한 철학을 설파한다. 그가 질 경영 선언을 밝힌 배경은 이렇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물건 만들기에 바빴다. 삼성 역시 무슨 물건이든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설탕이나 옷감 같은 품목은 선금을 받고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그때는 불량품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좀 하자가 있어도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고성장 시대가 저성장 시대로 바뀌고 시장개방으로 세계적인 무한경쟁시대가 열리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생산자 위주 시장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고객의 요구가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생산자는 이를 수용해야 생존이 가능한 소비자 위주 시장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량 불감증을 파악하지 못하고, 양적 사고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신경영 모토를 ‘질 경영’으로 정한 것은, 이처럼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서다.”

    이 회장은 질 경영을 위해 “일시적으로 시장점유율이 떨어져도 좋다” “적자가 나도 좋다” “사재를 털어서라도 질 경영을 실현하겠다”고도 했다. 생전 육성이다.

    “나는 쇼크를 싫어한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성공한 예는 없다. 모든 것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회장 취임 이래 10~15% 시장점유율이 줄어들어도 좋다고 말해 왔다. 적자는 다른 계열사가 메우면 된다. 그래도 적자가 나면 내 사재라도 털겠다. 삼성이 금성, 현대 등과 맞설 때 5~10%의 시장점유율 하락은 길어야 3년이다. 점유율 하락이 가슴 아프다면 내가 더 아프다. 그것은 올리기 위한, 승리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 아닌가. 이것도 못 하면 아무 것도 못 한다. 점유율은 별문제가 없다. 적자도 몇 달이다. 질로 가면 이익은 자연히 올라간다. 최악의 경우 내려가면 내 재산 내놓겠다. 내 재산 털어서 안되는 업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힘을 하나로 모아달라고 호소한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노력하라도 아니고, 더 많이 하라도 아니고, 더 잘하라도 아니다. 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제 되어야 한다. 한 방향으로 가는 게 우리 민족에게 안 되고 있고, 우리 삼성에 안 되고 있고, 전자도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 경영의 구체적인 상상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5why’와 ‘장인의 예술화’다. 앞서 소개한 김연성 교수의 말이다.

    “품질을 높이는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를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여기서 이건희 회장이 내세운 것이 ‘5why’다. 바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들어가는 거다. 불량제품을 두고 사장과 직원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자. ‘왜 잘못됐지?’ ‘부품이 문제였습니다.’ ‘부품은 왜 잘못됐지?’ ‘협력사에서 잘못했는데요.’ ‘협력사는 뭘 잘못했지?’ ‘재료 배합이 잘못된 것 같아요.’ ‘왜 배합이 잘못됐지?’ ‘직원의 실수 아닐까요?’ ‘왜 실수했지?’ ‘레시피가 없었던 거 같아요.’ 이렇게 되면 결국 문제의 본질은 레시피라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두 번 질문하다 끝난다. 아이가 ‘하늘이 왜 파랗지요?’ 물으면 한두 번 답해주다 ‘시끄러워, 공부나 해’ 하는 부모처럼 말이다.(웃음) 이 회장은 이런 상상력을 갖고 일하다 보니 항상 위기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미래가 그려지고 어떻게 될지 예측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없는 질문, 5why

    5why에 대한 생전 이 회장의 말이다.

    “5why는 사물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왜 불량이 나는가? 불량의 종류가 무엇인가? 조립이나 부품의 불량 또는 납땜질 불량인가? 두세 번 분석하면 근원을 알 수 있다. 결국 조립업체 사람들이 불량품을 만들지 않도록 평소 상품 지식을 가지고 협력업체를 교육하고, 자금과 기술력을 제공해 완제품이든 부품이든 관련되는 수십 개 협력 회사를 높은 차원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대기업 조립업체 개념이다. 이것을 모르고 있다.”

    5why에 대해서 삼성 퇴직 임원들의 증언이 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인 고문의 보고서를 읽던 회장과 함께 탑승했던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비행기에서 보고서를 읽고 어떤 의견을 냈느냐고 물었다.

    “당시 수행원이 6명이었다. 회장 뒷좌석에 앉아 토론이 시작됐다. 회장은 전혀 잠을 자지 않고 답을 기다렸다. 우리들은 ‘책임 의식과 주인 의식이 없어서 그렇다’ ‘룰에 대한 개념이 없고 처벌이 약해서 그렇다’ 등 한두 시간마다 답을 내 말씀드렸는데 회장은 만족하지 않은 듯 ‘다시‘ ‘다시’를 반복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주재원들과 저녁을 먹고 난 뒤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 ‘아니다’라는 답만 들어야 했다. 회장은 마치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정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하자 그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말을 하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신경영 초기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인사팀장을 지내며 이 회장 통역을 맡기도 했던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현 한미협회장)도 당시 수행팀원으로 전 일정에 함께했다. 그의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다.

    “이유와 대책을 묻는 회장께 ‘교육이 잘못돼서 그렇습니다. 기본 질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매사 얼렁뚱땅하는 문화가 옛날부터 몸에 배서 그렇습니다. 매출 달성에 급급해서, 양 위주로 ‘물량 떼기’ 하느라 그렇습니다’ 등등 각자가 머리에서 짜낸 의견들을 말씀드리니 회장은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왜 그리 됐노?’ 다시 반복해 되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시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이나 이런 것들부터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군대 가서 요령 피우는 거를 배우는 것도 이유인 것 같습니다’라고 또 나름대로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회장은 다시 ‘그럼 우리 사회는 와 그래 됐노?’ 이런 식으로 질문이 계속됐다. 우리는 더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말이 바로 회장의 ‘5why’다. 즉 문제가 생기면 적어도 다섯 번 ‘왜’를 물어야 한다는 거였다.”

    다음은 현명관 전 비서실장 말이다.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겠다는 집념과 노력이 대단했다. 어느 날 임원회의에서 ‘물은 왜 차가운가’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얼음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얼음은 왜 찬가?’ ‘0도 이하에서 얼기 때문입니다’ ‘왜 0도 이하에서 얼음이 되는가’ 이런 식이었다. 회장은 한번 관심을 가지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갔다. 반도체는 물론 자동차에서부터 전기오븐까지 디자인과 기술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를 모시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런 열성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상상력은 장인의 예술화로 이어진다.

    “부품 분석만 잘하면 제일 중요한 부품을 만드는 수십, 수백 개의 협력업체를 잘 키우면 된다. 이것이 장인의 예술화이다. 협력업체를 등쳐서 싸게 사는 것이 아니다. 잔재주 부리는 것, 우리만 덕 보자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룹 각사도 이익이 가도록 하고, 협력업체도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도 키워주고 자금도 도와준다. 이것은 사업부장이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전무, 부사장, 사장 등이 있다. 회장과 앞뒤가 바뀌어 있다. 이것이 포인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설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설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질 경영의 연장선상 ‘상생’

    ‘불량은 암’이라고 부르짖었던 이건희 회장의 질 경영론은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라인 가동을 중단해도 좋다”로 이어진다.

    실제로 삼성은 1993년 6월 중순 48시간 동안 세탁기 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전자를 비롯한 전 그룹에 ‘라인 스톱제’를 도입·시행했다.

    이 제도가 검토된 것은 그해 3월 도쿄 회의에서였다. 전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한 당시 회의에서 이 회장은 ‘라인 스톱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라인 스톱제를 하라고 하면 공장이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 사장들이 써놓은 보고서를 여러 번 보았는데 사장들이 착각하고 있다. 라인 스톱이란 게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워하고 있다. 라인 스톱이 안 되기 때문에 라인 스톱을 쓰는 것이지 라인 스톱이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라인을 스톱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품질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 종업원 수준이 되어 있으며 협력업체 불량이 10만에 하나, 1만에 하나 정도의 불량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라인 스톱이 가능하다는 거다.

    자동차, 전자, 중공업, 조선이건 공장에 라인 스톱을 설치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수준에서 불가능하다. 관점이 다르다. 불량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라인 스톱을 쓰는 것이 아니라 불량이 안 나오기 때문에 라인 스톱을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불량률을 낮게 할 수 있다는 결과로서, 표시로서 라인 스톱을 달아놓은 것이다.

    경영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뒷면을 알아야 한다. 화면을 네 번 다섯 번 보면서 뒷면을 보지 않으면 경영자가 아니다.”

    이 회장이 중소 협력업체들과의 협력을 중시하며 ‘상생’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냈다는 건 그리 많이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이 회장의 상생 역시 질 경영의 연장선상이었다. 그의 말이다.

    “대기업 혼자서만 제품을 완성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는 부품이 2만 개, 컬러TV가 400개 500개. VER이 800개 900개인데 어떻게 대기업 혼자서 이걸 만들겠느냐. 70, 80% 이상은 중소기업에서 만드는 부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리는 생각하지 않고 원가절감을 핑계로 무조건 쥐어짜는 대기업 관행은 곤란하다.

    일본 제조업이 강해진 것도 소위 용역 즉 협력업체를 아주 잘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제조원가 중 원자재 비중이 높고 많은 협력업체를 갖고 있는 삼성도 협력업체에 대한 효율적 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업의 성패는 구매 단계에서 결판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표현이 ‘구매의 예술화’다.

    “불량품을 줄이려면 평소 상품 지식을 가지고 협력업체를 교육하고 자금과 기술을 제공하고 완제품이든 부품이든 관련되는 협력업체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것이 대기업 조립업체 업의 개념이다. 이것이 장인의 예술화다.”

    이 회장은 ‘품질경영’에서 ‘품’을 뺐다. 그러곤 질 경영을 외쳤다. 이 회장의 질 경영이 삼성뿐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을 바꾸는 주춧돌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전 세계 1위 LG 창원공장을 보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보라. 전국 산업단지의 제조업 공장들을 보라.

    6월 7일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30주년을 맞았다. 아들인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10월 취임 이후 ‘뉴삼성’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의 30년 뒤 모습은 어떨까. 대한민국의 산업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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